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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832 용서와 원망

LNCK 2007. 8. 22. 11:03
 

◈용서 와 원망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19:18

 

 

용서 못 하면.. 원망하게 되고

용서 하면.. 원망을 그친다.

그런데 원망은, 내 비참한 처지를 더 악화시키는데...



◑용서는 강한 자만 할 수 있다.


▲남에게 말하기는 쉽지만, 자기가 실천하기 어려운 용서

용서는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실천하기가 어렵다.

C. S. 루이스도 “용서는 다들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가 하기 전 까지는!” 이라고 말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그가 나에게 끼친 인격적 상처나 못된 행실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

그를 쳐다보거나 생각하면,

그가 끼친 상처나 손실이 생각나면서 아픔이 생겨난다. 그래서 어렵다.


▲사과하고 빌기 전에는 용서가 어렵다고 하는데...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해야.. 용서가 된다.

그 상처가 상처로 남아있는 한,

계속 그것이 생각나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된다.


‘저 인간은 미안하다고 내게 와서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어

도리어 적반하장이야, 도리어 지가 큰소리 치고 있어!’

그런 마음이 들기 때문에.. 용서 못한다.


▲그래서 정말 용서하려면, 자기가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의 죄값을

대신 갚아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

즉, 하나님께 대신 회개하고, 대신 대속하는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저 사람이 내게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내가 그 놈 대신 회개해서,

‘하나님이 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내가 진심으로 그 원수를 용서하기란 사실 어렵다.


그만큼 용서란 어렵다.

그러므로 용서를 단지 ‘자기 잘못을 비는 행위’,

또는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행위’ 정도로 쉽게 생각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의 죄와 허물을 주님이 사해 주시도록 올려드리는 차원’까지 나가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

C. S. 루이스의「순전한 기독교」에 보면

저자가 그 책 여기저기에서 열 번 이상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예배나 교회조직도 다 쓸데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 베풀고,

용서하시고,

자격 없는 자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쓰시는 일꾼 삼아주시는 일입니다.

 

내가 교수로서 강의도 하고,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도 하는데

‘내가 기독교의 핵심이 뭔지 제대로 알고서 그 일을 하고 있는가?’

- 나 스스로 한 번 아래와 같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제대로 하는 일’이란?

나는 ‘제대로 하는 일’에 대한 정의를

<어떤 시간, 어떤 대상, 어떤 환경에 관계없이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산출하는 능력>으로 내린다.


예를 들면, 어떤 교수는 자기가 원래 강의를 잘 하는데,

오늘 강당에서는, 학생들이 산만해서 강의를 잘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처한 환경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 ‘제대로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강의를 ‘잘 못 하는’는 것이다.

 

강의나 설교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어떤 대상, 상황, 악조건에 관계없이,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즉 언제나 강의를 잘 한다.


▲'제대로 하는' 용서, 은혜

이런 의미로 볼 때, 했다가 안 했다가, 들쑥날쑥 하는 용서와 은혜 베풂은

- 사실은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제대로 용서하는 사람, 제대로 은혜 베푸는 사람은,

시간, 대상,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대로 용서하고 있는가?

제대로 은혜 베풀고 있는가?

기독교의 핵심을 제대로 맞추고 있는가?  


▲주님이 제대로 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일을 전지전능하게 수행하시지만,

그 중에서 특히 하나님이 항상 ‘제대로 잘 하시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도 잘 만드신다. 창조의 능력도 물론 있으시다.

그런데 그 보다 하나님이 더 ‘제대로 잘 하시는 일’은

-은혜 베푸시는 일이다.


창세기에 천지를 창조하신 기록도 (오늘날의 계속적인 창조 역사도)

사실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무대를 만드시는 설명에 불과하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주로 집중해서 하시는 일은,

(이 글의 표현대로라면 ‘제대로 하시는 일’은)

즉 조건, 대상, 상황에 관계없이 똑같은 결과를 산출하시는 일은,

→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다.


시대에 관계없이, 장소에 관계없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쓰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오늘도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당신의 장중에 두시고                        

은혜로 변화 받게 하셔서 써 주시는 일을 하신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루이스 교수가 간파한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핵심’을 과연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들쑥날쑥 하고 있는가?



◑용서 못 하면.., 원망한다.


원수를 용서 못하면 - 그를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데,

그 원망과 불평이 나쁜 이유는,

더 나쁜 것들을 더 연쇄적으로 불러오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미팅을 예로 든 ‘은혜와 믿음’

대학생 딸이 미팅에 나가서 괜찮은 남자애가 걸리려면,

요것은 은혜가 있어야 한다. 즉, 운이 좋아야 한다. (내 힘으로 안 된다는 뜻)


그런데 거기서 운 좋게 걸린 괜찮은 남자애가 딸 곁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은

이것은 운으로만 안 된다. 요것은 실력(믿음)이 필요하다.


미팅을 예로 들었지만, 물질, 지식, 만남, 등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좋은 축복들이 은혜로(운으로) 나에게 찾아올 때가 반드시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고, 내 안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은

- ‘운’으로만 안 되고, 거기엔 반드시 ‘실력’이 필요하다.


은혜(운)는 내 힘을 어떻게 제어할 수 없지만,

실력(믿음)은 내 힘으로 제어해야 하는 것이다.


즉, 좋은 만남, 물질, 지식 등 축복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는 실력을 가지려면

- 용서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거꾸로 좋은 만남, 물질, 지식 등 축복이 머물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이유는

- 용서하지 못하고, 불평, 원망하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면 안 좋은 만남, 안 좋은 사건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어떤 사람이 그 때 화를 못 참고 순간적으로 분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한 차례로 끝내는 것은 ‘실력’이다.


그런데 그 원수를 용서 못 하고, 계속 반복적으로 원망, 분노하는 것도

‘자기 실력’(믿음)이다. ‘안 좋은 의미에서의 실력(불신앙)’이다.


그래서 불평하고 분노하는 사람은,

어떤 복이 오더라도, 그것을 자기 안에 계속 지니지 못 한다. 놓쳐버린다.

그리고 악연이 오면,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스스로 껴안고 산다.

그래서 그 악연을 더 악화, 극대화시킨다.


물론 원망, 불평하는 사람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리한다.

또한 자기 인생이 밑바닥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내려갈 데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판사판으로 나오는데,


원망과 불평은, 내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용서와 은혜 베풂은, 내가 가진 영성을 더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인터넷 설교 중 부분 발췌.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http://blog.daum.net/bible3/12577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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