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경고 빌3:17~21 출처보기
▲오늘 설교는, 전하기 부담스러운 말씀
오늘 여러분들이 제목을 보셔도 알고, 성경본문을 보셔도 알겠지만
내용이 좀 무겁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를 긴장시키는 내용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할 수 있으면 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성령께서 계속 강권적으로 저를 떠밀었습니다.
그래서 ‘아, 이건 주님의 명령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이 말씀을 들고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들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고난
▲그가 노스햄턴 교회에서 물러나신 이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의 인물입니다.
미국 건국의 정신적 기초가 된 청교도신학을 대변하는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또한 저술가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어났던 성령운동, 대각성 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린스턴 대학교 초창기의 총장을 지내셨던 분이고,
그리고 그가 졸업한 예일 대학에서는 그의 모든 설교와 저술을 총 집대성해서
30권이 넘는 전집을 출간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이만한 분량의 전집을 내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독보적입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의 노스햄턴 Northampton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23년 열심히 목회를 하고 난 다음 그의 40대 후반에
그 교회에서 갑자기 쫓겨났어요.
그렇게 위대한 인물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굉장히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인들이 진정 구원받았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다.
그를 교회에 더 모시고 일을 하도록 할 것이냐,
아니면 교회를 떠나게 할 것이냐는 신임투표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투표권이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230명의 세례교인이 모여서 투표를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지지하는 표는 23표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전부 다 ‘떠나십시오!’ 이렇게 투표를 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많은 교인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다는 의구심을 가졌어요.
‘저 사람의 믿음이 구원받을 만한 진짜 믿음일까..?’
그런 의심이 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는 거예요.
물론 그들은 신앙고백 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고 물으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정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합니다.
또 사회에서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 목사님이 볼 때,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동이 되는 거예요.
요즘 사스환자가 생기면 정확하게 사스에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를
알지 못할 때는 의심환자로 분류해서 격리시키지 않아요?
에드워즈 목사님도 자기 교인들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의심성도로 분류를 해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예수 믿으니까 틀림없이 구원받습니다!’
하고 교회가 확신을 시켜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는 판단했습니다.
잘못하면 그들의 영혼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신자를 가려내려는 노력이... 문제가 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는 드디어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찬을 한 달에 한 번 이상씩 자주 했습니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을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 목사님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강화시켜서
아무나 함부로 참석하지 못하도록 선을 그었어요.
신앙고백 잘 한다는 것 가지고는 안돼요.
속사람이 정말로 변화된 사람이냐?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가 얼마나 무섭고 저주받을 죄인인가를 통감하면서
회개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냐?
그리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 사실 때문에 무릎 꿇고 감격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냐?
이런 것을 따졌어요.
그런 내적인 변화와 체험이 있으면 성찬에 참여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참석 못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교인들이 반발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2~3년 갈등을 하고 씨름을 하다가 결국 그 교회에서 물러나고 말았어요.
영적 대각성 운동 당시, 청교도 신학을 따르는 교회들 중에서는
이 ‘구원’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회심의 체험 논란... 과연 필요한가?
▲너무 쉬워진 현대교회의 ‘구원 받음’
현대교회 같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자매님,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복음을 제시합니다. 전도폭발 나가서도 마찬가지죠?
짧고 간단하게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리고나서 ‘형제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원자 되심을 믿겠습니까?’
‘예, 믿어보죠.’
그러면 ‘저의 기도를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예, 따라하죠.’
그렇게 기도를 따라하고 ‘아멘’하고 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자, 축하합니다. 당신은 예수 믿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영원한 영생을 선물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쉽게) 하잖아요.
▲당시에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다.
그런데 에드워즈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구원을 쉽게 파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을 죄인이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슴 뜨겁게 절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구원 받았다는 말을 어떻게 쉽게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정말로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고 말씀도 읽으면서
내가 구원받기를 사모하고 씨름해야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열심히 다녀요. 설교를 열심히 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셔서
진리를 깨닫는 눈이 열리게 하시고,
그렇게 깨닫고 보니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이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 앞에 달려가서 주님을 붙들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해주옵소서.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체험적인 (회심의)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면서 씨름할 수 있다고 그들은 보았습니다.
◑회심의 철저한 강조... 극단적이긴 하지만...
▲동의 안 하는 면이 있다
물론 저는 (에드워즈 목사님의 방식에) 전적으로 공감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도 보면 ‘지나친 도식’이라고,
‘지나친 어떤 프로세스’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 보세요.
