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신앙에서 벗어나려면 레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26:1
◑불안과 공포 속에서 마술적 신앙에 기대는 인간 심리
우리는 지금 원시시대가 아니라, 과학이 발달한 문명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미개인이나, 문명시대의 현대인이나 똑같이 발견되는 것은,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인데...
▲원시시대 미개인의 불안과 공포
미개인들에게는 주로 자연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다.
그들은 천둥, 번개, 불. 일식 등의 자연현상을, 초자연적 신의 임재로 착각했고,
그래서 자연현상을... 괜히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 결과 종교의식을 통해 그 신들의 환심을 사서,
어떤 재앙을 피하고자, 자기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원시종교, 이방종교가 생긴 기원이다.
그러나 그 이방종교, 샤머니즘이 자연현상을 통제할 힘은 사실상 없었다.
그들 종교가 그런 자연현상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사실은 마술, 속임, 우연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술신앙에 묶여 있었고,
그것이 미개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다.
그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심리적 불안을 해소해 보려는 자구적 노력 때문이었다.
그런 현실을 배경으로, 마술신앙은 항상 인류역사에 지속되어왔다.
마술을 보면, 그것은 분명히 마술(속임)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양 믿는다.
이렇게 마술은, 사람들을, 사실이 아닌 것(속임)을 믿고 따르도록 조종한다.
마술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자기가 사실이 아닌 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 못 한다.
자기는 사실을 믿고 있다고 확신한다. 마술에 매여 있으면 그렇게 된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오늘날 우리도 마술신앙에 묶일 수 있는데...)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 마술신앙을 찾게 되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로, 차츰 자연의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미신적이며 마술적이었던 원시 신앙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불안과 공포’가 그의 무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무의식속에 깊이 숨어있으면서 현대인의 삶을 항상 조종한다.
현대인들은, 미개인들이 미처 느끼지 못했던
‘도덕적 가책, 열등감, 삶의 의미, 죽음, 생태계의 파괴, 핵 위기’ 등에서 오는
삶의 공포와 불안이 갈수록 더 심화되면서, 삶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달래줄 어떤 미신적 신앙이 계속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시가 규정하는 참 신이 아니라,
자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가 스스로 만든 신(우상)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주팔자, 오늘의 운세, 이런 것이 여전히 유행하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더 불안하다.
원시사회에서는 삶의 공포와 불안이.
종족이라는 ‘집단 단위’에서 함께 경험하고 대처하기 때문에...
현대인과 같은 외로운 정신적 부담과 불안이 어쩌면 덜 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자기들이 경험하는 공포와 불안을
‘개인이 혼자’ 대처해야 하므로,
어떤 면에서 미개인보다 불안과 공포, 정신적 긴장을 더 심하게 느낀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많은 정신병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불안과 공포의 극복을 도와주는 방편들... 사실 별 도움 안 된다.
그래서 이런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 정신적 긴장을 돕기 위해
여러 전문직종들이 함께 발달하고 있는데,
의사, 변호사, 심리 치료사, 정신과 의사, 카운슬러 등이다.
또한 각종 신경안정제, 수면제, 심지어는 환각제가 무수히 팔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 역시 ‘심리적 차원, 법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 준다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내면 깊은데서 오는 불안과 공포는,
사실 종교적 차원의 문제이며,
참된 실재(하나님)와의 만남이 아니면, 사실 그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불안과 공포의 잘못된 처방 : 마술신앙을 붙잡음
미개사회에서는 마술에서 깨어나게 하는 참된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고 살았다.
그 시대의 사회 전체를 마술이 지배했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마술이 아니라, 참 신앙을 믿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마술적 신앙(샤머니즘 같은 것: 편집자)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원시사회의 굴레(마술신앙)를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아니, 일면 스스로 벗어나기를 원치 않고, 도리어 그것을 붙잡고 매달리고 있는데...
