◈크리스천의 희망 막4:30~34
◑1. 희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출처 보기
어느 늦은 밤, 막 퇴근을 하려던 참에
40대 초반의 환자 한 분이 진료실에 들어섰다.
회색빛 얼굴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 겉으로 보기에도 말기 간경화 환자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 질문에 환자의 남편이 대신 대답했다.
“수면제를 조금 처방받을까 해서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미 상투적인 대답이 준비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간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수면제는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정중하게 처방을 사양하고 내일 날이 밝으면
종합병원으로 가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편에게 힘없이 기대어 있던 환자가 말했다.
“선생님 말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잠입니다.
긴 잠. 깨지 않는 잠이면 더 좋고요!”
절절한 고통이 건너왔다.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은 고통이 너무 극심하면 24시간 잠을 잔다.
아니 24시간 깨어 있다. 쉬어야 할 뇌는 끊임없이 잠을 부르고,
병소(병균이 모여 있는 자리, focus)를 쥐어뜯는 고통은 잠들고자 하는 뇌를 깨운다.
그래서 환자는 내내 잠들고 내내 깬다. 잠자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악랄한 병소들은 기꺼이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숙주인 몸이 죽어 가면, 병소도 같이 죽어가야 하는 운명임에도
병소는 악랄하게 자신의 숙주를 학대하고 괴롭힌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이 사람이 담관암을 앓고 있어서...”
처방전 쓰던 손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담관암. 길어야 1년의 여명을 가지는 사악한 병이다.
차트에 적힌 그의 나이는 41살.
아마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한둘쯤은 있을 터이다.
외과의사로서 지켜봐 왔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로밖에 없었다.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외과 의사를 하는 동안 비슷한 부위인 담도에 암이 걸린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위로에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선생님 그렇지요? 사는 사람도 있지요? 제게 그 분들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지금 내가 던진 위로가 과연 이 분들에게 긍정적인 구실을 할 것인가
두렵기도 했다.
대개 암환자들은 말기라는 판정을 받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 십 가지 민간요법과, 전국의 용하다는 사람들을 다 만나지만,
그 중에는 죽음을 앞에 둔 간절한 사람들의 희망을 이용해서
추악한 짓을 하는 사람도 셀 수가 없다.
내 설명을 들은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말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저 사람은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언제 포기하고 무너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처지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저 사람 살아납니다. 연락처를 꼭 알려주십시오.”
더는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 남자의 ‘사랑’과 ‘믿음’을 존중해야 했다.
옛 기록을 되짚어 대략 알려주고, 회복된 환자를 치료한 해당 병원을 찾아가
“그분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요청해 보라”고 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이미 ‘희망’의 싹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게 옳은 일이었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무조건적인 희망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거나 혹은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보다 ‘희망’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젠가 내가 다른 환자를 만났을 때
‘의사 생활하면서 담도나 담관에 암이 걸린 환자가 완치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지요’라고 말 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2.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심한 화상을 입은 소년이 입원했다.
얼굴과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 대학생 한 명이
우연히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가 소년을 보았다.
붕대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어린 학생이 불쌍했던 청년은,
그날부터 소년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환자 기록을 보고 그 아이가 중학교 2학년임을 확인한 청년은,
교과서를 읽어 주고 영어 문법을 가르쳐 주었다.
물론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작은 움직임(미동)도 없었다.
그래도 청년은 매일매일 아이를 찾아왔다.
희미한 정신력으로 생을 이어 가던 아이는
청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나에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을 보니, 내가 나을 수 있나 보구나!’
그날부터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차츰 청년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할 수 있게 되었고,
함께 책을 읽는 일도 가능해졌다.
마지막 붕대를 푸는 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형이 책을 읽어 줄 때마다 나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생각을 했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상상을 했어요.
학교에 가고 싶은 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죠!”
크리스천은,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랑에서 나오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 (펀 글)
◑3. 설교는 이사야서의 구조로 해야
이사야서는 1-39장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깨부수는 내용이다.
