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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1009 이단인가, 다양성인가?

LNCK 2007. 12. 10. 22:15

◈이단인가, 다양성인가?            엡4:1~6                   편집자글



어려운 주제입니다만, 유익하다면 나누어야 하겠지요.

독자 여러분은 아래 내용에 꼭 동의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의견으로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이단으로 편 가르지 맙시다.

제(편집자)가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어떤 좋은 칼럼을 웹문서에서 발견하고,

내용이 좋아서, 제 블로그에 퍼다 실었습니다.

(소나무 옮겨 심고, 결혼 주례 때 아버지와 형의 입장 차이가 다르다는 "예화" 2개)

그런데 몇 달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시중에서 ‘이단’으로 분류되는

박 아무 분의 칼럼이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그런 이유로

제 블로그가 ‘이단과 교류한다. 이단의 끄나풀이다.’는 식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려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저는 ‘그 칼럼을 제 사이트에서 삭제해 버릴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삭제하지 않고 계속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혹자가 이단에 속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최선을 다해서, 그가 이단을 버리고 돌이키도록 권고해야지

누가 이단적이라고, 그 날로 단절해 버리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누가 이단에 속한 것으로 알려지면, 그날로 그와 단절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혹시 불똥이 자기에게 튀어서, 자기까지 이단으로 몰릴까봐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바리새화, 경직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구교 종교전쟁의 참화, 유럽역사

유럽은 신교와 구교 간에 처절한 종교전쟁의 역사가 오래도록 있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리 문제, 구원과 관련된 문제’ 라기 보다는

정치적 문제, 세력 다툼, 보복의 악순환 등이 그 주요 이유였습니다.


그 골치 아픈 이야기를 제가 꺼내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과거와 똑같이 정치적 문제로, (사실은) 세력다툼의 문제로,

또는 신학적 편협성 때문에

천국에서 서로 같이 만날 형제를,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따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죽을 때까지 이단이었고,

요한 웨슬리도 이단이었으며,

찰스 스펄전도 자기 시대에 가장 논란이 많았으며,

오순절 운동도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50년 동안 이단취급 당했습니다.


약 30년 전에 한국에서, 워치만 니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많은 보배로운 교훈과 진리들을

일반 사람들이 배울 수 없도록

어떤 사람들이 열심히 가로 막았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그러다가 많은 분들이 성공주의로 나갔습니다. 

그때 워치만 니의 사상의 핵심을 잘 배웠더라면, 그러지 않았을터인데요...)  


어떤 분에게 만약 어떤 틀린 점이 있으면,

그런 점들을 시정하고, 고치도록 선도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를 이루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유화적으로 나갔다간, 자기도 덩달아 이단으로 지목되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옥죄어 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힘은 ‘다양성’에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다양하지만 하나 unity in diversity>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강합니다.

세계 온갖 나라 사람들이 이민 와서, 서로 연합해서 세계 최강대국을 만들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늘도 한국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많은 다양성들이

어쩌면 ‘이단’의 올가미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다양하게 나가면... 이단 심사에 들어갑니다.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고,

성경의 계시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등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

지엽적인 성경 해석상의 문제, 신학적 견해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미국처럼 힘이 있게 됩니다.


그런 다양성이 다 상실되면... 밋밋해서 모두 함께 몰락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성장 동력을 회복하려면

그런 ‘다양성’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합니다.

요즘도 ‘가정교회 운동, 다양한 흐름의 영성운동’ 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것은 좋지만,

교회의 새로운 성장 동력까지 잘라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통 - 극단 - 이단 (이 단락 과거에 쓴 글)

말이 나온 김에, 외국에서는 정통 - 극단 - 이단 등 3구분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정통 - 이단 등 2구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단(heresy)은 무서운 말로서, 가급적 상대방에게 쓰지 않는 것이

예의고 기본입니다. 이단은 반드시 지옥에 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믿는 신앙과 좀 다른 행태를 보이면, 이단 대신,

극단(extreme) 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비록 나와는 좀 다른 기독교

신앙 행태를 가졌지만,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한국 성도들은, 자기와 조금만 틀리거나 다르면 <이단>이라고

낙인찍었는데, 사실 그것은 성령을 훼방할 위험도 있습니다.

자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정 구분이 필요하면 <극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유연하지 않을까요?

간간히 벌어지는 이단 시비가, 성령의 역사로 유연하게 결론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개신교protestant의 모든 교단들은,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등,

바울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자유스럽게’, ‘유연하게’,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자라왔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단에 속한 자와 인사도 나누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라

는 구절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절대 명제인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몰몬교 선교사라고, 서로 이웃집에 살면서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고, 진리의 사수일까요?


물론 그가 나를 전도해서, 이단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는

단호히 거부하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저 나의 이웃이라면,

우리는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교인도 마찬가지고, 회교신자도, 힌두교인, 무슨 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해외에 가면,

아직도 가톨릭과 개신교인 사이에 이웃간 감정이 격한 곳이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서로 교단 갈등으로 으르렁거릴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실은 권력 문제, 경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용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보스니아 사태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이지리아 등)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나가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동구라파와 러시아권은 동방정교를 믿습니다.