대각성전도집회에 나와서 30분 설교 듣고 나서 예수 믿겠다고 작정했는데,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두고 봐야죠,
그러나 그 집회에서 예수 믿기로 결신하고,
10~2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에 더 깊이 젖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한 두 명입니까?
그러니까 꼭 그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씨름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에
저는 동의 안 해요.
▲그러나 일면, 동의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말로 평생 동안 씨름해서
겨우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는 나오지만 솔직히 에드워즈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크고 괄목할만한 지속적인 변화가 그 내면에 일어나는 체험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 안하는데요.
그러나 제가 한 가지 공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너무 쉽게 이야기 하면
엉터리 신자가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구원’에 민감했던 에드워즈의 설교 소개
천편이 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가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설교의 제목이 이런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들!> http://blog.daum.net/rfcdrfcd/12056145
제목을 듣기만 해도 오싹한 제목이죠?
그가 이 설교를 할 때에는 자기 교회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 교회(엔필드, 코네티컷)에 강사로 초빙되어 가서 저녁에 설교를 했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교를 읽는 사람입니다.
원고를 읽는 데만 90분 이상이 걸려요. 일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것보다
더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더 진노하시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타고 있습니다.
지옥의 불길은 지금 무섭게 타오르며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들 위에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는 그들 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밤에 지옥으로 가지 아니한 것,
당신이 오늘 아침에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것,
당신이 아침에 일어난 후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앉은 후 그의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는데도 불구하고,
죄악 되고 사악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을 거두시면
떨어지는 바윗돌을 거미줄이 멈추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여러분은 즉시 굴러 떨어져 지옥의 밑 없는 구덩이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다
촛불을 켜놓고 90분 동안 이 설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성령의 강하신 역사가 일어났어요.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비명을 지르고 떼굴떼굴 구르고,,,
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 거예요.
내가 교회는 다녔지만 지금까지 엉터리다 엉터리, 엉터리로 믿었다,
그것이 가슴에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니까 견디지를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 까무러지는 사람, 거꾸러지는 사람,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 유명한 대각성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이런 설교를 어디서 들어보겠습니까?
또,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교회를 누가 가겠습니까?
진짜 오늘날 이런 설교가 필요한데 감히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도 없고요,
이런 설교를 듣고 싶어 하는 성도도 없고요,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바울은 에드워즈와 같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의 ‘구원’ 여부를 의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십자가의 원수’되는 요소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빌립보 교인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에 눈물을 흘리는 바울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3:18~19
▲눈물을 흘리며 권고하는 바울
바울은 너무 안타까워서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망한다고 경고하면서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어요.
듣지 않고 있으니까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솟았어요.
그래서 지금 이 편지도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해도, 읽기만 해도 가슴이 오싹해지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이 여기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회생활을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놓고 근심하고,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하느냐?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오지만 한 가지씩 자세히 살펴봅시다.
▲1. 저희의 신은 배요... (*배 : stomach, belly) 3:19
이 말씀을 거꾸로 하면 ‘저희의 배가 신이다, 하나님이다’, 감이 오지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앞세운 단 말이에요,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 자기를 더 위합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 자기에게 있어요.
그래서 자기의 뜻과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자기가 중심이에요.
특히 ‘자기 배’입니다. 떡이요, 오늘날로 치면 경제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믿는 사람은... ‘저희의 신은 배요’에 해당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믿는다면 이럴 수가 없죠.
고후5: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주님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의 인생목적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5:15
▲배를 신으로 섬기면.., ‘십자가의 원수’ 된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어요. 내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었어요.
정말로 ‘내 배가 내 신’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우리가 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요.
이제는 내가 삶의 중심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에요.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는 목적도 나 개인의 무엇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가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렇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만 ‘내 신은 배요!’로 살면,
바울이 말한 대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결국은 멸망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빌3:18↑
▲2.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3:19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되는 줄 알고 그것 가지고 으스대고 살지만
다시 말해서 이생의 자랑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그것이 다 자랑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것들’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사람들은 은근히 권력을 자랑합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자기가 조금 성공한 것을 가지고 목에 힘을 줍니다.
자식이 조금 요란하면 은근히 자랑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결국은 뭐냐?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이에요.
이것은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너무 어울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왜요?
야고보서 4:4절에 이런 세상적인 것과 벗된 사람,
이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좋아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어요.
