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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787 외적 정결과 내적 정결의 대립

LNCK 2007. 7. 14. 15:59
 

◈외적 정결과 내적 정결의 대립             막7:1~23              *출처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가... 조직만 남는다!

엔트로피 법칙은(열역학 제2법칙 - 어떤 에너지가 운동을 하거나

형태가 변하는 과정을 겪게 되면 반드시 다시는 쓸 수 없는 에너지가 생긴다.

그러므로 자연은 질서의 상태에서 점차 무질서의 상태로 진행된다는 물리 이론)

물질과 에너지뿐 아니라,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도 나타나는

삶의 법칙이기도 하다.


무엇이든(사상이든, 정치든, 종교든, 사회변혁이든) 처음에는 으로 시작한다.

뜻 없이 시작하는 일은 세상에 없다.

뜻이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모이면 운동(Movement)이 일어나며,

운동이 활성화되다보면 몸집이 커지고 조직화된다.

그러면서 점차 뜻은 희미해지고

조직만 남아 화석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나라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여호와 신앙 역시 물리적인 엔트로피 법칙과 무관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을 보라.

겉으로 보면 하나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종교적 전통과 형식만 무성했지, 하나님 뜻에 충실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하나님 신앙은 회칠한 무덤처럼 딱딱하게 굳은 화석과 같았다.

이것이 영적 엔트로피가 아니고 무엇인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날카로운 예수님


예수님은 갈릴리바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사역하실 뿐

아직 예루살렘에 올라가진 않았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 온 것을 보면,

예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예루살렘의 심장부까지 올라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조사단’이 파견되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뭔지 모를 호기심과 두려움 같은 게 느껴졌을 것이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행적을 관찰하고

조사를 해봐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막7:1


사실, 그들은 이미 소문을 통해 예수님 일행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만한 율법학자를 직접 보내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눈으로 문제점을 발견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판단은 헛되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이 문제는 아주 사소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막7:2


왜냐하면 유대교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문제였으니까.

유대인은 언제나 손을 씻고서야 빵을 먹었고,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는 규례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이 규례를 엄격하게 지켜야 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 중에 그 규례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 있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막7:5


그러자 예수님도 기다렸다는 듯이

“너희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해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위선자로구나.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며 차갑게 대꾸하셨다. 막7:6~8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의 대꾸가 좀 지나친 듯하다.

율법학자가 지적한 것은 그리 도가 지나친 것도 아니고

사실에 어긋난 것도 아닌데 비해,

예수님의 대꾸는 좀 과장되고 지나치게 공격적인 것 같아 보인다.


이 일만이 아니다.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종교지도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병든 자, 소외된 자, 약한 자, 일반 백성,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너무 다르시다.


종교지도자들을 대할 때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날을 세우신다.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다. 평상심을 잃고 흥분한 것 같아 보일 때도 있다.

예수님의 고유한 사랑을 발견할 수가 없다.

마치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귀신을 대하는 것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날카로우셨던 이유

왜 그럴까? 왜 종교지도자들을 대할 때면 그렇게도 심하게 날을 세우실까?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은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보라.

그들이 비록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 대단했고, 율법을 엄격히 지켰고,

정결의식을 충실히 따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저들에게는 또 다른 면이 있었다.


*저들은 하나님 말씀을 독점한 채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쳤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으며,

*하나님 말씀으로 종교를 앞세워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백성들을 강탈해왔다.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예수님은 저들의 이런 이면을 속속들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쏘아붙였던 것이다.


▲종교적 지배체제 고수 - 꿰뚫어보시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걸 꿰뚫어 볼만큼 진리에 눈을 뜨지 못했다.

지금까지 소경의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오직 예수님만이 이 왜곡된 진실을 보았다.

종교적 경건과 전통 속에 숨어있는 왜곡과 거짓을 보았다.

저들이 내세우는 면뿐만 아니라 저들이 숨기고 있는 면까지도 볼 수 있었다.


지금 저들이 예수님께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도

겉으로 보면 단순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문제 제기 속에 숨어있는 더 큰 문제를 보았다.


전통을 지키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종교적 지배체제를 고수하려는

악한 의지를 읽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부드럽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숨은 의도를 폭로하고, 사악한 정체를 보게 해야 했다.

