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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911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

LNCK 2007. 10. 8. 21:48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              계2:18~2:29



▲개관

우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교회들의 특징을 생각해봅니다.

①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던 교회였습니다.

②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당했던 교회였습니다.

③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④두아디라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한 마디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얼룩진 교회였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깨끗함과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였습니다.


물론 버가모 교회 안에도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말하자면 버가모 교회에서는 죄악의 누룩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면,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그것이 온 덩이에 퍼져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만연했던 죄악의 심각성

*서머나 교회는 사탄의 회synagogue of Satan가 있었습니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위throne of Satan가 있었습니다.

계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탄의 깊은 것’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계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서머나에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사단의 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훼방>을 당했습니다.


버가모에는 사단의 보좌가 있었으며, 사단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는 상당수의 <신자들이 자체적으로 이미 사단의 깊은 것 안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만큼 두아디라 교회는 죄악으로 깊이 물들어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 보내진 편지도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내진 편지들 가운데서

가장 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도시 두아디라


▲그 당시 우편물이 배달되던 순서

그 당시로서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고도 번창했던 항구 도시 에베소가

우체국 본부의 역할을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우편물이 출발하면, 먼저 그 위로 60km 떨어진 서머나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또 그 위로 100km 떨어진 버가모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60km 떨어진 두아디라로 약간 내려갔습니다.


그 뒤에는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의 순서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도 위에서 이곳들을 연결해보면 마치 아라비아 숫자 7자의 형태입니다.


▲두아디아 - 버가모의 관문 도시

두아디라는 헤르무스(Hermus) 강과 카이쿠스(Caicus) 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계곡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계곡을 따라 가면

그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버가모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는 수도 버가모의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본시 두아디라는 수도 버가모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전초기지였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가 도래하자

두아디라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했습니다. 그 대신 두아디라는 교통이 좋고,

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동업 조합(길드)이 발달한 두아디라

두아디라에서 출토된 비문들에 의하면,

그곳에는 수많은 동업 조합(guild)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양모, 피혁, 직조, 염색, 도기, 노예 매매, 빵 제조, 청동 제조 등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각종의 동업 조합이 형성되어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에 있던 각종의 동업 조합들은 각각의 수호신을 섬겼습니다.

조합원들은 함께 정례적으로 신전에 올라가서, 자기들의 수호신에게 제사했습니다.

그리고 나면 방탕한 술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때 뒤따라오는 것이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의 성행위였습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은 반드시 어느 한 동업 조합에 가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조합에서 행하는 대로, 함께 어울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음행에도 가담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고, 타락한 세상에서 소금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진 교회

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2. 두아디라 교회


우리는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설립 배경에 대해서도 잘 알지를 못합니다.

사도행전에 직접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가 설립된 배경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①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서 전도했던 결과로 추정해보는 것입니다.

(2차전도여행)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 바울은 제2차전도 여행 때에 마게도냐의 첫 성이었던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빌립보에 있던 한 여성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사람 루디아는 자줏빛이 나는 옷감을 판매하는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의 계곡에는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특이한 식물이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물의 뿌리에서 자줏빛을 내는 염료가 채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서는 자줏빛 염료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아마도 루디아는 그 때 사업차 빌립보에 가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값이 비싼 자줏빛 옷감을 취급하는 상인이었기에 매우 부유했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유숙하게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루디아와 그의 집 전체가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뒤에 이들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이 고향 두아디라로 되돌아와서,

두아디라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②바울이 에베소에 3년간 머물 때, 개척되었을 것으로 추정함.(3차전도여행)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 바울은 제3차전도 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두 해에 걸쳐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에베소가 제일 번창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사업차 에베소를 방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두아디라 사람들 중에서도 에베소에 왔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자기 마을 두아디라로 되돌아가서,

그곳에 두아디라 교회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악한 여자 이세벨

계2:1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본시 이세벨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악녀 중의 악녀였습니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여자의 실제 이름이 이세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딸에게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자의 이름을 붙여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기서의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악한 여자에게

상징적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은 그의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아울러 행음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의 교회들도 행하여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린 일들이었습니다.


행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정결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집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3. 편지의 발신인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1) 그 눈이 불꽃 같고

2)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3)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1장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실 때,

각 교회마다 그 가운데 일부분의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각 교회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편지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눈은 불꽃과 같았습니다.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이는 예수님의 통찰력과 전지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눈은 불꽃같기에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따라서 아무리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이더라도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에는

밝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사람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사람은 외모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X-Ray로 사진을 찍어보면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까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뼈가 부러진 것이나, 속으로 병이 든 것까지도 다 압니다,


마찬가지로 두아디라 교회가 겉보기에는 평안해 보였습니다.