▲여러분, 예수 믿으면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었는데요.
믿습니까? 여러분?
만약 성공했다고 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그러면 온 천하에 요란을 떨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해요.
내가 생각 밖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으면,
몇 십억, 몇 백억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주님 앞에 부들부들 떨어요.
주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줄 아시면서 왜 이렇게 재물을 주십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으면 제게 보여 주세요. 제가 바르게 쓰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남에게 칭찬을 많이 들어요.
자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커보니까 대단한 놈들이 되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자식을 가지고 요란을 떨고 자랑할거 없어요.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못 돌립니다.
지위도, 물질도, 인물도... 하나님께로 왔다고 겸손히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경이 권하는 자랑
내게는 우리 주 예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갈6:14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9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1:10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1:30
내가 자랑할 것은 다른데 있어요.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자랑해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값없이 주신
하늘의 놀라운 축복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자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의 것을 가지고 으스대고 자랑한다면,
그 사람을 놓고 ‘십자가의 원수’라고 바울이 꾸짖는 것입니다.
▲3.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19
세상에 살면서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요?
새벽부터 밤까지 직장에 가서 허덕이는데...
내내 자기 사업을 하다보면 온통 세상의 일들만 생각하는데...
그것을 두고 ‘십자가의 원수’의 행동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일을 생각하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세상에 살면 세상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떨 때는 골똘하게 연구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각의 기울기’ 입니다.
생각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
‘생각의 경향’, ‘생각의 습관’, 또 다른 말로 ‘생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이걸 지금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때 생각이 어느 쪽으로 잘 기우느냐?
어느 쪽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돌아가느냐?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침반 있잖아요? 나침반은 항상 북극성을 향합니다.
가만히 두면 자연히 그리로 향합니다. 이것이 나침반의 기능이요, 성향입니다.
예수 믿는 자의 사고의 성향은 어떻느냐?
가만히 있으면 위로 가게 되어 있어요. 할렐루야!
가만히 있으면 예수님 생각하게 되요. 믿습니까? 여러분!
가만히 두면 항상 거룩한 것을 좋아해요.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사고요,
생각입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인가?
그 생각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압니다.
그 사람의 생각의 중심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래서 헨리 스쿠갈은 의미 있는 말을 한 마디 했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성은,
그러니까 한 영혼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탁월하냐를 알아보려면
그 영혼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그 대상을 알아보면 된다’ 고 그랬어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요.
가만히 두면 자연히 하늘로 향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빌립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항상 땅의 것만 생각해요.
땅의 것을 생각하니 날마다 하는 소리가 땅의 소리만 하는 거예요.
오늘날에도, 교인인데 만나면 늘 ‘땅의 것’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동산이 어떻고, 주식이 어떻고...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이 우리 맘에 와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어요.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로마서 8:7절에 이야기 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을 가지고
평생 ‘예수 믿는다!’ 하면서, ‘주여, 주여!’ 하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우리의 생각을 바꿔주십니다. 바꿔주셔요!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
▲1. 천국시민권 소유자로 산다.
더욱이 우리가 땅에 것을 골똘하게 생각한다든지 몰두 할 수 없는 이유를
빌3:20~21절에 더 구체적으로 밝혀놓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0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의 천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왕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요.
시민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옛날 로마 당시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굉장했습니다.
식민지 국민이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거금을 주고 사든지,
아니면 21년 동안 목숨을 건 군복무를 해야 되요.
21년 동안 군복무를 해서 로마에 공헌해야만 얻는 시민권이에요.
얼마나 중요한지...
▲시민권대로 관심 가지게 된다.
제가 몸이 아프면 몇 달씩 외국에 가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 시민권이 한국이기 때문에 항상 관심은 한국이에요.
뉴스를 통해서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관심이 내 시민권이 있는 그 나라에 가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시민권이 어디 있느냐? 우리의 생각은 거기에 따라가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잠깐 있다가 잠깐 머물다가 떠나는 세상일에 몰두하고
거기에 생각이 푹 빠져서 살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시민권)밖에 없으니까,
여기에 생명 걸고 오늘 즐기다가 내일 죽자! 라는 식으로 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나라에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일에 머리를 쳐 박고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거기에 정신을 빼앗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할렐루야!
▲2. 자기 몸매에 너무 연련 안 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3:21
자꾸 늙어가는 내 몸이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될 그 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날 내 모습이 얼마나 멋질까요?