유럽과 남미는 대부분 가톨릭입니다.

어떤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는, 정교회나 가톨릭 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한국 선교사를 이단이나 분파sect로 봅니다.)

아마 서로가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 개인적 관점은 이렇습니다.

정교회 안에도 알곡 신자와 가라지 신자가 있습니다.

가톨릭 안에도 알곡 신자와 가라지 신자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안에도 알곡 신자와 가라지 신자가 있습니다.


그가 알곡이냐, 가라지냐 하는 것은(천국 가느냐, 못 가느냐)

그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 때문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그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저는 가톨릭교회 안에도 ‘남은 자, 7천명’이 있다고 봅니다.

정교회 안에도 ‘남은 자, 7천명’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항상 그렇게 역사(役事)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기독교파를 전도한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예수님-바울-어거스틴-루터와 칼빈-휫필드와 에드워즈-

오늘날의 개혁주의로 이어지는 신학노선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내 편과 그 외 나머지’로 편 가르기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그룹 안에서도, 다양하게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렇게 다양성을 받아들일 때,

거기에 미국과 같은 놀라운 시너지 파워가 나올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파워도 '다양성의 인정'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가 강력했던 이유도,

헬라파 유대인을 받아들인 다양성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21세기는 새로운 밀레니엄이요, 인터넷보급과 세계화 등으로

세상은 놀랍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다가는,

게걸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다    에베소서 4:1~6


*출처 : http://blog.naver.com/jjkkhh2232/50024971079

 

저는 신학적으로는, 교회연합운동에 포함된 일부 자유주의적 성향과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예수 안에 한 형제로서 연합하자는, 교회연합운동의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서로 신앙적 신념이 다양하지만, 서로 연합할 수 있다고 봅니다. <편집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에베소서 4:1-6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두 회의를 연이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 이사회와

세계기독교지도자회의(Global Christian Forum)이었습니다.

이번 ‘세계기독교지도자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파와 교단과 교회가

다 모인 첫 회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통 로마가톨릭이 모이는 자리에 신교가 옵션으로 참석한다든지,

반대로 신교가 모이는 곳에 가톨릭이 옵션으로 참석해왔는데

이번 회의는 모두가 모인 참 의미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번 모임의 조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오라.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임을 믿는 사람들은 다 같이 모이자”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정교회(Orthodox Church), 즉 러시아정교회, 시리아정교회, 이집트정교회,

그리고 성공회(Anglican Church), 개신교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오순절 교회까지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기독교가 처한 공통적 도전에 대해 연구, 토론하는 열린 모임이었습니다.

중심 주제는 요한복음 17장 21절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세상이 어떻게 아나?

제자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젊은 남녀도 쪼개집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다녀온 1주일 사이에 한나라당이 대통령 후보를 놓고 갈라져 야단이 났더군요.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두 쪽, 세 쪽으로 분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갈라지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화해시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고,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고,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통일 운동이 하나님의 운동입니다.

사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교단과 교파가 달라도 모두 하나님이 불러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목사가 부른 것도, 신학교가 부른 것도, 교단이 부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이끌어주지 않으면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하나님께로 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성령을 고백하고

이 자리에 오신 것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톨릭교회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저는 제가 쓴 “속 시원한 상담”(김상복 목사님 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신교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정교회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음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할렐루야 교회에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세계기독교지도자회의’에서는 참석자들을 30명씩 여러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룹별 활동은 30명이 4-5분 동안 어떻게 예수를 만나 여기까지 왔는지 간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핀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 올란도 퀘스트 신부는 35년 동안 신부로, 대학총장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이 너무 메말라 아무런 감동도 감격도 없고 오히려 의심으로 가득 찬 교리적,

지성적 믿음이었습니다. 늘 갈등이 많던 중 어느 날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상징하는 떡을 받아 입에 넣을 때, 갑자기 그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자기를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35년 만에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나를 위해 흘리고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살인 것을

깨닫고 이 살과 이 피를 마심으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은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

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전까지의 신앙은 머리 신앙, 교리 신앙이었습니다.

그날 성찬식을 통해서 내 신앙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박힌 가슴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성찬예식에 참석할 때마다 감격하고 눈물이 흐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생겼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신앙도 머리 신앙이라면 성령님께서 이 시간에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셔서

가슴의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그 분은 가톨릭인데 어쩌면 나와 똑같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필리핀에서 부르셨고 저는 서울에서 부르셨습니다.

장소가 다르고 방법도 다르고 시간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불러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 삼기를 원하십니다.


