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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을 키우라

LNCK 2007. 11. 24. 23:06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을 키우라                창41:53~57         출처

 

 

▲남아프리카의 성자 앤드류 머레이

19세기 남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는 182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14때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마치고, 1848년 20살 때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The Dutch Reformed Church) 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조국으로 돌아 온 그는

1860년 남아프리카의 영적부흥을 일으킨 강력한 영적부흥운동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는 무려 240여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한 권 한 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 주는 고전(古典)이 되었습니다.

책마다 신앙의 핵심이 명확하게 설명 되어 있고,

그 자신이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직접 깨닫고 체험한 것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영성 신학의 고전이 되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겸손(Humility)”,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Abide in Christ)”

“절대 복종(Absolute Surrender)”, “주님의 임재(The Master’s Indwelling)”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The Power of the Blood of Christ)”

“기도(The Prayer Life)”, “그리스도를 위해 자녀를 기르라(How to Raise Your

Children for God)” 등이 있습니다.



◑사람을 키우신 예수


오늘 장학헌금 주일을 맞이해서 앤드류 머레이의 책 제목을 그대로 따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을 키우라” 이런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을 키우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키우는 분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굉장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던 사람들을 불러서 생의 목적이 분명하고

사명이 분명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시몬을 게바로 키우시다

사람을 키우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요한복음 1:42에 잘 나와 있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된 시몬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요1:42


사람을 키우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요한의 아들 시몬을 게바로 만드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통해서 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게바로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의 인격의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고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깎여 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인재가 아닙니다!

어제 누구를 통해서 다소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누가 그러더랍니다.

새로 이사 오신 분께 케임브리지교회에 나오시라고 권했더니,

“아, 그 교회요? 하버드, MIT 다니는 굉장한 사람들만 간다면서요?”

그러더랍니다. (케임브리지 교회가 그 대학가 지역에 소재한 듯)


우리교회 4가지 비전 가운데 마지막 비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세계에 봉사할 인재를 양육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국에서도 좋은 학교 나오고,

유학 와서는 하버드 다니고, MIT 다니고 하면 이미 인재인데,

학교도 아닌 교회가 무슨 인재를 양육합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재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학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a man of ability)”이라고 나왔습니다.

인재를 한자로는 “사람 인(人)” 자에 “재목 재(材)”자를 씁니다.


건축을 하는데 쓰기에 좋은 나무를 재목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사람에게 씌어질 때는 “저 사람은 재목감이야!” 이렇게 말합니다.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MIT에서 공부하면 그 사람이 재목감이 됩니까?

그 사람이 인재가 됩니까?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일류대학에 다닌다고 인재가 아닙니다.

하버드나 MIT에서 학위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인재가 아닙니다.

혹시 잘못된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으면 빨리 깨어나십시오.


여러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바요나 시몬”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시몬이 게바가 될 때까지는 여러분은 인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고,

이 세계를 그분의 뜻대로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 까지는

여러분은 인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엘리트 의식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인재 양육 목표

우리교회가 양육하고자 하는 인재는 어떤 사람입니까?

교육에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있으면 막연하지 않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구체적이고 가시적(可視的)입니다.


우리 교회가 양육하고자 하는 인재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말씀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엡4:13)”

라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사도바울은 사람을 양육하는 목표를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그리스도인”

에 두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교육의 목표를 그렇게 잡을 수 있습니다.



◑이민자에게 알맞은 ‘인재’의 역할 모델 - 요셉


그러나 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사람을 이런 사람으로 양육하고 싶다는

양육의 “Role Model”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주변의 사람일 수도 있지만,

저는 주변에 훌륭하다는 그리스도인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는 위인이 나오지 않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인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하나님의 뜻을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양육하고자 하는 인물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있고,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또 신약으로 넘어 오면 열 두 제자들이 있고, 사도 바울이 있고,

디모데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사람을 키우는 Model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사람이 요셉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창세기 30장부터 시작해서 50장까지 무려 20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는 말 그대로 세상이 창조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한 원전(原典)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20장이 요셉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요셉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이런 사실들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만큼 창세기에서 요셉에 대한 비중이 큽니다.


