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구원의 역사는 동시에 일어난다 행9:4
심판과 구원은 정반대로 다른 것이지만,
역사에, 우리 개인의 삶에, 그 둘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면서 구원하십니다.
◑베어드의 역사관
유명한 세계적인 역사가인 찰스 베어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평생 역사를 연구 하면서
역사 연구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그는 간단하게 4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국가를 심판하실 때, 혹은 멸망시키려고 할 때는
권세욕에 날뛰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교만 하면 망해요.
교만해지기 시작하면 "아하! 끝났구나!" 그렇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 깨달은 거예요. 그걸 꼭 잊지 말아야 돼요.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이에요.
▲둘째, 하나님의 맷돌이라고 하는 것, 심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천천히 돌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돌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악과 선, 불의와 의를 아주 고르게 골라주시고,
세밀하게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외 없이. 절대 숨길 수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밀하게 역사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 벌이 꽃 속에 들어가서 꿀을 빨아내는데 마치 강도질하는 거와 같죠.
이 꽃, 저 꽃 다니면서 들어가서 꿀을 빨아내는 것,
허가도 받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꿀을 도적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묘한 진리가 됩니다.
이렇게 벌이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면서 꽃가루를 옮겨 놓는단 말입니다.
결국은 도적질하는 것 같으나, 벌은 꽃을 위해서 심부름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악도 있고 도적질도 있고 강도도 있다 말이에요.
수탈하는 일도 있고, 많은 침략도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더 귀한 일,
더 큰 일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전쟁과 재난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어요.
그것을 역사에서 보았노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넷째,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 별빛도 보이지 않고 아주 어두워지고 말 것 같지만
저 앞에 소망의 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다 망하는 것 같은데 망하지 않아요.
소망의 별이 나타나는 것을 역사에서 보았노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중국 선교도 1966년 문화혁명과 더불어 선교사 추방, 교회 폐쇄로
다 망하는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일을 통해 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 ‘심판’과 동시에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동시에 구원의 날이 가까워 왔습니다. 이전 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볼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심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심판과 함께 구원의 아침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섭리, 오묘한 일들이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5장에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말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끔직한 이야기는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진과 전쟁과 재난과 형제간에 미워하고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하는 엄청난 혼란과 무질서와 고통...
이런 것들을 예수님께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진리를 말씀합니다.
"이런 어려운 세대가 오겠다. 점점 더 어두워지겠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의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안정이 없다고, 우리에게 평안히 없다고,
왜 이렇게 늘 세상은 흔들리고 있느냐 하지만은...
아니요, 이 흔들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울의 심판과 구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은 사울을 꾸짖으시면서도 동시에 긍휼을 베푸시고, 사명까지 맡겨 주십니다.
▲1. 사울을 꾸짖으시는 주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때의 바울은 열렬한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리로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그저 그리스도인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잡아 가두고 죽이기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맹렬한 박해자였습니다. 행7:58
행9:4절에 보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는 그를 칭찬하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을 꾸짖는 소리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에 구원의 여명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2. 사울을 긍휼히 부르시는 주님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사울에 대한 주님의 긍휼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측은히 여기는 이유는 아마 몇 가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아직 신앙이 뭔지도 모르고, 영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도발 행위를 마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교회 박멸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사울이 불쌍한 인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둘째, 이렇게 극악무도한 자를 그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를 다메섹까지 추적하시며 불러주시니
사울에 대한 지극한 긍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셋째, 이처럼 당돌하고 잔학스러운 박해자를 단번에 파멸시켜버릴 수도 있지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울로 하여금 반성할 기회를 갖도록 관용을 베풀어 주셨으니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불쌍한 인생들 입니다.
잘못된 줄을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그냥가고 있다면 그도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시온의 산야의 풀들과 곡식들이 헐몬 산의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 것처럼
인간이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사마리아의 열 문둥이와
소경들처럼 주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만이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처럼
죄인이 변하여 의로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3. 새 사명을 맡기는 주님
행9:15-16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이 해야 할 새로운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행26:16-18절에도 그 설명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를 책망하시고, 죄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주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거기에 더하여, 주님의 귀한 심부름을 감당하는 사환을 삼아 주시려고 하십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26:16 servant and witness
<인터넷 설교 녹취
*구약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예언서를 읽어 보면,
심판이 선포되는 그 시간에 동시에 회복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은, 고쳐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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