그들의 종교와 예수의 복음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깨우쳐 알게 해야 했다. 



◑전통과 말씀의 대립


고르반의 외식 지적

예수님은 이 문제를 좀더 뚜렷이 하기 위해 한 예를 드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질적인 문제, 곧 고르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모세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했거늘,

너희는 누구든지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고르반)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며 부모님께 할 도리를 외면하게 하고 있으니

너희야말로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자들이다”며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막7:9~13

 

내적 정결 지적

예수님은 막힌 봇물이라도 터진 듯 또다시 말씀하신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한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사람이 더러운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정말 더럽게 만드는 것은 다 마음에서 나온다.

 

곧 음행·살인·간음·탐욕·악의·시기·방탕·모독·교만·어리석음 등 이런 것들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지 않느냐?

그러니 외적인 정결에 신경 곤두세우지 말라.

너희가 정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것은 내적인 정결이다.” 막7:18~23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인가? 정말 정결하기를 원한다면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외적 정결에 주목하고 문제 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외적 정결보다는 내적 정결이 중요하고,

내적 정결을 추구해야 삶 전체가 정결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왜 내적 정결은 외면하고, 외적 정결을 중시했을까?

하나님 말씀을 어기게 하면서까지 외적 정결을 중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이유는 간단하다. 외적 정결을 중시해야 사람을 통제하기가 쉽고,

사람을 통제하기 쉬워야 종교적 질서를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들의 관심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여

종교적 지배질서를 잘 유지하는데 있었지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데 있지 않았다.


저들의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있었지

백성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는데 있지 않았다.


저들의 이런 속마음과 진실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저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의 거짓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리의 매서움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매섭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적당한 타협이라는 게 없다.

누나 좋고 매부 좋은 게 없다. 진리는 오직 진리일 뿐이다.


그 무엇으로도 진리를 대체할 수 없고, 진리를 가장할 수 없다.

진리를 가장한 것이 비록 사람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고 진리인 냥 보여도,

그래서 사람은 속을지 몰라도 말씀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은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을 보고 싶다면 진리에 눈을 뜨라.

진리를 통해 보아야만 거짓이 보인다.

세상이 어떠함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나라에 눈을 뜨라.

눈앞의 현실은 하나님나라를 통해 보아야 그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상의 눈으로는 눈앞의 현실을,

그 현실의 거짓됨과 뒤틀린 실상을 정직하게 볼 수 없다.

하나님나라를 통해 보아야만 세상의 진면목이 보인다.

하나님을 통해 보아야만 내가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


또, 진리가 사람을 자유케 한다(요 8:32).

진리가 모든 거짓과 우상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능력이다.

진리가 사람의 관습과 전통, 종교적 경건과 억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무섭고도 아름다우며, 매섭고도 부드럽다.



◑진리와 엔트로피의 법칙


정말 진리에 눈뜬 사람은 어떤 사람일가?

사소해보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붙잡고 씨름할 줄 아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붙잡고 투쟁할 줄 아는 사람,

문제의 표피가 아니라 문제의 심층을 보고 그걸 건드릴 줄 아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진리에 눈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처럼.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진리에 눈을 떴다 할지라도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세상의 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교회도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인지라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다.

세월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희미해져가고,

교회라는 조직과 형식만이 화석처럼 굳어져가는 걸 피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엔트로피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현실이다.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대해 환상을 갖게 되든지,

아니면 교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반교회적인 행동을 하게 되든지 둘 중 하나에 빠지게 된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해 아래 있는 것들은 다 엔트로피법칙 하에 있을 뿐.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 자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하나님만이 영원히 새롭다. 하여, 하나님만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진리에 눈뜬 사람,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사람으로는 안 된다.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는 교회가 엔트로피를 넘어서게 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심하게 비판을 받은 것은

저들이 특별히 더 악하거나 부패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저들의 모습이 있고, 동일한 속성과 한계가 있다.

오늘의 교회라고 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도 그때의 율법학자나 제사장의 모습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 체 거짓에 속고 있는

그때의 우매한 백성들의 모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백성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매순간 깨어서 정직하게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외적 형식과 익숙한 전통에 스스로 속지 않도록

냉철한 진리 인식과 정직한 자기 인식을 해야 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더불어.   정병선, <욥기 묵상>·<어느 목회자의 고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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