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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 우리가 서로 함께 머무를 수 없을 때

LNCK 2007. 12. 4. 12:17


◈우리가 서로 함께 머무를 수 없을 때           창13:5-13



*출처 : http://daller8.codns.com:40000/13/이동희목사님의_사도행전_설교.alz (이동원 목사님 설교)



◑도입


▲갈등과 더불어 사는 법 배우기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형성하는 공동체는 언제나 불완전성(다툼)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성이나 부패성의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삶의 현장에서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서 이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창13:6


▲살만 하니까 싸운다.

소유가 갈등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목축의 숫자도 늘어가고 재산이 늘어 가면서

점차로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이런 갈등이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 때 화목했던 형제 들이 좀 살 만하게 되니까

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인생에서 보편적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이 갈등을 해결하는 아브라함의 에피소드를 기록한 이유는

우리의 삶의 장에 지금도 존재할 수 있는 갈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모본으로 기록했다고 볼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서로 갈등을 경험하게 될 때

아니 우리가 서로 함께 머물 수가 없을 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요?

본문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함께 찾고 싶은 것입니다.



◑1.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추라.


▲문제에 집착하고 빠지면 안 돼!

신자간 갈등 해소를 위해선,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갈등에 휘말리게 되면, 최대의 비극은

그 갈등 때문에, 더 중요한 이슈를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갈등 때문에, 그 갈등에 빠져 버린 나머지,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든지, 꿈 이라든지, 자기 인생의 비전 등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정말 염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문제에 집착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문제에 빠져 버려요.

문제 속에 빠져 버리면, 그 문제에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되면

이건 정말 문제입니다. 그것이 문제예요!


▲사소한 갈등보다, 인생의 큰 그림을 보시라!

그래서 우리가 갈등이 일어날 때 좀 갈등을 벗어나서 더 큰 그림을 봐야 돼요.

이 순간 내 삶에 있어서 더 중요한 문제가 무얼까? 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내가 붙들고 계속해서 나가야 할 인생의 비전이 무엇이냐?

이 순간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 내 인생의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저 사람과 불편하다’ 이런 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인생의 이슈가 무엇이냐 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본 인생의 큰 그림은 어떤 것입니까?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창13:8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가족이다!’ 이 말이죠.

‘너와 내가 형제라는 관계는, 재산보다 더 중요 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와 나 사이는 한 가족이라는 이 인간관계를 보존하도록 하자!’

이런 더 중요한 이슈에 그는 초점을 맞추었어요.


▲더 중요한 이슈인 ‘관계’를 깨면 안 된다.

물론 세속적 가치관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은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가족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냐?’

그래서 돈 때문에 그 관계를 단절해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가 적어도 돈에 의해 지배를 당할 수는 없잖아요?

그보다는 더 중요한 어떤 가치를 붙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사람끼리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 - 이 얼마나 중요한 관계 입니까!

‘이 관계를 깰 수 없다!’ -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하겠지요.


▲믿지 않는 사람도 거기에 있어서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창13:7


지금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다투고 있습니다. “서로 다투고”

그런데 7절의 하반부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했다.”

이 말을 왜 기록했겠어요?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을 믿는데,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갈등할 때,

거기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있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거기에 있어서 보고 있었다, 이 말이죠.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투고 갈등할 때

우리들의 행동을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쉽게 다투지 못할 것입니다.


▲주제 반복

갈등이 올 때 저와 여러분이 이런 더 커다란 이슈를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전도와 세계복음화 입니다.


이것이 갈등을 푸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2.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라


▲시시비비 가리는 것은 - 종종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분, 현실적인 대안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비현실적인 대안이 되겠지요. 그럼 비현실적인 대안이란 무엇 입니까?

본문의 아브라함의 케이스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를 꼬치꼬치 따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 갈등이 해결 됩니까?

별로 도움이 안 되면서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한 판사님의 에세이집을 읽어 본 일이 있었는데

이 분이 자기의 일생의 법조인 생활을 회고하면서

자기가 판결을 내린 많은 판결들, 그 중에 절반 이상,

(그 분이 정확하게 이런 말을 썼습니다.)

