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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칭찬 받는 헌금?

LNCK 2007. 8. 13. 20:09
 

◈칭찬 받는 헌금?                            막12:41~44



오늘 이 본문(과부의 두 렙돈 교훈)은 헌금을 주제로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헌금 설교’가 아니다. 그럼 본문의 주제는 과연 무엇인가?



▲배경 설명

예수님은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헤롯 성전 입구 헌금 궤에 마주앉아 계신다.

사람들은 성전 입구에서 헌금 궤에 헌금을 넣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대열에는 무겁고 많은 헌금을 드리는 부자도 있었고,

또한 가난한 행색의 과부도 있었다.


‘두 렙돈’은 하루 품삯(한 데나리온)도 되지 않는,

가난한 자의 겨우 한 끼 식사비에 해당하는 매우 작은 돈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 여인이 많은 헌금,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헌금 설교인가? 예수님도 헌금에 대해 가르치셨는가?

만약 아니라면, 이 본문의 진의가 과연 무엇일까?


이 본문의 교훈은, 부자가 헌금에 ‘올인’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인가?

아니면, 과부의 전부 드린(올인한)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칭찬인가?  

그러나 그것들이 이 본문의 주제는 아니다.

그렇게 보는 시각은, 다분히 우리의 고정관념, 선입관일 뿐이다.



◑본문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전후 문맥을 살펴보자!


▲1. 본문 전 상황 - 종교지도자 고발


예수께서 ...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12:38~40


왜 오늘 본문 앞에,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고발이 위치하는가?


당시 서기관들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변호사들이다.

그들에게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돌봐줘야 할 사회적 배려의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사회지도층이며 사회적 약자를 돌봐줘야 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남편이 죽고 얼마간 남겨진 불쌍한 과부의 상속재산을

오히려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와 항목을 얽어매서

그들의 가산을 삼키는 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다.                         막12:40


과연 무슨 명목으로 과부의 약한 처지를 이용해서 삼켰을까?

- 다름 아닌 신앙의 명목, 종교의 이름이었다.


고대 문헌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야기

여기엔 당시 서민의 애환이 담긴 스토리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참고가 된다. 


한 과부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마땅히 드릴 예물이 없었다.

그래서 항아리를 탈탈 털어서, 집에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웅큼을 준비했다.


그런데 자기 헌물이 너무 작아, 누가 혹시 볼까봐 부끄러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며 조심스럽게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감히 하나님 앞에 머리를 못 들고,

자기가 갖고 온 제물도 너무 볼품이 없고, 

초라한 마음과 행색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자기가 준비해 온 가루 한 웅큼을 정성스럽게 제단 위에 드렸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몰래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던 서기관, 제사장들이

이 광경을 보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여인이여,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오면서, 이런 것을 정성이라고 가져왔는가?

도로 집으로 가져가시오!” 라면서 호통을 쳤다.


이 이야기가 미드라쉬에 풍자되어 기록될 정도라면,

이러한 사례들이 당시에 얼마나 빈번히 자행되었는지 짐작케 해 준다.


▲과거에 일부 한국의 교회는,

헌금에 대해 왜곡되고 잘못된 입장을 가르쳤던 적이 있었다.


헌금을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이 -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헌금도 반드시 가르쳐야 하되 -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면, 목회자가 매주 강단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라, 그래가지고 자식이 잘 되겠습니까?’ 라고

자주 말했다고 치자.


그런데 살다보면, 집안에 우환이 닥칠 때도 있고, 자녀가 잘 못될 때도 있다.

그 때 머리에 드는 생각이 ‘목사님 말대로 헌금 안 드렸더니 그러나?’ 겁내게 된다.


종교심을 가진 연약한 인간인지라, 반드시 캥기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서 헌금을 바치게 된다.

종교성을 가진 인간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얼마든지 발생한다.


▲저(설교자)는 이 본문이 헌금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라! 예수님이 아무렴

부자들의 헌금을 더 뜯어내시기 위해서

이 두 렙돈 드린 여인을 예로 들어 사용하시겠는가!

 

또한 이 본문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도 아니다.

전후의 문맥은, 모두 한결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적 열광주의를 질타하고 있으므로


이 본문도, 자기에게 남은 두 렙돈 마저 안 바칠 수 없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몰고 가는 종교적 분위기’를 질타하고 계신 것이다.


▲2. 본문 후 정황 - 화려한 헤롯 성전 질타

본문 바로 다음 정황인 막13장을 보자.

예수께서 이 장면 후에, 성전에서 나가실 때 한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보소서, 이 성전이 어떠합니까? 얼마나 웅장합니까?”                    막13:1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금칠을 하고, 하얀 대리석으로 새로 세운

웅장한 예루살렘 (헤롯) 성전을 가리키며, 그는 예수님께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당시 헤롯은 이두메 출신이라는 본인의 신분적 약점을 보완하려고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런 큰 성전건축공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반응은 기대와는 딴 판으로 매우 차가워 찬물을 끼얹는 듯 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막13:2

주후 70년에, 이 예언은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졌다.



전후 문맥으로 살펴 본 본문의 진의


종교적 열광주의를 질타하시다

예수님은 본문 전에도, 본문 후에도 동일하게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적 열광주의를 호되게 질타하고 계신다.

이렇게 볼 때,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낀 '과부의 두 렙돈 헌금 교훈'도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질타인 것이다.

 

이것은, 그 상황을 그렇게 몰아간,

즉 과부가 자기의 마지막 남은 돈조차 헌금으로 안 드릴 수 없었던 상황으로

몰고간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 열광주의, 종교지상至上주의>를

예수님은 심하게 질타하신 것이다.


본문에서 과부는,

그것 아니면 그는 그 날 저녁 식사를 굶어야 하는 딱한 처지였지만,

자기가 남은 잔돈까지 다 긁어서라도 헌금을 드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열광주의(광신주의, fanaticism)를 지탄하신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열심이 과장이 되는 속성>이 있다.

이렇게 분위기를 몰아가면, 연약한 성도들은 헌금을 안 드릴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당장 오늘 저녁에 굶는 일이 기다리지만,

과부는 자기 수중에 남은 동전까지 다 털어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처량한 입장을 예수님은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예수께서 ...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외형주의)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종교적 우월주의)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종교적 권위주의)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물질주의, 물량주의)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종교적 외식)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12:38~40


위에서 보듯이, 신앙의 외형주의, 외식주의, 형식주의가

당시에 가난한 자의 재산까지 긁어모아서

‘헤롯 성전’이라는 희고 금빛 찬란한 괴물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거기에 철저히 희생된 사람들이 바로

본문의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그렇게 몰고 간 당시 종교적 상황이

얼마나 악하게 무르익어갔는가를 - 본문이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한 영혼에 대한 관심


참 신앙은 ‘한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본문의 과부와 같은 ‘한 영혼’에 무관심한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후략)


<07.08.05. 인터넷 설교에서 녹취, 정리

 

[주제별 분류] 리더십, 지도자 http://blog.daum.net/bible3/1254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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