평판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두아디라 교회를

들여다보실 때, 두아디라 교회는 속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았습니다.


이는 계1:15에 이미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9:15,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사람이 주석과 같은 발에 짓밟히면, 그 등뼈가 으스러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주석과 같은 발로서 심판을 하실 때,

악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서 가차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에는 청동업이 발달했습니다.

그곳에는 국경수비대의 역할을 하는 로마의 군인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군인들의 투구나 방패 등의 장비를 공급하기 위해서

자연히 두아디라에는 제련소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련소에서는 금속을 풀무에 넣어 뜨거운 불로 벌겋게 달굽니다.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순물이 제거된 금속에서는 환하게 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예수님의 순결과 거룩함을 상징해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인해 더럽게 얼룩져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두아디라 교회를 짓밟아 심판하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예수님은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칭호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 칭호가 계시록 1장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은 오늘 본문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님의 칭호로서 “인자”(人子)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십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자”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모습이

“인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의도적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계2:22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위로자의 모습이 아니라,

심판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 인자 or 심판주?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를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인자로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4. 두아디라 교회가 받았던 칭찬


계2:19 내가 네 사업(works)과 1) 사랑과 2) 믿음과 3) 섬김과 4) 인내를 아노니

5) 네 나중 행위(works)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예수님은 우선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을 아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업”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같은 절 하반부에서는

“행위”로 번역되었습니다. 실상은 똑같은 단어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통찰하시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선한 행위들은 칭찬하셨고,

악한 행위들은 책망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던 사업, 곧 행위는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선한 행위를 네 가지로 밝혀주셨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였습니다.


말하자면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의 행위가 있었고, 믿음의 행위가 있었고,

섬김의 행위가 있었으며, 인내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두아디라의 자주 장사 루디아는 두아디라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루디아의 선한 행위들을 잘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사랑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와

섬김의 행위와 인내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하실 때,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19


에베소 교회는 40년 전에 가졌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사십 년 전에 가졌던 처음의 선한 행위들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간직하며 유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선한 행위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처음보다도 사랑의 행위가 더 많아졌습니다.

믿음의 행위도 더 많아졌습니다. 섬김의 행위도 더 많아졌습니다.

인내의 행위도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칭찬만 들으면,

두아디라 교회는 전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매우 이상적인 교회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5. 두아디라 교회가 받았던 책망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 말씀은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계2:20


①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0


②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1


③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23


④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23


⑤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3


교회에서 생기는 문제는 그 원인이 외적인 경우가 있고, 내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外的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內的   행20:29~30


두아디라 교회가 병들게 되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외적으로 흉악한 이리가 그들에게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은 그들 안에서

내적으로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1. 이세벨을 용납 (20절)

두아디라 교회가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습니다.

본시 이세벨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악녀 중의 악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돈 왕 엣바알이었습니다.

엣바알이라는 이름의 뜻은 이방의 신 “바알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시돈의 공주였던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을 했습니다.


왕상16:30,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왕상16:31,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성경은 아합 왕이 이세벨과 결혼한 것을 가장 악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바알 종교를 들여온 것이 바로 이세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꾀어서 바알을 숭배하게 하고, 행음하게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여성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을 꾀어 우상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신전의 창기들과 자유롭게 행음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이름인 이세벨을 붙여주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이세벨은 자신을 선지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칭 선지자였을 뿐입니다. 실상 그는 사단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의 가르침은 사단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행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거짓된 가르침에 꾐을 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행음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악한 이세벨이 누구를 가르쳐 꾀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계2:20


이세벨에게서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종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은 성도도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또한 이미 구원받은 성도도 행음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고전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린도 교회 안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아울러 고린도 교회 안에는 신전의 창기와 음행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권고를 보십시오.


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늘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우리를 미혹하는 이세벨의 꾐을 받아서

이런저런 더러운 죄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세벨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두아디라 교회에서 가르쳤을까요?

그의 가르침은 어떠하였기에, 이미 구원을 받은 예수님의 종들조차도

그의 가르침에 꾐을 받고 말았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그는 그 당시 널리 퍼졌던 헬라 철학의 이원론(dualism)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원론은 영과 육을 구분해서, 영은 선하며 육은 악하다고 보는 견해였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관심은 영에 있기에, 사람이 육으로는 죄를 짓더라도

구원을 얻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가르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미혹을 받은 자들은 육으로는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또는 이세벨이 율법과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의 죄를 이미 다 용서하셨기 때문에, 성도가 순결한 영혼만

간직한다면 육체적인 행위야 어떠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에는 각종의 동업 조합들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조합에 가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신전에 올라가서 그 조합의 수호신을 섬겨야 했으며,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음행에 필히 동참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세벨의 가르침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뱀의 말처럼

달콤했을 것입니다.

