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곧 길이요.. Max Lucado
▲아프리카 사파리, 깊은 정글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그 사람은 현지인 가이드와 함께 깊은 정글 속을 체험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벌초용 칼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정글을 헤쳐 나가며 길을 만들었다.
키 큰 잡초들과 나뭇가지들이 가이드 앞에서 베어져 쓰러졌으며
그 관광객은 그를 뒤따라 정글을 헤쳐 나가던 중이었다.
날씨는 무지 덥고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거의 탈진해버린 관광객은 앞장 선 가이드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지금 도대체 우리가 어디쯤 있는 거요?
당신은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 거요?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소?”
그러자 그 노련한 가이드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 정글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라오기나 하시오!)
▲우리는 오늘날 그 관광객과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다.
“주님, 지금 저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지금 가는 이 길이 정말 맞습니까? 제 눈엔 길이 안 보이는데요...!”
그러면 주님은, 마치 그 가이드처럼, 시원한 대답을 안 주시고
내가 곧 길이라며, 무조건 따라 오라고만 하신다.
물론 주님이 어렴풋한 힌트를 한두 가지는 주시기는 하신다.
그러나 확실한 표적은 안 주신다.
그래서 보통 우리들은,
지금 자기가 어느 길을 어디쯤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어리둥절 한다.
마치 그 관광객이 정글 속에서 동서남북을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우리가 꼭 그처럼,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당황하며 초조해 한다.
▲1. 주님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주시진 않지만,
그 대답보다 더 큰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 골치 아픈 정글을 없애 버리시는가?
- 아니다. 풀과 잡초는 변함없이 여전히 무성하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주님은 거기 정글 속에 있는 무서운 맹수들을 없애주시는가?
-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위험은 언제나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예수님은 정글(환경)을 변화시켜주시지는 않지만,
주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강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그래서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절망해서 중간에 주저앉도록 하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인내해서 정글을 헤쳐 나가도록... 우리를 강화시키신다.
▲2. 크리스천의 소망 : 가이드의 약속
주님은 깊은 정글과 같은 곤경에 처한 우리에게
‘내가 끝까지, 네가 가는 길에 너와 함께 하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우리는 이 약속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정글을 헤쳐 나가는 인생길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동행의 약속이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하는 ‘소망’이다.
그렇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기를 불사하시는 목자이시다.
이 얼마나 든든한 목자이신가!
크리스천은, 주님이 주시는 소망,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고는,
(물질, 지위, 권세, 인맥 등) 그 무엇으로도
결코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음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과 이야기 하고 싶어 했던 사람
언젠가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모세에게 하셨던 것처럼 가시덤불을 태우소서, 하나님!
그러면 제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를 위하여 하셨듯이 성벽을 허무소서, 하나님!
그러면 제가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듯이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소서, 하나님!
그러면 제가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다음 그 사람은
가시덤불 옆에,
성벽 가까이에,
호수 근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기다렸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다.
가시덤불이 아니라, 교회 안에 불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벽을 무너뜨리셨다.
성벽이 아니라, 자기 양심의 죄의 벽을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은 폭풍을 일으키셨다.
호수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속에 폭풍을 일으키셨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응답하기를 기다리셨다.
기다시리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교회가 아닌... 가시덤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양심이 아닌...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영혼이 아닌...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다고 결론을 맺었다.
그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당신은 힘을 잃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듣기를 잊었느니라!” <송봉모 신부님의 글
◑ Why me? 왜 하필 접니까?
미국 알래스카 대학 교수로 계시는 김춘근 장로님의 간증집
“와이 미(Why me?)”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분은 단돈 2백 불을 들고 미국유학 가서 30대 초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학 교수가 되고, 4년 만에 최우수 교수로 뽑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에게 갑자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간경화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Why me?”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왜 제게 이런 불행이 와야 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았고, 신앙생활도 잘한 편이었는데
그런 불행이 온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기도하다가 자신의 숨은 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만의 죄를 비롯해 너무 많은 죄가 생각나서
그분은 울면서 그 모든 죄들을 회개했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분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서
사람들은 그를 ‘알래스카의 요셉’이라고 불렀고,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라는
신앙과 도덕성 회복 운동을 통해
수많은 청년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운동을 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Why me?”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의미는 “왜 저 같은 부족한 죄인을 이렇게 써주십니까?”라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 단락, 스크랩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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