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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4 영적 성숙을 위해.. 떠나라!

LNCK 2007. 7. 6. 22:35
 

◈영적 성숙을 위해.. 떠나라!



▲‘떠나라’는 음성에 민감하라.

우리는 인생 여정 가운데 끊임없이 ‘정착과 떠남’을 반복한다.

어차피 성경적 인생관은 ‘나그네 여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떠나라’고 명하시는데...


그것은 보다 성숙을 위한 또 다른 세계로 떠남이기에,

‘떠남’이란 인생사에 매우 소중한 과정이다.


아브라함은 ‘떠남’을 매우 적절하게 구사했던 전형적인 인물이다.

물론 그의 모든 ‘떠남’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의 ‘떠남’은, 성숙을 위한 도약적 떠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는 방향이 올바로 정해진 여행(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떠났고,

*도중에 때로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지만,

*다시 방향을 바로잡아 새롭게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 떠남 자체가 복이 된다.


“너는 복이 될지니라!” you will be a blessing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창12:2)


이것은 아브라함이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얻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떠나는 삶 그 자체가 네게 복이 된다!’ - 그런 뜻이다. (다른 주장도 있겠음)


그의 후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살았다.

아브라함의 삶을 모델로 삼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지난 역사에 수없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떠나야 할 때 적극적으로 떠나는 사람은... 떠남 자체가 복이 될 것이고,

그 순리를 거부하고 역행하는 사람은... 화를 받을 것이다.


떠나라 하실 때,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다가

큰 화를 자초하고,

놓아야 될 때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다가,

그것이 변하며, 근심과 수치가 됨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본다.


▲2. 앞길이 불투명하더라도... 떠나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떠나라’는 지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너무나 큰 모험이요,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엄청나게 번민했을 것이다.


우리도 종종 ‘떠나라’는 내면적인 요청을 받고 산다.

그러나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편안함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투명 때문에...

두려워하며, 떠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부르시는 방식이 보통 이렇다.

여러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제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항상 불투명한 미래 속으로 떠나야만 했다.


내면적으로는 ‘떠나라’는 음성을 듣지만, 황당한 것은,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속인데, ‘떠나라’고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날 때는

분명한 미래의 확실한 가능성이 보일 때만... 움직인다.

그것이 안 보이면... 무모하게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르다.

확실하지도 못한 미래를 향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과감히 ‘떠나라!’고 자꾸 권고하신다.


떠나다 보면, 여정의 길을 가다보면... 차츰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고, 평생 그런 모험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어떤 모형(모델)이다.


▲3. 편안히 안주하는 자리에서... 떠나라!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심리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현재가 매우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안전하고 편안하긴 하지만... 매우 답답하다.

이대로는 계속 살아갈 수 없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떠나야할 ‘고향’이 어디 인가?


여기서 ‘고향’이란,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영적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세계다.


물질이 풍부하고, 기득권도 있으며, 약간의 성취도 이루었으며,

무사안일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내가 떠나야 할 ‘고향’이다.


아브라함이 만약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남은 평생 편안하게 지냈을는지 모르지만...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 결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 자체가 나그네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시라!

어디라도 이 세상에는 항구적으로 정착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라!

어차피 안 떠나든지, 못 떠나든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은 다 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떠날 때 떠난다!’


▲4. 기득권을 포기하고 떠나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가축을 한 떼 이끌고 나왔다.

그것은 그가 고향에서 어떤 가문의 종손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카 롯까지 데리고 나온 것을 보면, 고향에서 상당한 기득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떠난다’는 것은

그런 기득권으로부터 떠남이요,

이제 앞으로는 ‘주변 인물’이 됨(전락)을 뜻한다.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 타향에서는,

이제 그는 더 이상 장남도, 상속자도 아니었다.


씨족사회의 집안에서 받는 모든 지도권과 발언권,

이에 뒤따르는 존경심과 지위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었다.


과거에 한국에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하고 쫓겨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떠남’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중동, 인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예수를 믿으면, 집안에서 완전히 쫓아내 버리고,

여자인 경우, 독살시키든지 해서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떠나라’는 지시가 있을 때,

많은 중동과 인도의 크리스천들이

아브라함처럼 그 명령에 순종했다.

모든 기득권을 다 버리고 말이다.


그러므로 떠나실 때는

기득권을 모두 다 버리시고 떠나라!

그것을 움켜쥐고는... 절대로 떠날 수 없다.

 

▲5. 성숙을 위해 떠나라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제단에 불을 내리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처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내치신다.

그 칭송받는 자리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그 후 엘리야가, 스스로 죽기를 갈구하는 비참한 자리로까지, 그를 몰아치셨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는,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그 놀라운 갈멜산 사역의 현장에서 ‘떠나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숙으로의 부르심이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당신에게로 ‘더 깊이 들어오라’고 몰아치셨고,

사역의 승리의 자리에서 ‘떠나라’고 강권하셨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은

그 평안한 기득권의 환경 속에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거나 체험함을 통해, 성숙할 수 없었기에

광야 메마른 곳으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성숙을 위한 떠남’이었던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은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믿음이 성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런 ‘상실’이 어쩌면 필수적이었다.

그런 ‘상실’이 없으면... ‘성숙’이 안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자식에 대한 본능적 집착’까지 ‘떠나라’고 요구받는다.

보다 온전하고 친밀한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에

아무 것도 끼어들지 않기를... 점점 수위를 높이며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다 높은 단계의 ‘떠나라’를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온전한 일치’를 원하셨던 것이다.