◑마술신앙 vs 참 신앙
▲구약 이스라엘 전체 역사의 싸움 - 미신에서 깨어나는 것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 국가들과 달리 마술신앙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 참 신을
인격적으로 믿었던 유일한 종교였다.
구약 전체를 통털어 보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 신앙이냐,
vs 주변 모든 국가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우상을 섬기는 미신신앙이냐를 놓고
계속적인 싸움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문제도 역시 똑같다.
하나님이냐, vs 내 욕망을 채워주는 우상이냐? 하는 문제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나지 않으면,
마술신앙에서 오는 편견, 독선, 아집, 그릇된 인생관, 교만에 사로잡혀있게 된다.
일단 거기에서 깨어나 보면, 과거에 자기가 거기에 묶여 있었던 것이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못 깨닫는데...
▲광야의 시험 = 마술신앙의 시험
돌로 떡으로 만들라,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다 준다는 것 등,
사탄이 예수에게 시험한 것은 한마디로,
마술을 부려서 민중을 열광시키고
그들을 사로잡는 식의 메시야가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이 제안한 것들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그 길은 십자가의 고난이 없어서 좋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길은 자신을 속이는 길일뿐만 아니라, 민중을 속이는 길이요,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길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위대성이다.
그 시험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신앙의 내면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
사탄의 시험을 아슬아슬하게 이기신 것이 아니라,
그런 큰 유혹을 아예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 목적은
인기, 돈, 명예, 안정, 권력, 성공, 성적 쾌락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인생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만족하고 사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기 삶의 목적을
오로지 소유, 성공, 명예, 인기, 물질적 풍부, 나만의 안정에 둘 때,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길 수 있다.
자기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런 세상적, 현세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살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목적들을 보다 쉽게 획득하게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게 된다.
(우상의 본질이, 인간이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만든,
인간의 자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신이 아닌가!)
▲마술적 신앙에서 깨어나시라
하나님의 속성, 그의 사랑, 그의 공의 -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고,
자기 이기적 소원을 이루어주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따르다가,
자기 이기적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며, 심지어 신앙을 떠난다.
신을 어떻게 무마시키고 그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느냐가 - 그의 관심사다.
신을 무마시키기 위해, 교회봉사를 많이 하고, 선행도 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마술적 신앙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무의식에 깊이 깔려있는 그런 마술신앙(샤머니즘)에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소유하는데 삶의 목적을 전적으로 두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그런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마술적 신앙의 예★★
어떤 큰 회사에 다니던 중역이 있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예화)
그 회사의 회장(최고경영자)이 되는 것이 자기 삶의 최고 목적이요,
자기 존재의 궁극적인 가치요, 숨쉬고 사는 의미였다.
오로지 그 일을 위해서만 현실을 사랑하고,
지금이라는 시간은 오직 그 목적을 위해 지나쳐버리는 하나의 디딤돌이요,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이나 가족은 모두 그 일에 이용하기 위한 이용가치에 불과했다.
주변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인격적 가치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목적성취를 위해 불철주야 절에도 가보고 무당도 불러보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나이 많은 권사님이 찾아와서
‘자네 그 회사의 회장이 되려면 예수를 믿게!’ 라는 전도(?)를 받았다.
그것은 정녕 그에게 복음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애써도 안 됐는데, 드디어 굿뉴스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새해부터 교회에 나가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던 그 열심으로
똑같이 새벽기도, 구역예배, 철야기도 빼먹지 않고 다녔다.
어디서 배웠는지 십일조는 천 원 한 장도 안 빼먹고 철저히 냈다.
목사가 볼 때는 기가 막힌 믿음의 성도였다.
어느 장로, 권사보다도 나았다.
그는 교회에 와서 헌금을 드릴 때나, 예배를 드릴 때나, 성경공부 할 때나,
그의 염두에는 ‘회장되는 것’이 가장 큰 기도제목 이었다.
‘주님! 회장, 제발 회장만 시켜 주십시오!’
목사가 여기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그를 교회에서 모범적인 교인으로 띠울 수 있다.
