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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가 성도를 더 두려워한다

LNCK 2007. 8. 14. 15:46

◈마귀가 성도를 더 두려워한다                  민21:1                2007.08.05. 

 

성도는 마귀를 매우 두려워하지만,

반대로 마귀는 성도를 더 두려워한다...

 

 

▲마귀는 성도의 갈 길을 막는다.

출애굽 여정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길을 막는 네게브에 ‘아랏’ 족속이 있었다.

‘아랏’의 뜻은 - ‘야생 당나귀’ 또는 ‘도망하는 자’란 뜻이다.

영적으로 보면, 이렇게 ‘길을 막는 존재’인 마귀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역사한다.

 

두려움의 표현은 급습이었다.

‘아랏 왕’은 굉장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겁쟁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떨고 있는 존재 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는 백성’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인 마귀도 ‘아랏’과 비슷하다.

그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급습한다.  민21:1

 

하나님의 백성이 움직이면, 마귀는 벌써 겁을 먹고 있다. 마냥 두려워 떤다.

그들은 으르릉 거리지만, 사실 그들은 대단히 겁을 먹고 있기에 으르릉 거린다.

성도를 공격하지만, 사실 그 공격은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아래 신문기사 참조)

 

▲개가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

사람들이 걷다보면, 사나운 개가 나타나서 으르릉 거리다가 짖기 시작한다.

보통 개들이 짖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짖는 개를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개가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마구 짖어대는 것이다.

그래서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영적 전투에서 대적 마귀는, 우리 성도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은 성도 앞에 두려워 떨기 때문에 - 우는 사자처럼 마구 울부짖는 것이다.

 

▲대단히 불리해질 것을 알므로 - 공격해 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불리한지

아랏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자기들에게 대단히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전에 그 계획을 저지시키려 한다.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광야에 머물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배반하고, 의심하고 있어야

사탄은 더욱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가나안을 향하여 힘차게 백성이 전진할 때,

사탄은 두려워 떨게 된다.

그래서 길을 막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진을 괴롭히는 것이다.

백성들을 위협하고 공격하면서, 그들이 마침내 넘어지고 포기하도록,

마귀는 총력을 다 한다.

 

▲작은 손실만 입힌다.

아랏은 ‘이스라엘 사람 몇 사람을 겨우 사로잡았을 뿐’이다.                        민21:1

약간 손실을 입혔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졌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패배가 아니다.

마귀가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만 물은 것과 같다.                                  창3:15

 

여러분 등산할 때도, 항상 올라가는 길만 있지 않다.

한참 올라 가다보면, 내려가는 길을 만난다.

그러나 그것은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올라가는 길의 과정 중에 있는 길이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믿음으로 달려가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여 피곤하며 낙심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

우리 인생길에 입은 약간의 패배와 실망과 손실 때문에 낙심해서는 곤란하다.

 

▲길을 막는 장애로 인해... 노래를 배운다.

 

아래는 이철환의「반성문」에 나오는 <바윗돌과 시냇물>이란 아름다운 글이다.

 

황금빛 햇살을 일렁이며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냇물은 자꾸만 바위에 부딪혔다.

바위가 시냇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시냇물아, 정말 미안해!

내가 네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너는 거침없이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을 텐데... 그치?”

 

바위의 얼굴은 시무룩했다.

시냇물이 하얀 손으로 바위의 얼굴을 만져주었다.

 

“아니야, 바위야! 네가 있어서 오히려 더 고마운 걸?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바위 네가 있기 때문이야!

뾰족한 바위도 만나고, 울퉁불퉁한 바위도 만나야

나는 졸졸졸 노래를 부를 수 있거든!”

 

시냇물의 흐름을 가로막은 바위들이 만약에 없었다면,

시냇물은 아주 멋없고 밋밋한 시냇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냇가나 강가에 가 보면, 조용히 밋밋하게 흐르는 물이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아름다운 소리도 없고, 매력도 없다.

그 속에 바위나 폭포같은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내나 강 속에 바위나 폭포같은 장애물이 있으면,

그것을 돌아가면서 시냇물이나 강물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졸졸졸, 촬촬촬’ - 그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자연의 생명력을 느낀다.

 

원래 모든 노래나 음악은 떨림과 충격의 산물이다.

악기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도 - 충격과 떨림에서 나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떨림과 충격을 주는 장애물들은,

우리 삶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다.

하나님이 시련을 통해 만들어 주시는, ‘내 인생의 노래’를 잘 배워야 하겠다.

 

<07.08.05. 인터넷 설교 중 부분 발췌, *원제목 : 누가 내 길을 막는가?  

 

 

 

 

◑폭력의 밑바탕엔 항상 공포가 있다.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아래는 도서 평 중에서 몇 줄 스크랩했습니다.

 

 

▲폭력의 전도 현상   (전도 : inversion, 도치)

 

‘폭력은 안 된다 → 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 →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 가한다. 폭력은 이런 전도 현상을 되풀이 한다.

 

(‘테러와의 전쟁’의 명분도 마찬가지다. 테러 집단의 폭력을 증오한다.

그래서 테러 집단이 테러를 못 하도록, 사전에 폭력을 미리 가한다.

이른바 ‘선제공격 이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보복 폭력을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폭력의 밑바탕에 ‘공포’가 있다고 분석한다.

92년 LA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 사건’을 보자.

25세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이 LA 근교를 드라이브하던 중

경찰의 검문을 받고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킹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경찰에 둘러싸여 주먹과 발, 경찰봉으로 맞았고

두 차례의 전기충격 공격까지 받았다.

볼과 발목뼈가 으스러지고 두개골이 아홉 군데나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찰이 무죄로 풀려났다. 어째서 ‘무죄’인가?

 

“로드니 킹을 공격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경찰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할 무시무시한 육체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 측 변호인단의 주장이 먹혀들어 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도(inversion)현상’으로 해석했다.

‘강자’에 속하는 측이 ‘약자’에 속하는 쪽을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현상이다.

우리 주변에선 ‘노숙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일반 시민의 심리’가 그 예가 된다.

 

이런 ‘전도’는 사람들을 쉽게 폭력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 ‘예방을 위한 대항폭력’으로 정당화되고,

침략적 성격의 전쟁이 ‘자위’를 구실로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폭력의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책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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