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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 ‘하나님의 형상’이 뜻하는 것은?

LNCK 2007. 9. 28. 12:48
 

◈‘하나님의 형상’이 뜻하는 것은?       창1:26~28



신자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뜻하는 바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이, 성경에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1장이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의 뜻을

자연과의 관계에서 1:26절에,

인간과의 관계에서 27절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28~31절에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1. ‘하나님의 형상’이란 -자연과의 관계에서-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위 말씀을 축약하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다스리게 하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뜻은,

온 땅과 모든 짐승과 식물을 '다스리는 왕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의 ‘노예 개념’ 사회에서, 성경의 ‘왕의 개념’은 혁명적 발상

이것은 고대 근동 아시아의 개념과 비교하면..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는, 신들이 일하는 것이 귀찮아서

신들을 보살피고 신들이 할 일을 심부름하는, 노예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평생 신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일벌레, 노예에 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릴 왕적 존재라는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신자들은 일벌레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복을 위해서,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일벌레가 되었다.


세상을 다스려야할 왕적인 존재가,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이를 풍자하는 재미있는 유머가 있다.


하나님이 소를 창조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60년 동안 살아라, 너는 사람을 위해 평생 일만 하며 살아야 한다.”

그랬더니 소는 그 봉사기간이 너무 길다고 느꼈는지, 30년으로 깎아달라고 탄원했다.

그래서 소는 30년만 살게 되었다. (소의 평균 수명이 30년인 듯)


하나님께서 개를 만드신 다음에 “너는 30년만 살아라, 대신 너는 평생 집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개도, “저도 15년만 살겠습니다!” 라고 건의했고, 받아들여졌다. (개 수명이 15년)


하나님께서 원숭이를 창조하시고 “너도 30년만 살아라, 대신 너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 재롱을 떨어야 한다!”고 하자, 원숭이도 15년만 살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너는 25년만 살아라, 대신 네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겠다!”고 하셨더니,

사람은 욕심을 부려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지 마시고,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모두 다 제게 주십시오!”  그 소원도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사람은 25년까지 그럭저럭 살다가

소가 버린 30년을 얻어서, 25~55세까지는 소처럼 죽도록 일만 하고,

개가 버린 15년을 얻어서, 55~70세까지는 (개처럼) 퇴직하고 집만 지키다가 보내고,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얻은 것으로는, 70~85세까지는 (원숭이처럼)

손자손녀 앞에서 재롱을 부리다가 세상을 떠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누가 만든 유머인지 모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벌레가 되어 살다가 가고 마는

한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잘 풍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반대되는 삶이다.)


▲그러나 신자는 이렇게 일벌레가 되어, 돈의 노예가 되어 세상을 마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어두운 죄 가운데서 불러내서 구원해 주신 것은,

소처럼 평생 일만 죽도록 하면서 돈만 벌면서 살지 말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래에 실제 사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2000년 11월 데네시 벨레시 목사가 시무하는 캘리포니아 코스티힐 커뮤니티 교회에서는

이른바 ‘하나님 나라 과제 kingdom assignment’ 라는 생소한 사역을 전개했다.

(양찬삼 교수, 「하나님의 비전에 이끌리는 삶」에서 발췌한 내용임.)


이것은 1백 명의 교인들에게, 교회 재정으로 1백 달러씩 각자에게 나눠주고,

재량껏 사용하되 3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과제였다.

*이 돈은 하나님의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한다.

**어디에 쓰든지 상관없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 되는 일에만 사용한다.

***받은 날로부터 90일 되는 날, 그 결과를 전 교인에게 보고한다.


처음에는 선뜻 1백 달러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돈’이라고 생각하니까, 함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1백 명의 교우들이 1백 달러씩 받아서 가져갔고,

드디어 90일이 지나서 교인들 앞에 보고하는 날이 다가왔다.


NBC방송은 이 신기한 보고장면을 전국에 생중계했고,

보고 듣는 사람들과 시청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일부 교우들은, 이 돈으로 가난한 노숙자들에게 음식과 담요를 제공했고,

다른 이들은, 미혼모의 보조금으로,

중국의 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멕시코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택기금으로,

교도소 사역을 위한 헌금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돈을 사용할수록 금액이 불어났다는 것이다.

이 돈을 가지고 불치병 어린이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시작한 한 교우는,

창고에 가득하게 아동도서를 모으게 되었고,


어떤 교인은 ‘예수’ 영화를 상영하는 일에 1백 달러를 사용했는데,

10명의 친구들이 동참하면서, 자본금이 6천 달러로 불어났다고 한다.


교회 예산 1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미국은 물론 전 세계 25만 명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고,

90일이 지난 후에는 15만 달러가 넘는 돈으로 불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 참여한 교인들이

하나님의 돈 1백 달러를 관리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지 1백 달러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가진 모든 돈, 재능, 시간까지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모여서, 자기들이 깨달은 것을 ‘6가지 비밀’이란 이름으로 소개했다.

①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았다.

②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③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④적은 돈으로도 큰일을 할 수 있다.

⑤섬길 기회는 우리 주변에 매일 있다.

⑥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무엇임을 배우게 되었다.


이들은 신자가, 어떻게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물질, 재능, 시간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땅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이다.


