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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928 들보와 티

LNCK 2007. 10. 18. 16:12
 

◈들보와 티                     눅6:39~42



◑들보와 티


▲티나 들보나 잘 못 보기는 피차 일반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눅6:39~42 말씀을 보면 들보와 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본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나무로 대들보를 만드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들보'는 뭐냐 하면,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세우는 대들보에서 ‘대’자를 떼어서 ‘들보’입니다.

매우 굵고 큰 나무 둥치를 뜻합니다.

눈 속에 들보가 들어가면, 아마 눈이 가리워져서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들보가 눈에 들어갈 수도 없지만, 만약 들어간다고 했을 때)


하지만 나무껍질 조각이나 나무 가루(티)가 눈에 들어가도 눈을 잘 뜨지 못합니다.

사물을 잘 보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둘은 피차 일반입니다.


들보는 없더라도, 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상대방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남을 쉽게 비난하는 사람은,

종종 자기 잘못(들보)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모든 문화에 다 있을 것입니다.


▲자기들 눈에는 도 없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싸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상은,

심지어 교회를 포함한 모든 집단은 모두 서로 으르렁 거리며 싸웁니다.

그들이 무엇을 내세우며 싸우고 있습니까?


자기는 완벽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 시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백보 양보해서

비록 ‘들보’는 없다고 치더라도,

작은 ‘티’는 있을 수 있습니다.

‘티’마저 없는 완벽한 인간은, 예수님 빼고는 세상에 없습니다.


싸우는 이유가, 모두가

“나는 제대로 바로 보는데, 너는 틀리게 본다”하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 본문을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들보가 있고, 한쪽은 티가 있는데>,

그래서 둘 다 시야가 어두운 것 같은데

누구도 자기 눈먼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눈에 들보가 든 집단이 있고, 티가 든 집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집단은 결코 자기 눈에 뭐가 들어있는 것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내 눈은 아무 티도 없는 맑은 눈이다.

당신 눈에만 티가 있든지, 들보가 있다!" 그래서 서로 싸우게 됩니다.


여도 야도, 노도 사도,

정부와 국민도, 언론과 정치권도 이렇게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는 국민한테 자기편에 서라고 강요합니다.

패거리 싸움의 한 쪽에 서라고 몰아세우는데, 중간에서 굉장히 난처합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악’과 ‘덜한 악’


우리가 잘 아는 라인홀드 니버는

사회비평가, 정치사상가, 또 신학 윤리학자로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분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 사회에는 완전한 선은 없다.

다만 ‘악’이 있고, 그것보다는 약간 ‘덜한 악’이 있다."


인간 사회는 선과 악good and evil 둘이 싸우는 세계가 아니고,

evil and lesser evil, 즉 악이 있고 그보다 조금 덜한 악이 있어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분의 주장을 오늘 본문과 대비시킨다면

악evil은 ‘들보’요, 덜한 악lesser evil은 ‘티’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덜한 악’인지도 모르고, 만약 ‘선’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남을 비판하고 난도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자기가 ‘들보’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조건 아무 비판도 안 하는 것이 안전하고 성경적인 길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비판이 필요할 때 비판하더라도,

자기 역시 ‘덜한 악lesser evil’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자기 눈에 ‘들보’는 없다손 치더라도, ‘티’는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혹시 비판을 하게 되더라도, 철저히 겸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기


1990년 경, 미국 NCC(교회 협의회)가

‘미국의 교회는 선교와 봉사를 위해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즉 ‘선교의 비전과 지표를 뭣으로 잡을 것인가?’ 를 토의했습니다.


그들이 결정한 것은

"in the eyes of the poor, 가난한 자의 눈으로!"

이걸 지표로 삼아서 모든 선교 활동을 하자고 결의했다고 합니다.


▲이런 결의가 나오게 된 배경

그럼 그 동안은 어땠습니까?

가난한 자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의 눈으로 선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같이 행복해지려고 하면,

진실로 가난한 자의 눈으로 먼저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경제 호황,

경제학 이론 어느 것으로도 다 설명해낼 수 없는

이상한 변종식 경제 호황을 누린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에 경제가 자꾸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금년(2001)도만 해도 10년 전보다 훨씬 더 집 없는 사람, 떠돌이가 많아졌습니다.

경제 호황의 혜택이 골고루 주어지지 않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왔답니다.

 

미국의 구세군이 노숙자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는데,

금년도에 들어서서 구세군 합숙소에 들어온 사람 중에 절반 이상이

정상적인 직장full time job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직장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 없는 사람, 즉 homeless가 된 사람들,

또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도 먹을 것이 모자라

구세군 급식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주 성실한 가난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 교회가 나서기로 결정했답니다.

전체 5천만 회원을 가진 미국 NCC의 결정이었습니다.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사람의 눈은, 자기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우측, 좌측 등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유럽은 과거의 우경화 싸이클을 지나서 지금 좌측(공산주의 아님)으로 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신물이 나면 다시 우측로 싸이클이 서서히 돌아설 것으로 봅니다.

 

미국은 우경화가 상한선 꼭짓점을 찍고 있다고 보는데,

앞으로 점점 좌측으로 기울 것으로 보입니다.(위 NCC의 결정을 보십시오)

 

사람의 가치관과 보는 눈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절대 선으로서 자부하며  남을 비판할 수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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