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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LNCK 2007. 12. 3. 21:23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행7:54~60             *출처 :이중표 목사님 설교

 

▲사역의 본질

헨리 나우웬은 “목회 사역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스데반 같은 교인들이 많은 곳이...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행1:8절의 ‘증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행1:8절은 땅 끝까지 가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 스데반

스데반은 감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 심금을 울려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스데반은 짧게 살았으나 굵고 크게 산 자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까지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죽었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증인’이 ‘증인’을 만들어낸다.

사도 바울이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있었다”(행22:20)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도 바울은 땅끝까지 증인으로 이어가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 바울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신앙이 바울 사역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스데반에 있었던 가능성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대교회 큰 타격이었으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중대한 섭리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령과 은혜가 충만했는지, 그에게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충만하였는지 입을 열면 그의 설교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랑이 넘치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은 구제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손을 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죽었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죽을 때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어떻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늘을 우러러 보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본 스데반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행7:51-53)

이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신 예수님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예수님께 배웠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가 있을 때 예수님이 5병2어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막6:41).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요11:41).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락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모습을 닮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세는 닮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배워야 합니다.



◑2. 스데반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 신앙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7장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능력을 빌려서 피난처를 얻고, 보호를 받기를 원합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긍휼과 자비를 받기 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내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인 소원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나 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 때

“주님, 도와주소서. 저 원수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하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죽어도 좋사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자는 가난해도 영광이 나타납니다.

실패해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 영광은 성공이나 부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신앙을 예수님의 삶에서 배웠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셨던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이 고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실패 가운데 최고의 실패는 ‘사는 목적’의 실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3. 스데반의 ‘인자’ 신학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6)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인자 son of man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막10: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인자란 (구약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메시아이지만)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평범한 사람, 섬기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과 동시에 인자를 보았습니다. 행7:56


인자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였습니다.

죽으러 온 예수는 희생하며 산 예수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믿었고, 인자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집사 스데반이 보여주었던 사랑과 봉사는, 인자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닮게 했습니다.



◑4. 그가 가졌던 원수를 사랑하는 신앙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서 스데반과 같이 불멸의 웃음을 지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그리고 괴롭히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마지막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환희를 가지고 죽어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죽으면서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별세의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게 증거한 증인(순교자)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고 죽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원수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성령이 충만하고 스데반은

입을 열고 저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원수 사랑은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은 원수 사랑 입니다.

구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랑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해하고 죽이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맹의순 선생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맹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은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한신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 만 명의 포로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은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사상적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기도를 그는 실천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는 저희 한신대학교 선배로 위대한 생을 살다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이름, 면류관


스데반은 참으로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 자체가 ‘스테파노스’(στεφανος)는

헬라어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으로 영광의 상징이며 충성된 자나 사랑하는 자가 받는

영광의 상징입니다. 면류관은 ‘자랑스럽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요, 자랑스러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어디에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스데반이요, 면류관입니다.

사회나 직장이나 교회 어느 곳이든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그 모임의 자랑이며 면류관입니다.


오늘 이 교회에서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스데반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스데반이 되어야 됩니다.

스데반 목사, 스데반 장로, 스데반 권사와 집사, 스데반 성가대, 스데반 구역장,

스데반 성도가 되십시오. 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오, 스데반아! 어서 오라”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감고 스데반과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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