그러니까 늙어가는 내 몸을 보고도 절망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깐 입고 있다가 벗는 옷이에요.
요사이 사람들이 인물이나 몸매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할지,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성형, 몸매 가꾸기에 너무 과도한
관심이 없습니다. 진실로 예수 믿으면 땅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요.
도리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빌3:21
그 날을 늘 소망하며, 즉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그 날이 속히 오기를 항상 기다리며 삽니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인플레이션 현상입니다.
인플레가 뭔지 아시잖아요. 돈을 자꾸 많이 찍어내면
돈의 가치가 없어져서 인플레가 되잖아요.
교회서 구원을 너무 손쉽게 얘기하는 거예요.
‘당신 예수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러면 당신 구원 받았군요!’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말로 에드워즈 목사님처럼 입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그 내면에 진정한 변화가 있는 사람인가를 체크하지 않아요.
정말로 과거의 죄를 주님 앞에 다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정확하게 점검하지를 않아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그저 입으로 ‘예수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만 다니면
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인줄 알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억지로 구원의 확신까지 강요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은혜를 너무 쉽게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신앙이 좋고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
그 가운데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란 말이에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금 사랑의 교회에 와서 본다면 어떻게 볼까요?
바울이 지금, 이 교회에 와서 본다면 어떻게 볼까요?
예수님이 이 교회에 와서 우리 모두를 보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설교하는) 날보고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제가 정말 제대로 되먹은 목사라면 바울처럼 울 거예요.
이런 설교를 울면서 할 거예요.
여러분 중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것은 교회 안 다니는 불신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세상을 자랑하고 땅에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눈물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해 보라!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도, 교인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
쉽게 말하면 네가 진짜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인가
점검 한 번 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잘 믿는 사람에게도, 성경은 이렇게 가끔 경고를 합니다.
▲내 관심이 땅에 있는가, 하늘에 있는가?
여러분, 날마다 자기 입으로 “주여, 주여!” 하고
천국이야기하고, 영생이야기하고, “예수 믿으십시오!” 하는 사람이
겉으로 늘 생각이 땅의 것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천해지는 거예요.
(주님을 이용해서, 약간 전도 및 봉사하고, 땅의 것을 쉽게 얻으려는 마인드입니다)
입만 열면 늘 세상 것을 자랑한다... 정말 유치한거에요.
항상 자기만 생각한다... 정말 처절한 모습이에요.
그러므로 내가 가난하든 부하든, 내가 성공했든 실패했든
어떤 환경에 내가 처하든 간에 내 생각이 항상 위를 향하고
주님 중심으로 내 마음이 달려갈 때에는
그 모든 여건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아니하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며,
자기가 처한 형편을 이기고 극복해 나가는 능력을
내 자신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땅에 것을 자랑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는 말
십자가의 원수가 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멸망이요,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며,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왜 바울이, 일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했을까요?
그것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을까요?
오늘 내 귀에도, 이런 바울의 눈물의 권고가
내 두 귀를 울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04.02.01. 인터넷 설교 발췌 *원제목 : 눈물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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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에 관한 소견
여기서 ‘회심’이란, 자기의 죄의 더러움과 절망감을 뼈 속 절실히 깨닫고,
그래서 구세주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끼며,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얻게 된
구원의 감격을 즐거워하는 몇 날 몇 시의 분명한 어떤 체험을 뜻합니다.
회심의 체험이 있는 사람은, 회심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회심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회심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회심 체험이 없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께만 속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은, 그 구원의 여부가 거의 ‘확실하다’고 할까요?
가만히 보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의지’로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신앙생활 합니다.
요한 웨슬리가 18세기에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도 ‘회심의 강조’입니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도 ‘회심의 강조’입니다.
1907년 한국의 평양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도 ‘회심’에 있다고 봅니다.
에드워즈 목사님 같은 분은 ‘회심’에 초점을 둔 목회를 하셨습니다.
이런 방향은, 항상 (대부분 회심 못한) 교인들과 거세게 부딪히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혹자는 ‘회심’ 대신에 ‘복음을 깨닫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그냥 머리로 믿는 신앙이 아닌,
‘두 번째 은총’(2nd blessing, 웨슬리의 표현)을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유럽은, 기독교문화권이어서, 태어나면서부터 유아세례를 받으면서
모태교인으로서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됩니다. (1st blessing?)
그런 ‘나면서부터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회심’(2nd blessing)이 절실했던 것 같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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