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조연, 아론 출32:30~35
오늘 아침에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스크랩 했습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조금 다른 각도로 이해했습니다.”
주연도 잘 해야 하지만, 조연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연은 한 사람뿐이지만, 조연은 여러 사람입니다.
(만약 주연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가 훌륭한 조연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Here I stand!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86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always needs to be reformed)는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저 주실 뿐이지 은총을 팔지 않는다"고 외치면서
중세의 교권에 맞섰던 루터의 혼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1521년 4월 18일 보름스(Worms) 의회 앞에서
그의 입장을 철회하라는 교권의 명령을 받았을 때,
루터는 양심의 명령에 반하는 어떤 명령에도 복종할 수 없다며
기꺼이 파문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는 잠들어버린 우리 심령을 깨우는 우레 소리로 들립니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는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I can not do otherwise. God help me! Amen.
이 기도는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적인 야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종교, 잘못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종교는
타락한 종교입니다. 저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황금 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개혁의 요구 앞에 서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을 진단해보려 합니다.
◑실패한 조연 ★
아론은 황금 송아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말에 능치 못한 모세를 대신하여
바로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세를 도와 각종 이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산 위에 앉아 기도하는 모세의 두 팔을 든든히 받쳐주기도 했습니다(출17:10).
그는 모세라는 주연을 돕는 조연이었지만, ‘위대한 조연’이었습니다.
조연의 역할에 만족할 때 그는 위대했지만,
스스로 주연이 되려할 때 그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그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소명을 주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은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정황은 이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우레와 번개와 짙은 구름이 드리운 산,
뇌성이 울리는 거룩한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어쩌면 산벼랑 앞에서 서는 것보다
더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침식조차 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 아래의 형편은 달랐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도자 부재의 상황이 지속되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뭔가 안전보장의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구책을 강구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32:1
이때 백성들을 깨우치고, 용기를 북돋워야 할 아론조차 동요합니다.
백성들의 두려움에 전염이라도 된 것일까요?
그는 빌라도가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여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것처럼,
백성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성급하고, 열광적인 그 소리에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서 그렇게도 당당했던 그 사람이
아닌 듯 보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신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아 오라고 지시합니다.
사람들은 금붙이와 각종 장신구를 그에게 가져옵니다.
마치 구원의 길이 거기에 있다는 듯이 그들은 그 일에 열심입니다.
마침내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맙니다.
성경은 이 대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출32:4
이 말은 나중에 백성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마지못해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다는
아론의 궁색한 변명(32:24)과 대조가 됩니다.
마침내 송아지 형상이 만들어졌을 때 백성들은 스스로가 해낸 일에 도취했습니다.
그들은 그 형상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바야흐로 열광적인 축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저버리고,
자의적인 종교의 탄생을 경축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틀에 금붙이와 장신구를 부어 만든 종교,
바로 금송아지의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산 아래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을 보고는 분노했습니다.
마침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그들 가운데 섰을 때
백성들의 흥겨운 도취상태는 깨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뿌듯해 했던 황금송아지도 깨졌습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손을 붙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다 진멸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금송아지의 종교
우리는 광야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이스라엘 역사의 부끄러운 한 부분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아론의 종교에 깊이 물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의지하여 살기 보다는
하나님 대신 황금송아지를 중심에 놓고 춤을 추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금송아지의 종교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자기들의 뜻대로 뭔가를 부지런히 하는 종교입니다.
많은 종교들은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뭔가에 취해 있지 않으면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항상 뭔가를 만들고 사람들을 몰아 부칩니다.
그들은 고요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의 삶이 성화되고
거룩해지는 과정임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뭔가 내 영혼 속에 화끈한 것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쓰는 것처럼
뭔가 붕붕 띄워야만 믿음 생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민수기를 읽어보면,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지낼 때
구름기둥이 발행하면, 백성들이 따라서 천막을 걷고 발행하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백성들이 천막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동한 날보다는, 멈추고 지낸 날이 훨씬 더 많게 보입니다.
시내 산 같은 곳에서는 몇(2) 년간 그냥 머물러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보이는 것에 의지하려 합니다. (안목의 정욕)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금송아지의 종교는 보지 못하는 것들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 수와 재정 규모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크고 화려한 교회를 짓고 싶어 합니다.
돈을 모아서 부동산을 사는 것을 목회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문제나,
예수를 닮아가기 위한 경건의 연습은 소홀히 되고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우리의 책임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중략)
예수님은 우리에게 황금송아지 앞에 열광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나눔, 그리고 자기 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 신앙의 길, 희생의 길을 제시하시고, 친히 그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새로운 마틴 루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꿀 수 없어 "나는 달리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던 사람 말입니다.
금송아지의 종교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이제 우리가 바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3.10.26일자 설교. *원제목 : 아론의 종교를 넘어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1207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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