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님 요4:43-54
◑서 론
▲‘복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믿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들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요20:30~31.
▲첫째 표적과 둘째 표적의 목적 비교
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돌항아리 여섯에 가득 채워져 있는 물이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포도주를 창조하셔서 그 안을 가득 채우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이심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두 번째 표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구원받은 왕의 신하와 온 가족은 결국 예수님을 다 믿게 됩니다. 요4:53)
▲믿음의 3부류
우리가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사람들의 유형이 3가지로 나타납니다.
①예수님의 영광에 이끌림을 받아서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본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도 요한과
사도 안드레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시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이 입을 열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영광 곧 예수님의 신성에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②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서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곳에서 어떤 표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③셋째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이끌림을 받아서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갈릴리 사람들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서 표적을 행하여주시기를 기대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바라던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을 보고서야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적을 본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표적을 보았던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셋째 유형에 머물지 않고, 둘째 유형으로,
거기서 더 나아가서 첫째 유형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왕의 신하에게서
이와 같이 바람직한 믿음의 성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불신앙을 예견하신 예수님(Jesus Contemplating Unbelief, 43-45절)
요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요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1. 갈릴리로 가심 (43)
요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사마리아 수가의 여인과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서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
그러면 예수님의 행선지 갈릴리는 예수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 곳이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서 곧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헤롯 왕이 죽고 나자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으로 와서 사셨습니다.
마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라나신 고향은 갈릴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아마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His own city, 가버나움)에 이르시니
성경은 가버나움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그곳으로 옮겨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틀 동안 머무셨던 사마리아의 수가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본래의 행선지였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에는 자신이 자라나셨던 나사렛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현재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가버나움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표적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가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2. 갈릴리로 가신 이유 (44절)
오늘 본문 44절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성경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본문 44절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셨습니까? 그 이유는
①예수님이 자신의 고향 갈릴리에서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들의 불신앙을 예견하시면서도
그곳으로 가신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사람들에 의해서 멸시를 받으며 버림을 받도록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의 불신앙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눅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4: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는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 당하신 일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자기들의 귀에 거스리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 사이로 지나가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자신이 고향에서는 결코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셔야 했던 또 다른 한 이유가 있습니다.
②그것은 그곳에 있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와 그의 온 집안사람들이었습니다.
▲3.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심 (45절)
드디어 예수님이 갈릴리에 이르셨습니다.
그 때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을 맞이해서 많은 갈릴리 사람들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서도 같은 표적들을 행하여주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들과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족하게 여기지 못하고
예수님의 표적을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보지 않으면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시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계속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모든 표적들을 다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갈릴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다 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변명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언제라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필요한 모든 요구를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직도 불신앙의 요소가 있다면,
우리도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불신앙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가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신앙의 요소가
깨끗하게 제거되고,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불신앙에 직면하신 예수님 (Jesus Confronting Unbelief, 46-49절)
요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요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1. 왕의 신하 (46절)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 첫째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예수님은 자신이 인류를 구원해주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의 신분을 왕의 신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분봉왕 헤롯을 가리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했던 헤롯왕의 네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했던 헤롯왕이 죽었습니다.
그 뒤에 유대 땅은 네 지역으로 나뉘어서 헤롯왕의 네 아들이 각각 다스렸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헤롯왕의 아들로서 헤롯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분봉왕 헤롯,
마14장에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던 사람이 바로 이 분봉왕 헤롯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분봉왕 헤롯의 신하는 가버나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가나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가나는 갈릴리 내륙에 있는 산지 마을이었습니다.
반면에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해변 마을이었습니다.
왕의 신하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의 아들이 병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원문에는 아들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외동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자기 외동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2. 왕의 신하의 불신앙 (47절)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대한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셨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아들의 병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나로 갔습니다. 30km에 이르는 먼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해변마을 가버나움에서 산지마을 가나로 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올라가야만 합니다. 낙타를 타고 가더라도 몇 시간을 고생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였기에 권세를 가졌고, 많은 종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종을 보내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청해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이 들지만 직접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병든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는 그만큼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어버이는 모든 체면을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어버이는 그 어떠한 수고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 어버이의 애틋한 사랑을 되새겨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왕의 신하가 보여주었던
어린 신앙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함이 아니었고, 믿고 영생을 얻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왕의 신하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책망 (48절)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체면을 버리고 겸손하게 나아왔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와 그 주변에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4:48
그곳에 모인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서 어떤 표적을 행하여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의 그러한 마음을 읽으시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도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나왔느냐?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나왔느냐?