▲6. 좌표를 수정하며 떠나라

한 번 ‘떠났다’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꾸 진로를 수정해서 계속 떠나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떠나는 길을 가다 보면.. 길이 끊어질 수도 있다.

그 때는 진로(좌표)를 수정하면서.. 다시 떠나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번 ‘떠나라’고 명하시고,

그래서 그가 순종해서 가나안에 정착하자

그것으로 모두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해서 가나안까지 왔지만,

이제 임무를 다 끝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이제 그 땅에 기근을 주셨다.

순종해서 평탄하게 잘 가던 길이.. 순식간에 끊어진 것과 같았다.


아브라함은 또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 방식이다.


▲세례요한의 좌표 수정

세례요한도 그가 본래 제사장 가문에 태어났다.

가만히 조용히 제사장으로 살다가 가면 그만인데

그는 강력하게 ‘떠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 나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다.

그러면 거기서 자기 임무를 다 끝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잘 가던 길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옥에 갇히고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까지 ‘떠나라’고 해서, 순종해서 그 길을 잘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길은 끊겨지고, 순식간에 세례요한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다시 자기 방향을 새롭게 잡게 된다. ‘새로운 떠남’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기꺼이 순교했다.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셨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우주선의 좌표 수정

누가 그러는데, 세상에서 제일 조용한 곳은, ‘우주’라고 한다.

인공위성과 우주선이 궤도를 돌고 있는 그 곳,

하기야 아무도 살지 않으니, 조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거기에도 소음이 있는데,

우주선의 발전기에서 나는 “통통통” 소리라고 한다.


우주선이나 인공위성이 궤도를 따라 돌지만,

발전기를 돌려서 동력을 공급해서

끊임없이 우주선의 진로를 약간씩 수정해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궤도를 벗어나서 떨어져 나가는 ‘우주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목표를 향해 ‘큰 궤도’를 그리며 나아가지만,

그것은 끊임없는 ‘작은 수정’을 요구한다.

그렇게 ‘작게 수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보면, 궤도에서 멀리 이탈하고 마는 것이다.


▲7. 끊임없이 떠나고 평생 떠나라

사실 우리 영적 여정은, 결과가 있는 것 같고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다.

잡힐 듯 하다가도 잡히지 않고,

보일 듯 하다가도 보이지 않고,

끊임없는 전진해서 가야만 하는 것이 ‘영적 여정의 속성’이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봐도

끊임없이 나아갔다.

가나안에 도착한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히11:8에,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했다.

텐트를 쳤다가, 접었다가 하면서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이런 영적 여정의 속성을 깨달은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그는 어떤 끝을 바라고, 그 여정을 계속해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끝은 없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4~15


우리 영적 여정도 끊임없이 떠남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저 멀리 목표가 있어서 빨리 가서 잡아보니

벌써 그 목표는 저 멀리 달려가(도망가) 있었다.

그래서 또 사력을 다해 그 목표에 도착해 보면,

하나님은 또 새로운 차원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다.


우리 개인적 신앙 성숙이란 그와 같은 것이다.

아무도 자기가 이제는 ‘웬만큼 성숙했다. 도달했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은 더 새로운 목표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갱신upgrade시켜 주신다.


등산을 하다보면,

바로 저기가 정상인 것 같은데, 거기에 올라가면... 또 다른 높은 정상이 보인다.

그래서 힘들여 그 곳에 올라가면... 또 다른 정상이 보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영적 여정은 끝이 없다.

중간에 ‘다 이루었다. 이제 끝냈다!’ 하며 자고하지 마시라.


영적 여정은 끊임없이 ‘새로운 떠남’을 요구한다.

한걸음씩 발을 내디뎌서 한 봉우리에 다다르면,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을 명령받는다.


아무쪼록 안주하지 마시고,

떠날 때 잘 떠나서,

아브라함처럼, 엘리야처럼, 세례요한처럼, 사도바울처럼

신앙이 더욱 깊이 성숙해지고,

귀한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행 길’이 되시기를 축원드린다.

 

떠남 자체가 복이 된다!

떠나지 않고 안주하면, 성숙이 없다는 것이다!   <유해룡 목사님 설교 발췌, 정리

 

...........................................

 

살다보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가진 것에서 떠나고 싶고,

있는 곳에서 떠나고 싶고,

하던 일에서 떠나고 싶고,


그렇게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쉽게 떠나지 못할 뿐 아니라

떠났어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려 놓고 놔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떠나는 것은.. 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전날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떠나고

예수께서는 그런 유다를 떠나도록 내 버려두신다.


큰소리치던 베드로도 그렇게 스승을 떠나고

예수께서는 그를 떠나도록 놔주신다.


누가복음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도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낸다.


떠나보낼 줄 아는 자만이 떠날 수 있다.

그에겐 떠남과 떠나보냄이 하나로 만나고 있다.


유다와 베드로 그리고 작은아들은

떠났어도 자유롭지 못하다.

떠나보내는 마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떠났지만 자유롭지 못한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떠나는 작은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모든 것을 떠나 있기에 한결같다.


작은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가 나를 떠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난 너를 떠나지 못한다.”

오직 떠나보낼 뿐이다.


그러기에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질책 대신 큰 잔치를 베푼다.

돌아온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신다.


자유로운 자만이 베풀 수 있는 잔치!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온 작은아들,

주님의 십자가로 돌아온 베드로는

떠나보내는 아버지(스승)의 마음을 느끼면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모든 것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떠나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민 <말은 시들지 않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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