거의 3분의 2정도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주관적으로 옳을 수 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문제들,

대부분 그런 것을 가지고 판결을 요청 할 때

그는 얼마나 많은 딜레마 속에서

자기의 법조인 생활을 계속 해 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일생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문제들.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사건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문제들이 훨씬 더 많아요.

명백하게 옳고 그른 것으로 나눌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말입니다.


▲각자 입장에서는 모두 다 옳다.

제가 탈무드을 읽다가 이런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옛날 우리나라 황희 정승을 연상시키는 그런 얘기라서 혼자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 두 사람이 갈등이 생겨서 유대인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케이스를 호소합니다.

그러니까 랍비는, 그러지 말고 한 사람씩 와서 따로 따로 이야기 하라.

그래서 첫 사람이 와서 자기의 문제를 쭉 이야기했어요.

다 듣고 나서 랍비가 “당신 말이 옳소!”


그 다음에 두 번째 청년이 와서 자기 입장에서

그 케이스에 대한 설명을 쭉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 듣고 나서, 이 랍비가 또 “당신 말이 옳소!” 했습니다.


그 얘기를 뒤에서 듣고 있던 랍비의 마누라가

‘아니 두 사람 다 옳다고 하면, 도대체 당신 그게 제대로 된 판단이요?’

그러니까 랍비가 마누라를 바라보면서 “당신 말도 옳소!”


▲evil or less evil

사실 옳고 그름 이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이면서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사실 우리들의 선택은 대부분 옳고 그름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더 많은 경우에 그것은 보다 (큰) 악 과 작은 악 사이에 선택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래서 이것은 선이다, 악이다 하지 말고

보다 적은 악 less evil을 선택해야 할 경우들이 훨씬 더 인생에서는 많다.

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론을 통해서 그는 소위 기독교 현실주의라는 윤리적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이 아니라, evil과 less evil, 큰 악과 작은 악의 문제입니다.


▲less evil을 선택한 아브라함

예를 들어서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피가 터지도록 서로 싸운다.

그거 나쁜 일이죠. - evil

그러나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예 관계를 단절 한다.

관계 단절도 악이에요. - evil


둘 중 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말이지요.

둘 다 나쁜 것인데,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하자.

보다 적은 악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생각해 볼 때,

이렇게 계속 갈등을 지속하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우리가 싸우는 것보다

"우리가 헤어지자!" 이런 제안을 한 것 이예요. - less evil 


▲완전한 관계단절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완전한 결별, 완전한 단절을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한 것으로는 생각 되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13:8


서로 떠나자는 제안을 했지만, 이 문맥을 우리가 살펴보면

이것은 완전한 단절이나 완전한 결별이 아니라

이 갈등을 줄이고 우리 사이의 생산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단은 떠나서 좀 살아보자, 그리고 좋은 관계를 후일에 도모하자.

저는 그랬으리라고 생각을 해요.


▲완전한 관계단절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었던 이유

이 본문이 창세기13장인데, 창세기14장에 보면 롯이 전쟁 포로가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더 좋은 땅을 가졌어요.

아브라함이 화가 날 수도 있었어요.

그렇게 좋은 땅 챙겨 가지고 떠나간 롯,

자기 조카 롯이 전쟁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창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요? 조카 롯을 구출합니다. 여전히 도와줘요.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한 단절은 아니에요.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관계의 단절’ - 이런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계속되는 갈등의 증폭을 막기 위해

잠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떠나서 생산적인 관계를 한 번 도모해 보자.

굉장히 필요한 거예요. 이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란 말입니다. 현실적인 대안!


▲고부간 갈등의 현실적 대안

저는 종종 고부 관계에 대한 상담을 할 때 이렇게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공간 안에서 계속 갈등하면서 그냥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더 경제적인 지출이 있고 손해가 있더라도

좀 따로 살면서,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같이 전도여행을 하다가

두 사람이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마가 요한이라는 청년 때문에.

바울은 아주 단호한 사람입니다. 엄격한 사람이고 목표지향적인 사람이고.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일은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이 사람 데리고 가지 말자. 이것이 바울의 지론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기독교는 바로 이런 사람을 받아주고

이런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기회를 줍시다!


