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아래 있는 이방인 눅4:25~30
▲이방인 사렙다 과부의 믿음 눅4:26
하나님의 종 엘리야 선지자는 시돈에 보내졌다. 눅4:26
시돈은 걸어가기에 매우 먼 거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바알 우상숭배종교의 뿌리가 있는, 이방나라였다.
엘리야 선지자를 그 멀리 이방나라 땅에 보내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내시고,
그것도 가장 불쌍하고 미천한 과부에게로 보내셨다.
왜 하나님은 그 멀리, 그런 비천한 여자에게로
‘하나님의 위대한 종 엘리야’를 보내셨는가?
왜 예수님은, 그 옛날 사건을 지금 나사렛에서 들추어내어 언급하시는가?
그것은 엘리야 당시에,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 중에
경건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 중에,
어쩌면 하찮은 이방 여인보다
더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 없지 아니냐고 반문하신다.
아니, 그 유대인들을 책망하신다.
보라, 그 과부 여인의 믿음을!
그에게는 딱 한 끼 분 식량만 남아 있었다. 그런 비참한 처지였다.
그 멸시받는 이방 여인이,
하나님의 종이 왔을 때, 그 남아 있는 식량을 자기가 먹지 아니하고,
엘리야를 대접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 당시 이스라엘 가운데, 그만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느냐?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먼 시돈에 까지 엘리야를 보내지 않았느냐?
어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처하는 너희 조상은,
그 이방 여인 하나 만도 못하냐!...
지금 너희도 그들의 후손으로서, 똑같지 않느냐?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질책하셨다.
▲이방인 나아만의 믿음 눅4:27
예수님은 계속 질책을 이어가신다.
엘리사 선지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유대의 수많은 문둥병자들은 한 명도 고침 받지 못했다.
오직 이방인 수리아의 나아만 한 사람만 와서 고침을 받았다.
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 사람도 고침 받지 못하고,
수리아 사람 이방인 나아만만 고침을 받았느냐?
너희 중에는, 그 당시에는 그 이방인 나아만 만한 믿음의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런데 지금, 엘리야보다 더 큰 메시야가 너희 눈앞에 있는데도,
너희는 옛날 너희 조상들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종을 배척하는구나!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 이상 모욕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고, 예수님을 떠밀고 갔다. 눅4:29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은 헬라인이다.
그녀의 고향인 수로보니게는, 이방의 수리아 땅 베니게(수로+보니게)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을 여행하실 때, 그는 예수님께 매달렸다.
그는, 마치 자기를 개처럼 무시하시는 예수님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애원하였다.
마침내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며,
그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마15:28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렸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이 낫겠나이다.”
“나는 이스라엘 가운데,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도다!”
하시며, 그 이방인을 크게 칭찬하셨다.
그 이방인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처하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이방인 사마리아인의 믿음
여리고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 강도 만난 사람이 신음하는데,
레위인, 제사장 등 유대인들은, 모두 다 그를 못 본 척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한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구해주지 않았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며
유대인들의 '행함 없는 믿음'을 질타하시며,
차라리 이방인의 '행하는 믿음'을 칭찬하셨다.
▲세리와 창기의 믿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1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스스로 자고하는 너희 유대인들아!
너희의 믿음이
너희가 멸시하는 저들 세리와 창기보다 더 못 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그렇게 심하게 선한?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다.
세리와 창기들은 비록 이방인은 아니었지만,
이방인처럼 사회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위험스런 급진적인 설교를 하셨는가?
아무리 유대인들이, 종교지도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하여도,
어떻게 멸시받는 세리나 창녀보다도 더 못하겠는가?
어떻게 천대받는 이방인들의 믿음보다도 더 못하겠는가?
과장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학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주의를 엄하게 배격하신다.
그것은, ‘스스로 믿음 좋다고 자고하며, 남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태도’이다.
자기가 아주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스스로 ‘종교적 우월주의, 특권주의’를 만들어 간다.
예수님은 그런 자만심, 영적 교만을 가장 싫어하신다.
실제로,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의 제자 역할을 많이 수행했다.
우리pen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 내게 있느니라 요10:1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과거에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 천황이 맥아더 장군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그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이유는,
“당신은 신이요, 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이 없소!”
그래서 그 때 천황의 이런 공식 발표가 있었다고 한다.
“여러분, 나는 신이 아니요, 인간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어떤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이 우리보다 더 칭찬 하실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고,
항상 그들을 나쁘게 말하며,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관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친구가 되셨다. 눅7:34
근래에 미국에서, 한 급우가 암에 걸려 치료를 받느라 삭발을 하면,
그 반 학생들 전체가 삭발을 하고 등교하는 것이 문화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그들은, 고통 받는 급우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방인의 친구'로서 사는가?
아니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처럼, '이방인들을 멸시'하며 사는가?
자기 믿음이 이방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살지는 않는가?
오늘 혹시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더 칭찬하시지는 않는가!
<07.07.01.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원제목 : 은혜 아래 있는 이방인
[주제별 분류] 삶의 통찰력 http://blog.daum.net/bible3/12192292
'분류 없음 > 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779 예레미야에게 주신 표징 (0) | 2007.07.10 |
---|---|
에스겔 20장 주석 (0) | 2007.07.09 |
775 전도자를 대접하라 (0) | 2007.07.07 |
774 영적 성숙을 위해.. 떠나라! (0) | 2007.07.06 |
773 마음에 낀 체지방 관리 (0) | 2007.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