그러나 40-66장은, 회복과 소망을 주는 메시지다.
◑4. 크리스천의 희망 : 하나님의 나라, 겨자풀의 희망
▲왜 하필이면 겨자풀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막4:31~32
늘 듣던 말씀이니까 여러분은 이게 충격적인 비유라는 사실이
별로 실감이 안 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청중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비유였습니다.
하고많은 것들 가운데 하필이면 겨자씨라니요?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는 ‘작은 것’, ‘변변치 못한 것’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나라를 기다려왔습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예루살렘이 세계 위에 우뚝 설 것이고,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백향목에 빗대기를 좋아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내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이스라엘의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겔17:22-23)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위세 있는 백향목이었습니다.
백향목은 성전이나 제단, 궁전을 짓는 데만 사용하던 최고급의 나무였습니다.
척박한 땅에 사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
백향목은 그야말로 위풍당당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향목의 상징을 폐기하시고,
겨자풀의 상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왠지 왜소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겨우 겨자풀이라니요? 사실 겨자풀은 크게 자라봐야 3m 정도입니다.
그런데 겨자풀은 번식력이 좋아서 급속히 퍼질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민들이 기피하던 식물입니다.
대체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하나님 나라를 겨자풀에 비긴단 말입니까?
▲백향목 세상의 전복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도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백향목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로마의 이면을 보고 계셨습니다.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피식민지 백성들,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
끊일 새 없는 전쟁….
함석헌 선생님은 “전쟁은 사치 가운데 가장 큰 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치란 분수에 지나치게 치레하는 짓을 말합니다.
그러니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할 돈과 힘을,
죽이고 파괴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사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백향목 세상은 몇몇 특권적인 사람에게만 천국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런 현실에 눈 뜨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백향목들의 세상을 전복시키기 원하셨습니다.
화려한 소수의 지배자가 주도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몫을 살아내는 세상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척박한 땅에서도 억센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겨자풀의 예를 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는 잘난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잡초와 같은 사람들이 열어가는 나라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구석이 많은 우리가 함께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겨자풀은 번식력이 강하고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자기 밭이나 정원에 그것을 가져다가 심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겨자씨가 저절로 퍼지는 것이라 하지 않으시고,
누군가가 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적인 수고와 땀 흘림을 통해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시126:5-6)
비록 자기 이익에 발 빠른 사람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등불 하나를 밝히는 심정으로 나눔과 섬김과 치유와 사랑의 씨를 심는 사람들이
있어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크고 번듯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겨자씨처럼 우리가 척박한 토양에도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마음으로 산다면,
백향목 같은 사람들만 높임 받는 세상도 변화될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님은 ‘보듬어 안는 게 혁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편이니 내 편이니, 미우니 고우니 하고 사람들을 자꾸 가르지 말고
그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 보듬어 안을 때 세상은 달라질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백향목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겨자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일수도 있지만,
우리가 만든 그 그늘 아래서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만약 우리더러 백향목이 되라시면, 우리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향목이 되려면 ‘스카이 대학’도 나와야 되고, 가문 배경도 좋아야 합니다.
하지만 겨자풀 정도는 누구나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지금부터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파종자입니다.
그 놀라운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4 단락,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07.02.11. *원제목 : 겨자풀처럼, 막4:30-34
◑5. ‘잘못된 희망’을 심으면 안 됨
우찌무라 간조의 「구안록」(求安錄)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1. 선의의 욕심
스펜서는, 성취욕 같은 선의의 욕심이 인류의 발전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에 민주주의, 법제도가 발전한 것은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욕심의 결과이며,
각종 과학 발명을 통해 인류가 점점 문명화되는 것도 선의의 욕심 때문이라며,
선의의 욕심을 장려하는 사람도 있다.
인류의 역사 발전은 한마디로 선의의 욕심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미개한 야만인에게는 이런 욕심이 없다. 그래서 미개하다고 본다.
이런 성취욕, 선한 목적의 욕심이 꼭 필요하다는데...
