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도마와 마더 테레사 요20:27 2007.09.09. 설교스크랩
최근 화제가 된, 마더 테레사의 신앙적 의심을
사도 도마의 의심과 연관해서 풀어본 설교,
무작정 믿기보다는, 의심해 보는 것은 진정한 확신으로 성숙하는 여정이요,
의심은, 불신앙이 아니라, 참된 신앙 여정을 가는 길에 반드시 찾아온다.
남달리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보니... '깊은 차원의 회의'가 남다르게 생기는 것이다.
그런 '회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절대 의심치 아니하고,
자기 사명에 충실한 것은, 그가 참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데...
◑도마의 의심
도마라는 이름은 공관복음서마다 등장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만 나옵니다.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그는 캐릭터(character)를 지닌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충직한 제자로 등장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자 주님은 또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려 하십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위협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확고합니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을 때
도마가 동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그는 자기 속에 일고 있는 두려움을 떨치면서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은 14장입니다.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시면서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요14:5).
그는 모르면서 침묵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시인하고,
또 물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배움을 향해 열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심 혹은 불신앙의 도마
도마가 세 번째 등장하는 대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그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도마를 일컬을 때 ‘의심 많은’이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긍정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의심이 많다는 말은 자칫하면 불신앙과 등치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저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말을 믿음이라는 미명 하에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믿는 척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지성의 희생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따지기 좋아하는 골치 아픈 청년이었습니다.
청년회 선배나 지도 교사들이 더 이상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때
제게 들이대던 말이 뭔지 아십니까? “너 시험 들었구나?”
그래도 내가 수그러들지 않으면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너 지금 사탄이 시험하는 거야.” 저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과연 의심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안 될 불경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의심 없는 확신, 맹목적인 신앙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회의(의심)를 모르는 성스러움은 폭력과 손을 잡기 쉬운 법입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이 얼마나 타인에 대해 폭력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계몽된 영혼의 특색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더 깊은 인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인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심의 숲을 통과하지 않는 한 뭔가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모호한 것입니다. 빛과 어둠, 성과 속, 선과 악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삶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제 옳은 것이 오늘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의 오감으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이상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사기꾼에게 넘어가는 까닭은 그들이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번민했을 것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한 입인 듯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지만
자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25)
도마의 이 딜레마는 어쩌면 부활 증언 앞에 서있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 희망의 샘
도마가 회의의 숲에서 방황하고 있는 데도 주님은 즉시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을 때
주님이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빌어주신 주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27) 하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도마는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았을까요?
도마가 정말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도마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마침내 회의의 밤이 지나간 것입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제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이고,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신 영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다가와 당신 몸의 상처를 보여주셨을 때,
도마의 눈에 드리운 회의의 비늘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지금 우리 눈은 무엇을 좇고 있습니까?
영광을 구하는 이들의 눈에는 주님의 상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상처 입은 이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병든 이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들이 내보이는 상처와 고통에 눈길을 줄 때 우리 눈이 열릴 것입니다.
이런 일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마더 테레사입니다.
◑ 마더 테레사의 의심
▲9월 3일 자로 발간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테레사의 내밀한 삶>이라는 머릿기사를 올렸습니다.
인도 콜카타 빈자들의 어머니였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지금,
그가 남긴 편지글들이 <마더 테레사: 와서 나의 빛이 되어 주소서>
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 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나왔는데,
그 책에 담긴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은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라 일컬음 받는 마더 테레사의 번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인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지난 50년 동안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수녀회 입문 당시 그는 평범한 수녀로 살아가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통 속에 방치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어줄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부름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그는 인도로 갔습니다.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죄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에게 “너는 가장 무력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너를 나의 영광의 도구로 삼고 싶은 것이다. 거절하려느냐?”
물으셨고 그는 그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소명을 이루면서 그는 행복했을까요?
늘 기쁨 속에서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을 채운 것은 오히려 ‘메마름’, ‘어둠’, ‘외로움’, ‘냉담’이었습니다.
때로는 천국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까지도 생겼습니다.
공적으로 그의 역할이 커갈수록,
그래서 세상의 눈길이 그에게 쏠릴수록 마더 테레사의 어둠도 깊어갔습니다.
어쩌면 그런 모든 역할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주님 앞에 앉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가 전심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천사의 가면을 쓴 위선자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Kolodiejchuk 신부는,
마더 테레사가 그런 내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도,
자기에게 품부된 소명을 저버리지도 않은 것이야말로
그의 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내적인 어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체득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의심했던 테레사의 모습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하지만 의심과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했던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의 엄중함을 배우게 됩니다. ★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경험하며 사십니까?
우리에게 다가오고, 말 건네고, 간섭하시는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부끄러워 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의심과 어둠을 통과해 가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에서 제일 감동하는 대목은 아들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에도
깊이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그런 하나님에게
당신의 영혼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에
예수님은 아버지께 자신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 참상으로 가득 찬 콜카타의 현실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는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더 테레사는 주님의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의 길이 좁은 길인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지금 잘 믿는 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잘 믿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울면서라도 사랑의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마침내 주님의 큰 생명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의심이 생겼다고 믿음의 길에서 실족하지 말고,
의심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07.09.09.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아들을 사고로 잃고서 하나님을 회의하다가,
주님을 체험적으로 만난 엄마의 간증
http://blog.naver.com/kslofs/5002234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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