너희가 가진 어떤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나왔느냐?”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처럼 표적을 보아야만 믿겠다는
낮은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는 사실을
늘 명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왕의 신하의 간청 (49절)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책망을 듣게 되었을 때,
그가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렇게 간구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또 다시 예수님에게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요4:49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어느 정도 믿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 죄를 구속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는, 왕의 신하와 그의 아들이
‘질병’이란 환란을 통해서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환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의 아들을 고쳐주시는 이유도, ‘예수 믿고 영생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표적(신유 포함)은,
그의 아들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20:30~31.
이런 예수님의 소원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왕의 신하와 그 가족들이 결국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요4:53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3, 불신앙을 타파하신 예수님 (50-54절)
요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요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요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요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
▲1. 불신앙이 타파됨 (50절)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곳에서 표적을 행하여 자기 아들을 고쳐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순간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공간을 뛰어넘었습니다.
예수님은 30km 밖에 있는 병든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는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왕의 신하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는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혼자서 가버나움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가버나움에 그를 따라 내려가지 않으신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요청대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시지를 않으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왕의 신하에게 아무런 표적도 보여주시지를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있는 불신앙적인 요소를
깨뜨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를 표적에 이끌림을 받는 셋째 유형의 사람에서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둘째 유형의 사람으로 한 단계 올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그는 보고서야 믿겠다는 과거의 자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그는 보지 못하고서도 말씀을 믿는 복된 자리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2. 표적이 나타남 (51-53절上)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서 가버나움을 향해서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가나를 향하여 올라오고 있는 그의 종들을 만났습니다.
종들은 그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아이가 살았습니다.” :51
종들이 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는 분명 표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표적을 행하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물론 예수님이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종들에게 그 아이가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습니다.
종들의 대답은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제 칠시는 우리의 오후 한 시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그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왕의 신하는 그 때로부터 가나를 출발하여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아마도 해가 지고 난 뒤에야 가나로 올라오는 종들을 만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질 때에 시작해서 해가 질 때에 끝이 납니다.
따라서 우리식으로 보면 그 날 낮 한 시가 아직은 오늘에 해당되지만,
유대인들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이미 어제인 것입니다.
아무튼 표적을 행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면 표적을 체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믿으면 표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표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언제나 믿음이 먼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표적을 요구하는 불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표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3. 표적의 결과 (53下-54절)
오늘 본문 53절 하반부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자기와 그의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오늘 본문 50절에서 우리는 왕의 신하가 이미 믿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믿음과 지금 말씀하고 있는 이 믿음은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때의 믿음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믿음은 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의 변화
그는 처음에는 셋째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서론 참조)
그는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
둘째 유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첫째 유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실히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가 행한 첫 번째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전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간증과 전도를 듣고 그의 온 집안이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표적과 두 번째 표적의 결과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4:53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요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요2:11
두 번째 표적을 통해서는 왕의 신하와 그의 가족들, 그의 종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요4:53
▲마치는 말 : 영적으로 죽은 자녀를 살리는 부모가 되자!
①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도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우리 한 사람이 분명하게 예수님을 믿고 전도자의 사명을 다한다면,
우리의 온 집안이 다 믿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②특별히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왕의 신하처럼 좋은 어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왕의 신하는 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죽게 된 자기의 아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살렸습니다.
자녀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왕의 신하처럼 좋은 어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가족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가정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③우리가 전도하는 사람, 우리가 양육하는 새신자들이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에서→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영광을 보고 믿는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하나님께 늘 기도합시다.
특히 환란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기도합시다.
④갈릴리 예수님 고향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중에도 예수님을 믿으려는 소수의 사람들(왕의 신하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로 내려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반대가운데도 굴하지 않는, 이런 담대한 믿음을 가집시다.
<07.05.13.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편집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 http://blog.daum.net/bible3/1299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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