▲첫째, 무엇보다 요셉의 생애가 우리에게 와 닿은 이유는 그가 이민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유학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조국을 떠나 타국에 살게 되었으니까 틀림없는 이민자입니다.


물론 자기가 원해서 이민 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 오게 되었으니까

타의(他意)에 의해 이민을 오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처럼 좋은 학교에 입학허가서를 받아서 온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 시절을 조국을 떠나 이집트에서 보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0세 미만이었습니다.

그가 이집트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가 30세였습니다(창41:46).


▲둘째, 요셉의 생애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생애서 어려운 고비가 여러 번 있었고,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결과는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셉이 손대는 것이면 집안의 일이나 감옥 일이나 무슨 일이든지 잘 되었습니다.

그것이 옆에 사람들 눈에 그대로 보였습니다.


보디발의 눈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감옥의 간수장의 눈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중에 이집트의 바로의 눈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인정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그 집안을 모든 일을 관장하는 총무가 되었습니다.

간수장의 눈에 들어 요셉은 감옥에서도 특별 대접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눈에 들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요셉은 “코람 데오(Coram Deo)”의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궁금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요셉을 위하셨을까?

요셉의 생애에 뭔가 그럴만한 특징이 있는가?

아무리 찾아 봐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이것은 제 추측입니다만,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고요,

성장기에 인격 형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 위로 10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형제들 중에 유독 요셉만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나이가 꽤 들도록, 그러니까 한 열 두세 살이 될 때까지

형들처럼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들에 나가서 형들과 양을 치고서는 집에 돌아와

형들이 한 일들을 모두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했습니다(창37:2).

그러니 뭐 착한 아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그의 인생의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꼭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 낸 것이 “아하, 요셉은 코람 데오의 의식 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코람 데오”는 라틴어인데, 종교개혁자 루터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말입니다.

영어로 하면 “in front of God” 혹은 “in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 면전(面前)에서” 이런 뜻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다는 증거는

다급한 환경에서 그가 소리쳤던 말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주인의 집에는 저보다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주인께서는 마님만 빼놓고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마님께서는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런 나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입니다(창39:9).”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코람 데오” 의식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자산(資産, resource)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

이런 의식은 그의 삶을 정결하게 했고, 성결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기뻐하신 이유를 굳이 찾으라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젊은 요셉에게 어떻게 이런 “코람 데오”의 의식이 주어졌는지

저에게는 하나의 풀 수 없는 미스터리입니다.

아버지 야곱에게서 배웠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경험한 사실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잠에서 깬 그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6)”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로 불렀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임재’의 신앙유산을 물려받았을까요?)


어디서 그가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느끼는 훈련을 받았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그의 인생을 흔들리지 않도록,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지켜 주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은 이집트의 바로(Pharaoh)의 꿈을 속 시원하게 해석한 이유로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그 때, 요셉은 다만 이집트가 앞으로 당할 위기를 예견하고

그 위기를 벗어날 방도를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는 결코 지위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라오께서는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뽑으셔서 그 사람에게 이집트 땅을 맡기십시오(창41:33).”

그러나 파라오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 (창41:38)”


▲넷째로, 요셉은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富)를 축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이집트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를 축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요셉의 이 같은 공직자로서 청렴한 삶 역시

“코람 데오” 의식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습니다. 임종하면서 남긴 말은

“장차 우리 민족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나의 유골(遺骨)을 가지고 가서 그 땅에 묻어 주십시오(창50:24-25).”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심이 없었습니다.


▲다섯째로,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넘어

세계를 그의 뜻대로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불행하게 이집트로 팔려 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는지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the purpose of God)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목적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러나 저는 요셉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Coram Deo” 의식이 차차 그의 삶 속에서

이런 식으로 발전 되었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을 팔아 넘겼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형님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창50:20-21).” 


그리고 그 전에 요셉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습니다(창45:5).”


하나님은 요셉의 생애와 또 그의 고백을 통해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집트의 바로의 입을 통해서 “네가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는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세상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세상을 경영하시는 분은

이집트의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치는 말

요셉은 그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우리의 시대는 요셉 같은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을 키워서 조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사람을 키워서 세계를 요셉처럼 경영하게 해야 합니다.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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