이러한 스펜서의 주장은 당시 20세기 초 일본 사회의 지배적 사상이었다.
▶이것은 인본주의, 기독교 사상 아님
선의의 욕심으로 인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유토피아 건설의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1차,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그 망상이 깨졌다.
이런 인본주의는 처음에는 유익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손해다.
일리백해(한 가지 이익, 백 가지 손해)다.
선의의 욕심이 좋은 것이지만,
이것은 반드시 개인/민족간의 충돌/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란 욕심의 충돌이며, 정치란 욕심의 절충이다.
▲2. 선의의 경쟁
선의의 경쟁을 통해 인류 역사, 문명, 과학은 더욱 발전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적당히 선의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경쟁이 없는 곳에는 아무런 발전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인본주의 ←일리백해
일례로, 나폴레옹이 잠깐 황제의 관을 쓰고 프랑스의 영광을 위했지만,
반대편에 2백만 군인이 전사했고,
그에 따른 수백만 명의 과부와 고아가 평생 고통을 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측근들을 서로 '충성심 경쟁'시키는 리더쉽 방법을 썼다고 한다.
김형욱, 이후락, 박종규, 차지철, 김재규, 나중에는 전두환 씨 등
그래서 많은 발전이 있기도 했지만,
그 경쟁심이 측근들에 의해 정치탄압의 경쟁 등 잘못된 결과를 부추겼으며,
결국은 최측근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득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실이었고,
영원히 지속되는 선한 열매도 없었고, 성경적인 방법이라 볼 수도 없다.
지금도 전세계는 경쟁적으로 IT산업, 유전자 공학을
경쟁적으로 발전시키고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결국 경쟁적 진보는 인류 전체의 손해요,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론 퇴보다.
‘경쟁에 의한 발달’은 한 가지 이로움이 있겠지만, 동시에 백 가지 해악이 있다.
인간인지라 '선의의 욕심, 선의의 경쟁'도 할 수는 있으나,
가장 핵심적인 덕목이 빠지면...
아무리 선한 것도 인본주의가 되고 마는데...
▲3. 그럼, 기독교 사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기독교는 선의의 욕심도 없고, 선의의 경쟁심도 없는
<선의의 패배주의>인가?
항상 지고(좋은 말로 양보), 욕심 없이 불교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고전 13:3
선의의 욕심, 선의의 경쟁도 한 쪽 면으로 분명히 선한 점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 빠질 때 → '일리백해'가 되며, 득보다 실이 많다.
*성경에 선한 경쟁을 하라는 구절도 있다:
'너희도 일등 되도록 달음질해라'(고전9:24)
*선한 욕심을 내라는 구절도 찾으면 있을 것이다.
'왕이 5~6번을 쳤으면 좋았을 것을...'(왕하13:19)
선의의 경쟁, 선의의 욕심, 그래서 머리되고 일등하자!
그런 구호가 ‘선의의 목적’으로 장려될 수 있겠지만,
거기에 '사랑'이 빠지면... 세상 철학, 인본주의와 똑같이 된다.★
그 결과는, 지나고 보면 일등이 도리어 백해가 된다.
세상에 일등되고 망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 신문에 종종 나온다.
▶장애인 달리기
이런 글을 읽어보았다. 88올림픽 때 장애인 올림픽도 같이 열렸다.
한 장애인이 몸을 비틀며 열심히 일등으로 달렸다. 거의 골인 지점에 가까이 왔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에는 뒤쳐진 주자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거꾸로 달려가서 뒤쳐진 장애인 선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같이 골인했고, 그것을 지켜보던 모든 관중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는 실화이다.
사랑이 빠진 선의의 욕심, 선의의 경쟁 사상은 기독교가 아니다.
패한 사람은, 승자를 평생 원수로 여기고 살아갈 것이다.
크리스천은 상생과 사랑의 빛을
한국에, 나아가 열방까지 비추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은, 그런 하나님 나라의 희망(사랑의 나라)을
겨자씨처럼 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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