그래서 둘이 싸우게 되었어요. 바울과 바나바. 여러분, 누가 옳습니까?

바나바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대답해 보시죠. 둘 다 옳아요?

그러나 선택한다면 어느 분이 옳은 것 같아요?


바나바적인 사람은 바나바가 옳다고 그럴 것이고

바울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바울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고의 성향과 전망의 차이예요.

이것을 가지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차이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도 현실적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서로 사이좋게 헤어져서 각자 따로 사역하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전제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참 문제예요. 심리학자 해리슨이 쓴 책 가운데 유명한

I'm OK You're OK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도 옳고 당신도 옳을 수가 있다. - 이건 건강한 사람 이예요.

반대로 나도 틀릴 수 있고 당신도 틀릴 수 있다. - 이것도 건강한 사람 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I'm OK You're not OK.

나는 OK 인데 네가 틀렸다. 네가 틀렸다.

항상 자기가 정의예요. 자기가 정의의 잣대, 다른 사람은 항상 불의한 거예요.

단순한 방법론의 차이, 주관적 해석의 전망의 차이를 가지고

자기는 정의예요, 다른 사람은 항상 불의예요.

항상 정의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 공격하는

항상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정의를 외침 보다는, 건강한 대안을 모색하라!

정신의학계에서는 이런 사람을 환자라고 봅니다. 이거 병입니다. 치료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으면,

자신도 불행하고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 들이예요.


우리는 누구나 다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틀릴 수가 있어요.

나도 잘못 할 수가 있고, 당신도 잘못할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건강한 대안을 함께 현실적으로 모색할 줄 알아야 돼요.


‘나는 정의고 당신은 불의요!’ 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더 좋은 의견을 찾아보십시다!’

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줄 아는 사람들,

이것이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의 케이스 속에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셔서

참 갈등 많은 인생의 현장에서 이런 현실적 대안을 찾아갈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음에 근거한 결단을 내리라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믿음에 근거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을 할 줄 알아야 돼요.


자, 대안만으로 족하지 않고, 이제 어느 한 순간 결단을 내려야 돼요.

그런데 어떻게 결단하느냐?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된다. 믿음의 선택을 해야 된다.

그런데 믿음의 결단은 어떤 것인가요?

본문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선택과 롯의 선택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롯의 선택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13:10~11


아브라함은 먼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측을 선택하겠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니까 롯의 선택은 ‘보이는 것’에 의한 선택이예요. "눈을 들어 바라본즉..."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가 불탈 때, 롯도 같이 망하고 맙니다.


▲아브라함의 선택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 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13:18


헤브론 쪽은 안 좋은 땅 이예요.

헤브론에 가면 지금도 아브라함의 성지가 거기에 준비되어 있고

성지순례 하는 사람들이 찾게 됩니다. 아주 안 좋은 땅 이예요. 지금도 안 좋아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곳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헤브론을 선택하고 나서, 거기다 장막을 짓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록 안 좋은 땅이지만

제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이상 여기가 하나님 주신 땅으로 믿습니다.

여기서 살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택이예요.


▲믿음으로 선택하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5:7


오늘 나에게 무슨 선택의 갈림길이 있습니까?

나는 ‘보이는 것’으로 선택할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선택할 것입니까?


▲십자가는 최후의 승리

인생의 장에서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봐도 갈등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갈수록

주님의 생애 가운데 더 많은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의 갈등, 백성의 장로들과의 갈등,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자 예수님의 입지가 자꾸만 좁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들과 싸우지 않아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 이들을 대결 할 수 있는 어떤 전략을 구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어요. 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만히 있어요. 그냥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세요.

그리고 매달리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자들을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원한다면 그는 십자가를 부술 수 있는 힘이 있었어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저는 늘 만화 같은 상상을 하는데

십자가에 딱 매달려 계시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딱 십자가를 비틀고

이단 옆차기로 로마 병정들을 그냥 작살을 내버렸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그냥 십자가에 매달리셨어요.

무력하게 그냥 당하시고, 죽으시고, 용서하시고

그런데 바로 그 분이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인류의 구세주요, 주님이 되셨다 말이죠.


오늘도 갈등의 현장에서 최후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은

주님처럼,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선택해야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이동원 목사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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