그리고 집회가 있을 때는, 간증자로 그를 초빙해서 함께 다닐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는 다행히 깨어있었다.
자기 스스로 마술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자기 목표가 대형교회와 출세와 성공의 소위 뜨는 교회가 아니고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목표로 둔 목사였다.
그 길이 소외되고 어려운 길이지만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으면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 속에 있었다.
그 깨어있는 목사 밑에서 계속해서 신앙의 교육을 받으면서
그 중역은 흐릿했던 자기 안목에서 점점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회장’이 보이지 않고,
'참된 삶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지 8~9개월 쯤 되면서 그의 기도가 바뀐다.
이제 '하나님, 회장을 시켜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회장을 시켜주시면 사원의 입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회장을 안 시켜 주셔도, 회장되는 것 못지않게 인생을 의미 있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 그의 삶에 상당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출세가 아니라, ‘현실을 의미 있게 사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실’은, 미래를 위한 도약의 발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과 깊은 사랑의 인격적 교제를 이루어 가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행복과 삶의 의미가 진정 어디에 있는지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마술에서 깨어난 것이다.
과거에 마술에 걸려있을 때는, 겉보기에 그의 믿음이 더 신실해 보일 수도 있었다.
믿음이 더 뜨겁고 적극적으로 보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속 깊이는 엄연하게 다르다.
◑마술신앙에서 깨어나시라
▲우상을 추구하는 신앙은... 자기 욕심과 생의 불안, 공포로부터 생긴다.
생이 불안과 공포를 느낄 때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의존할 대상을 찾는다.
그 의존할 대상이 '돈, 권력'이라고 단정될 때는, 그것이 생의 절대목적이 된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런데 돈, 권력 등이
인간의 죽음과 삶의 의미, 고통, 내면의 갈등, 적대감, 내면의 상처 등
진정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을 주지 못한다. ★★
그런데도 사람은 미혹을 받아서,
돈과 권력을 가지면, 그런 내면적 갈등과 불안에서 자유할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
오히려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없는 상태에서,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지게 되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계속 비리에 휩싸이며 더 많이 타락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정신적 차원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 해결해 주실 수 있다. 돈, 권력, 성공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적 신앙을 가지시라!
계속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인격적 교제 속에서
그 안에서 세상 것이 아닌, 새로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영원한 것으로 다시 바뀌어 질 때만
그 같은 마술신앙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깨어날 수 있다.
올바른 인격적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참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참 인생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해야 한다.
그 길이 인생의 고통을 해결하고, 참다운 행복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임을
성경은 가르쳐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이냐, 우상이냐를 놓고 싸우는
그런 투쟁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 일상의 삶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고 사로잡는 것들이 많다.
우리를 집착에 빠지게 하는 것들도 많다.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계속 풀려나오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참 진리가 아닌, 어떤 미신을 믿는 마술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가 아무리 평강, 안정, 휴식을 원하지만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불안과 공포는 계속 우리를 교란하고 있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 약을 먹기도 하고, 그것을 눌러서 억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공포 속에 계속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이런 우리를 구해주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 삶의 불안에서 벗어나
내 삶의 목표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지금 세상은 돈과 권력, 성공 혹은 쾌락이
인간의 깊은 내면적 불안을 없애 주든지,
아니면 잊게 해 주든지... 어쨌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미혹하고 있다.
그래서 불신자는 우상에게 절하며 그것들을 구하고,
신자는 하나님께 그것들을 달라고 조르고 있다.
인간의 내면적 불안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 속에서만 해소될 수 있는데,
마치 돈과 권력과 성공을 그 해결책으로 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샤머니즘이나 마술종교처럼,
돈과 권력을 주시는 신으로, 신자 스스로 '우상화'로 변질시키고 있다.
그것을 획득하면, 행복하게 보이고, 자기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시험 당하실 때, 사탄에게 넙죽 엎드려 절하지 않았을까...!
<인터넷 설교 정리, 편집. 07.05.20. *원제목 :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레2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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