결국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신전에 올라가서 우상을 숭배하고, 신전 창기들과 행음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서,

여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음행을 가까이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듣기에 편안한 말, 달콤한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들지 맙시다. 그러다가는 우리도

악한 여자 이세벨의 꾐에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심판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힘써 배우고 익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21절)

오늘 본문 2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악한 여자 이세벨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에게 베푸셨던 큰 은혜였습니다.

만일 악한 여자 이세벨이라도 회개했더라면,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세벨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자기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끝내 자신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했습니다.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세벨은 자기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악한 여자 이세벨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였습니다.

그는 끝내 회개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예수님의 엄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3. 심판의 내용(22~23절)

예수님의 심판은 삼중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①첫째는 악한 여자 이세벨에 대한 심판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계2:22


예수님은 이세벨을 침상에 던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이세벨은 음행의 장소로, 쾌락의 장소로 침상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침상은 고통의 장소요, 죽음의 장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가로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가로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가로되 저를 내려 던지라 하니 내려 던지매 그 피가 담과 말에게 뛰더라.

예후가 그 시체를 밟으니라  왕하9:30~33


이스라엘을 병들게 했던 이세벨은 창 밖으로 내려 던짐을 당해 죽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이세벨도

똑같은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역시 침상에 던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②둘째,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2:22


이것은 택한 백성에 대한 징계를 의미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예수님의 징계를 받아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③셋째, 이세벨의 제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계2:23


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딛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몬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에게는 디모데라는 아들도 있었고, 디도라는 아들도 있었고,

오네시모라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들을 직접 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바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여자 이세벨에게도 그의 자녀들, 곧 그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옹호하면서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세벨을 침상에 던져 죽이시듯이,

그의 자녀들도 죽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들이 당할 죽음은 둘째 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짐을 당해 영원한 형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세벨이나 그의 자녀들처럼

다른 사람을 실족하도록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소자”는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소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소자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형벌 가운데 하나가

죄수의 목에 연자 맷돌을 매어서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형에 버금갈 정도로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이 그토록 큰 죄라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잘못 가르치게 될 경우에 받아야 할 심판이

그만큼 더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약3:1


④심판의 결과(23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주변의 모든 교회들은 두아디라 교회의 외적인 모습만 보았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의 행위, 믿음의 행위, 섬김의 행위, 또한 인내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행위들은 갈수록 더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두아디라 교회의 평판은 좋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빛난 주석과 같은 발로서

두아디라 교회를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의 모든 교회들은 무엇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불꽃과 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불꽃과 같은 예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모든 교회는 자신들의 내적인 성결에 더욱 힘쓰게 될 것입니다.


시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렘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렘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⑤심판의 의로움(23절)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물론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성 있게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롬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악한 일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고

그 일에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기뻐하실 선한 일에 힘쓰고 있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님이 우리에게 상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늘 선한 일에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명령과 권고


▲1. 굳게 잡으라


계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계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죄악에 물들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도 않았고, 음행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다른 짐으로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직 한 가지만 명하셨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2:27 그가 철장(鐵杖)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실 때,

각 교회마다 그 권고의 말씀에는 언제나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란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킵니까? 매번 반복됩니다만,

여기서의 “이기는 자”란 예수님을 믿는 자 곧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기는 자”라는 말씀 다음에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세벨의 일을 지키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는 진정한 성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은 시2:7~9 말씀의 성취입니다.


시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에게도 같은 권세를 주셔서,

예수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성도가 만국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장래에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에 당하는 고난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3. 새벽 별을 주리라


계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새벽 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새벽 별이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4. 순종의 요구(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세 교회에서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권고가 시작될 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마지막까지 네 교회에서는

이 말씀이 권고의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불꽃과 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외적 행위만 살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뜻과 마음도 살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언행심사 모든 일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십니다.

예수님은 빛난 주석과 같은 발로서 악인을 엄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와 끝까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귀한 상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예수님이 기뻐하실 선한 행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가 깨끗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여자 이세벨처럼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빛난 주석과 같은 예수님의 발에

짓밟히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이세벨과 같은 악한 영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늘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늘 거룩하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날마다 매순간마다 빛 가운데로 행하는 삶,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성결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7.08.12, 07.08.19,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두 주간 연속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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