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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신앙고백 : 신령과 진정의 예배

LNCK 2007. 1. 31. 11:12

◈공동체적 신앙고백 : 신령과 진정의 예배      대하16:9


이렇게 복음을 믿고 새 생명 얻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른다.


이렇게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

나를 구원하신 그 분 앞에 나아와 예배를 통해 그 분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예배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 대상이신 그 분이 누구인가?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4)


여기서도 “아버지”라고 하지 않는가.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아버지는 - 나를 찾으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니라 (눅 19:10)


우리는 예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온 것처럼 여긴다.

아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계속 찾고 계셨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이와 같이 주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우리를 찾으신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하교 길에 수천 명이 몰려나온다.

그런데 내 눈에는 천명의 아이들 얼굴을 합한 것 보다

못난 내 자식 얼굴이 더 크게 보인다.(찾으신다)


유산은 보통 부친이 죽은 후에 받지만,

탕자는 살아계신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을 챙겨 집을 나갔다.

그 돈 때문에 도리어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그가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 거지를 쉽게 알아보지 못 했다.


그런데 성경은 “상거가 먼데...” 아직 아들이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노안이었지만, 먼데를 보고 저 거지가 자기 아들인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체면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그리고 덥석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찾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내 모습이 아무리 추해도

내가 아무리 실패해도


그래서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은 나를 찾으신다.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이 있으면... 기뻐하실 수 없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와야... 비로소 기쁨을 회복하실 것이다.


인생이 메마르고 황량하다고 실망하지 말고

아버지의 찾으시는 사랑스런 눈동자 앞에 마주 서시라.

이것이 예배이다.


▲아버지는 - 나를 기뻐하신다.

스바냐는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찬양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 3:17)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외면해도

아버지 하나님은 당신을 인하여 기뻐하신다.


그 분은 당신 옆에 있기만 해도 잠잠히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

여러분이 예배에 나오시면, 그처럼 기뻐하시는 아버지인줄 아시는가?

여러분의 날마다 예배가 이처럼 하나님께 의미 있는 예배인줄 아시는가?



▲그 아버지는 - 또한 이시다 - 신령으로 예배해야.

완전한 자유자이신 그 분은 이곳에 계시지만 또한 다른 곳에도 계신다.

중국 오지의 예배를 받으시고,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도 받으시고

모슬렘 지역에서 숨을 죽이며 숨쉬듯 찬양하는 그 찬양도 받으신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이이기 때문이다.

북한 동포들, 어떤 모습으로 예배드리든지, 그 예배도 기쁘시게 받으신다.


하나님은 이시므로, 그 앞에 나가는 자들은 신령으로 나가야 한다.

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거저 육적 몸만 참석하면 안 되고

나의 온 영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형식이나 프로그램이 필요하지만, 본질은 영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 진정으로(온 맘을 다해) 나아가야 한다.

어떤 성경은 이것을 진리로 in truth(진실로)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길 되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그냥 기도하지 않는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리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기도도 예배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 분의 사랑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도 우리를 끊지 못 한다.


무디가 한 번은 스코틀랜드로 휴가차 쉬러 갔는데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무디를 알아보고 설교를 요청했다.

무디는 할 수 없이 승낙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 다음날도 졸라대서 집회가 연이어졌다.

온 마을은 기뻐 큰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무디는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도 없이 이런 부흥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기는 그냥 쉬러 왔기 때문에 아무 기도의 준비도 없이 여기 왔는데... 

어떻게 이런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러자 그 교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교회 전신마비 한 성도님이 계신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서 누워 생활한지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미국에 무디라는 분이 집회를 잘 인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비록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이지만, 하나님께서 무디를 꼭 보내주시도록

10년 전부터 기도해 왔습니다!”


무디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그 기도하는 성도님을 방문해 보았다.

병실은 이상한 소망의 기운과 향기로 꽉 차 있어서 무디는 깜짝 놀랐다.


무디는 말했다.

“형제여, 주님은 이 병상에서도 이처럼 영광을 받으시네요!”

“주님은 항상 은혜이시죠!” 형제가 말했다. 

“은혜가 많은 곳에 죄도 많고, 사탄도 유혹을 많이 하는데

형제님에게는 사탄의 공격이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사탄이 자주 공격해 옵니다!”

“사탄이 형제님을 어떻게 공격합니까?”

“여보게, 만약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너를 17년이나

전신불수로 병상에 누워있게 만드냐? 하나님은 안 계신거야!”

“사탄아 물러가라. 너 같은 것과 말하지 않겠다!”


“좋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치자.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너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셔!

너 보다 더 나쁜 사람들도 병원에서 나아서 건강을 되찾는데

왜 너는 계속 아픈거니? 그러니까 하나님은 너를 안 쳐다 보신다구!”


“마귀야, 네 말이 그럴듯해!

나도 어떨 때는 네 말대로 마음이 흔들려!

그렇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여러분,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이런 사랑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C. S.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춤을 출 때, 마음속으로 스텝을 세어가면서 추면, 그것은 아직 춤 아니다.

연습 단계일 뿐이다. 진짜 춤은 자기도 모르게 스텝이 돌아가는 것이다.


음악 박자를 속으로 세어가면서 연주하는 사람은 연습단계이지

아직 음악 연주 단계는 아닌 것이다.


책을 읽어도 표지 디자인이나 보고, 페이지 뒤적거리는 것은 독서 아니다.

책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때, 비로소 독서가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 분께 몰입하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우리 안에 계신다.

내 모든 영이, 내 모든 진심이 그 분만 바라본다.

영이신 나의 아버지 앞에, 나도 온 마음(영)을 다해서 그 분 앞에 선다.

거기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몰입하고, 빠져든다.


▲마치는 말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한

사탄의 권세는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갈 것이다.

내 모든 외로움은 봄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나를 위해 죽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 계신데

어두컴컴한 동굴에 숨어서,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태양은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나를 찾으시는 사랑의 눈동자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

나로 인한 그분의 말할 수없는 즐거움에 내 즐거움이 동참하기를 축원한다.


< 06.01.22. 설교 녹취  *원제목 : 신령과 진정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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