짐바브웨에서 오신 에파라는 장로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1990년에 어머니가 암에 걸렸는데 의사들이 포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온 아들은 어머니 몸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의사들은 어머니를 포기했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전능자요

초자연적 능력자인 당신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를 고쳐주시옵소서.”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 후 ‘아멘’ 하고 나니 어머니가 일어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한 그날부터 자기 인생이 달라졌답니다. 삶이 완전히 바뀌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진심으로 가슴에 와 닿는 신앙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클로즈 바띠 목사님은 프랑스 개신교연합회 회장입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던 이 분은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신앙이 성장해서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고

기뻐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는 이렇게 예수 믿는 부모 밑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체험하고 헌신해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부모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갑자기 대단한 기적을 본 것도 아니고, 큰 위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정서적으로 울컥 한 것도

아니지만 조용히 차근차근 갔으나 결과는 똑같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대대손손 수천 대까지 여러분의 가문에 축복이 되길 바랍니다. 헌신하십시오.


힌두교를 믿던 어느 분은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나

지금은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자기는 목사가 되어 인도의 대표로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간증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언어와 얼굴색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지만 모두 예수를 체험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차림새는 모두 달랐습니다.

금목걸이에 모자를 멋지게 쓰고 거창한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사람,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온 목사도 있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성향과 문화는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향해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부르시는 손길을 바라보고 주님께 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적인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본문 2절에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해야 하나가 됩니다.

교만하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교만이라는 병이 든 사람은, 다른 사람은

다 알아도 자기만 그 병에 든 줄을 모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요, 한국의 중심은 나다!” 이렇게 교만합니다. 그러면 갈라지고 깨지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나의 수고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축복과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리면서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만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온유하고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처럼 다 깨닫지 못하고 미성숙한 사람이 있더라도 조금 참아 주세요.

여러분도 처음 믿을 때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조금만 참아주고, 조금만 안아주고, 조금만 귀 기울여주고, 조금만 인내해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삶에도 역사하실 겁니다.

 

제가 옛날에 미국에 있을 때 어느 분이 색다른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더군요.

P, B, G, F 등 알파벳을 잔득 모아서 가슴에 달았어요. 제가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배지입니까?” “이 글자에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 P는 please, B는 be, G는 God 등으로,

“Please be patient with me. Because God is not finished with me!”

(저를 조금만 참아 주세요. 하나님도 아직 저를 완성시키지 않으셨거든요).


이처럼 조금만 인내하고 받아주고 도와주면 그도 여러분처럼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내하면 하나가 될 수 있으나 비판하고 책망하고 참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인내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한 번만 참아도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참고 인내하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질들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사역에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

즉,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하나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교양과 학력, 성격, 배경이 다 다른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믿도록 이끄시고 부르셔서

우리가 주님께 우리 인생을 바친 그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희를 이미 하나로 만들어주셨다. 그러니 너희가 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한 말씀을

분석해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역사입니다.

하나 된 것을 지켜가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요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들어 하나 되는 일에 사용하여 주옵소서. 내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시고

사랑을 베풀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내가 깨뜨리지 않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4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5,6절).

소속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교단과 종파에 속해있고,

까만 모자를 쓰거나 보라색 가운을 입거나 다양한 모습이지만 소속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와 다른 모습, 다른 면을 보고 그것을 싫어합니다.

 

“뭐 저런 것을 입고 다녀! 대단한 것도 아니구만!” 비록 겉모습과 문화는 달라도 하나인 것,

공통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소속이 다르다 할지라도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기독교가 분열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분열된 것이 아닙니다.

연세대학이 있고, 고려대학이 있고, 서울대학이 있다고 대학이 분열된 것입니까?

다른 집에 살 따름이지요. 우리가 성령으로 예수 믿을 때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 분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요, 역사하시는 성령이 한 분이십니다.


“믿음도 하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국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입니다. “한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운을 입고,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든지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두 천국에 함께 갈 것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세례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물을 뿌리거나, 물을 붓거나, 사람을 물속에 집어넣기도 합니다.

한 번 넣기도 하고 세 번 넣기도 합니다. 앞으로 넣기도 하고, 거꾸로 넣기도 합니다.

이처럼 방법은 달라도 그것은 모두 성부, 성자, 성령으로 받은 한 세례입니다.

침례교에서는 장로교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지 않은 곳이 더러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주라고 했으니 물로 세례를 받으면 되는 것이지 꼭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까?

장로교는 침례교의 세례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자꾸 다른 것만을 보면 끝없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하나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믿음과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다 하나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인데도 이번 회의 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자꾸 하나 되자 하지 말고 하나 된 것을 인정하자” 그랬더니

어느 분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입니까?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왜 하나가 아닙니까?” “나는 루터교 목사인데

우리는 성찬예식이 하나가 아닙니다.” “왜?” “성찬예식을 나누지 않습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루터교와 다른 교가 다릅니다.”

“그건 당신들의 문제지 우리는 다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찢으신 몸과 피를 나누지 않습니까?

가톨릭은 가톨릭대로, 루터교는 루터교대로 교회마다, 교단마다 성찬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입니다.” 그분이 다시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사회자가 “그만 합시다”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말씀 잘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라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 되자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하나군요”라고 했습니다.


이제 어느 교단과 교회의 사람을 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 것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존경하며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김상복 목사님 설교문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