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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816 향기 or 악취

LNCK 2007. 8. 13. 11:19
 

◈향기 or 악취                         고후2:15~16                             설교 두편 편집



▲향기 or 악취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고후2:15~16


사도바울의 복음전파사역을 평가하는 무리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 부류는 그를 혹평하여 이르기를 ‘사람을 죽이는 악취’라고 했고,

다른 한 부류는 그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사람을 살리는 향기(생기)’라고 했다.


오늘날 세상의 혹독한 평가에 성도나 교회가 주눅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다.


아무리 잘 해도 ‘악취’라고 평가할 사람들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만 ‘향기’라고 평가할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 된다.



◑마음에 찔렸지만, 엇갈린 반응


▲군중들의 반응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과연 어땠는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행7:54


잘한 설교는, 마음에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마음에 은혜요, 다른 하나는 마음에 찔림이다.


사실 설교를 듣고 나면, 뭔가 가슴에 와 닿아야 영적인 설교이다.

구원의 은혜, 넘치는 평화, 신령한 깨달음이 오든지,

아니면 자기 마음을 때리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든지 해야지,

그저 청중들 마음 건드리지 않는 수준에서 살살 피해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찔림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7:54


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찔렸으면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마귀의 역사는 이를 갈게 만들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모든 군중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으니까,

마귀는 (아마) 몇 사람을 선동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해 작업을 편다.


지금 스데반이 설교하는 장소는 ‘공회’이다.

72명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진치고 있는 장소였다. 

당시 사회의 지도층이요, 귀족이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처하는 장소였다.

유대나라 법 집행기관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도 이 사람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


이들은 스데반의 설교로 지금 얻어맞은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듣는 귀’가 있었다.

‘마음이 찔렸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돌이켜야 되는데, 자기들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고

도리어 말씀을 전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반응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똑같은 사건이 행2장에 나타난다.

그 때의 설교자는 베드로였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항의할 수 있었겠다.

“여보시오,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게 아니야!

예수를 죽인 자는 빌라도야!

거기에 동의한 사람들은 다 높은 사람들이야.

못 박은 사람은 로마 군인들이야.

우리는 구경만 했어!”

그들은 이렇게 발뺌하지 않았다.


대신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행2:37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는, 똑같이 마음에 찔렸지만, 정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스데반을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똑같이 설교를 듣고 똑같이 찔림을 받았는데,

한쪽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섰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반대로 이를 갈고 죽여 버리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있으면... 능력자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으면... 실력자이다.

더군다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정확히 보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다.


공회원들은, 헬라파 집사 한 사람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기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설교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은 마귀가 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더욱이 거기에는 군중들도 함께 모여 있었으므로

자기들의 자존심에 공개적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퉁이 돌, 걸림 돌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다”고 했고                                          시118:22

또한 “거치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됐다”고 했습니다.                                       벧전2:7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넘어지니

이는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벧전2:8


예수님에 대한 반응도 두 가지였다.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배, 디딤돌’이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정반대로 ‘거치는 돌, 넘어지게 하는 바위’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는가?                                  눅6:26

아이러니한 것은 거짓선지자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눅6:26

아마도 ‘쓴 소리’는 한 마디도 안 하고, 항상 ‘덕담’만 말했던 모양이다.



◑반대 반응이 나타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


▲반대는 반드시 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에 마땅히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또한 연약해서 가끔은 그 사명을 망각할 때도 있지만,

정말 성도와 교회가 도달하기 힘든 ‘완벽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해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악취’

‘거치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

‘이를 갈거늘...’

등의 안티anti 및 네거티브 반응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아니,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벧전2:8에도, ‘그것을 미리 정하셨다’고 했다.                     그 외 딤후3:12, 마26:54


그러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지금 내 삶에 그런 것(반대, 핍박, 고난)이 만약 없다면

내가 지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고 있다는 말도 된다.



▲반대를 허용하시는 이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예수의 생명, 생수, 생기, 성령의 바람 이런 것들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질 때’, 즉 십자가 당할 때 평소보다 더 잘 나타난다.

다른 말로, 그런 반대와 고난이 없으면... 생명이 잘 안 나타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4:11


→바울이 “항상” 죽을 고생을 한 것은,

그만큼 풍부한 생명의 역사를 “항상” 나타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4:12


→만약 오늘 나에게 사망의 역사가 없이 모든 것이 태평하고 잘 풀린다면,

그래서 좋고 부럽긴 하겠지만, 생명의 역사도 내 안에서 거의 중단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주의 쓰시는 종들에게 사망의 역사를 주신다.

생명의 역사를 일구어 내라는 하나님의 섭리다.


그래서 바울이 어떤 이들에게는 ‘악취’가 되었고,

스데반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를 가는 대상’이 되었고,

예수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었던 것이다.

- 다른 이들에게 “네가 죽고 그들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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