그 사명-왕 같은 제사장-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저 우리 한 사람 복 받고 편안하게 살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2.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할 때” 그 형상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창1:27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것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과거에 ‘하나님의 형상은 이성이다.’ 라고 해석해왔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 라는 데 강조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해석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남성도, 여성도 아니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겠다고 해 놓고선,

굳이 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일까?

여기에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굳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이유는? - 서로 사랑할 때 형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외로이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 가운데 계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늘 사랑 가운데 교제하시며 존재하신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



사랑하면 사람이 변한다. 즉 이기적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하나님의 형상

본능적이며 병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도... 사랑을 하게 되면... 그것에서 해방된다.

자기를 잊고, 상대를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은... 사랑할 때 그렇다.

따라서 사랑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되어 있다.

청춘 남녀의 사랑을 봐도 그렇고, 부모의 자식 사랑을 봐도 그렇다.


마찬가지 원리로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은... 서로 사랑하며 산다.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서로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잘 드러난다.



자기중심적 인간의 세 유형 (이 단락 타 설교에서 펀 글) 

자기만 아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대해서

대니얼 골먼 Daniel Goleman 은「SQ 사회지능」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남을 배려하지 않은 인간들이 존재함으로

이 사회의 유대관계가 깨어지고 무너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이런 성품의 사람을 아래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사실은 우리 속에도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모습이 똑같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르시스 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아도취 형으로 자기영광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기 홀로 영광과 찬양을 받아야 마음이 편한 인물이다.

여기에 사고의 핵심은 <모든 타인은 나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이웃이 있는 것도 내가 높임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자기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아도

일말의 동정심을 갖지 못하는 성품의 소유자를.. 나르시스 형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 형이다.

그는 「군주론」을 쓰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유형은 특별히 정치적 권력과 이기적인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형태의 인물들이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자비하고 냉혹하다.

목적을 향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이 이런 유형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독재체제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당화한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던 통치자들이 역사 속에 있었던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 형

이것은 ‘반사회적인 성격장애’라고 이름 붙인 질병이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시종일관 무책임하다.

자신이 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겪게 될 감정적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악한 일과 거짓말을 해도 마음속에 불안감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는 무감정적인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다.


신자는 반드시 이런 ‘자기중심적 이기심’들을 피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할 것이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3.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과 관계에서-

“책임 의식을 느낄 때” 그 형상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형상’은 - 책임지는 존재

창1:28절부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하나님은 인간에게 축복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러기에 이 명령은, 축복인 동시에 인간의 사명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크리스천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진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물론 자유의지가 주어져서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워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까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형상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들을 해야 한다. 그의 형상이요,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책임감'은 다른 말로 코람데오 정신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라틴어

코람데오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은 마르틴 루터이며

이 말은 그가 유행시킨 말이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 앞에 섰을 때

루터는 ‘눈에 띄게 앞도 당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루터가, 그 답지 않게 망설이더니

“생각할 시간을 하루만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대적들은 이렇게 수군댔다.

‘일개 광부의 아들에 불과한 이 평범한 수도사가

오스트리아와 베네룩스, 스페인과 나폴리의 군주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자요, 천년을 내려오는 가톨릭 제국의 통치자인

총명한 젊은 왕의 존전에서, 경외심으로 압도되었음에 틀림없다!’

대적들의 눈에는 아마 그렇게 비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루터가 압도당한 것은, 황제 앞에 섰기 때문이 아니었다.

루터가 압도당한 것은, 루터 자신은 물론, 황제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코람데오) 대답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황제 앞에서 섰다는 의식 보다 (그가 보름스 국회에 선 것은)

하나님 앞에 섰다는 의식 때문에 압도를 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루이스 스피치의「종교개혁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521년 3월18일 오후 6시경, 황제의 전령은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수도사 한 명을

독일 보름스에 우뚝 솟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건물로 끌고 들어왔다.


홀 안은 횃불로 휘양 찬란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러하여 마르틴 루터는, 찰스5세 황제와 의회 영주들과 추기경들이 모여 있는

이 세상 권력자들 앞에 홀로 서게 되었다.


루터는 이 자리에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루 전에 이미 루터는, 그의 견해를 취소하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었다.

루터는 모든 사람들의 놀램과 의아심속에

답변을 위해 24시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을 하였었다.


지금, 그 시간이 다한 순간,

성당 바깥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와 있었으며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답변을 확실하게 듣기 위해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황제의 대변인이, ‘자기의 생각을 철회할 것인지 여부를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하자,

루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존엄하신 폐하와 높으신 분들께서 단순명료한 답변을 요구하심으로

저는 아무런 주석도, 단서도 붙임 없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하여 다른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사로잡혀 있으며,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어떻게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God help me, Amen!


아, 정말 루터는 멋있는 사람이다.

루터가 왜 그 당시 세계를 통치하던 두 대표자,

세속권력인 황제와 종교권력의 대표자들 앞에 서서,

온 세계가 그를 압박하고 있는데,

그가 그 앞에 서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황제와 자신이 둘 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황제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섰다는 의식을 가졌던 루터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책임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는 말 : 나의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

헝가리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가 쓴 소설「열정」을 보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중요한 질문에

<인간의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문제들은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 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이런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그저 입술로, 지식으로, ‘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라고 고백해봐야 별 소용없다.

남은 나의 전 생애로

남은 나의 전 삶으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가, 병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가?

나의 전 생애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만약 내게 부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병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다가... 가고 말 것이다.


<07.09.23.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하나님의 형상 http://blog.daum.net/bible3/12691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