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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1012 「온전한 회개」

LNCK 2007. 12. 12. 15:36

 

◈「온전한 회개」                           시51:1~19


이병용 지음, 요단/2001/320쪽



*출처 : http://blog.naver.com/kaikk/70021477497

 

 

▣저자 이병용 박사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우스웨스턴 벱티스트 신학대학원, 베일러대학교를 거쳐

골든게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했다.

구약의 시편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십 수 년을 시편 연구에 매진해온

50대의 성경학자인 저자의 글은 특히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형형한 통찰력과 단아한 영성이 어우러져

쉬우면서도 순도 높은 성경풀이의 도저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현재는 그는 캘리포니아 주 유니온 시티에 거주하면서

시편과 관련된 저술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시51:1절. 은총이 죄를 앞선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에 따라 나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당신의 한없이 불쌍히 여기심에 따라 내 반역죄를 지워 주소서.  시51:1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첫마디가 이 회개 시편에 무늬를 새기고 가락을 고른다.

죄를 고백하고 나서 용서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시편 시인은 죄의 내역을 아뢰기도 전에 은총, 한결같은 사랑,

불쌍히 여기심을 외치니 용서를 먼저 구한 셈이다.

은총이 커서 죄를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천국 현실이 엿보인다.


내 죄는 하나님 은총으로만 해결 받아야 한다는 다급한 현실감각이다.

그래서 시인은 첫마디로 하나님께 은총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에게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깨달음이 시인 마음에 왔다.


죄를 처벌하기에 앞서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성향에서

시편 시인은 제 살 길을 찾는다.

그런데 어찌 은총을 심판, 처벌과 함께 내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먼저 죄에 따른 심판, 처벌을 거두시고 은총을 내리신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을 말하는 잦기만큼

하나님의 진노를 말한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시면서

진노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진노와 헤세드 사랑을 함께 말할 때

진노 다음에 헤세드 사랑이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시편 시인은 “야훼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이 풍부하시도다.”(시103:8)하고 하나님을 송축한다.

이러한 표현 양식에 무슨 속뜻이 담겼을까?


‘진노+헤세드 사랑’으로 굳어진 차례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1:5)라는

저녁과 아침에 벌어지는 일들의 전개와 기본 구조를 같이한다.


“네가 이제 아픔을 겪지만 네 삶을 헤세드 사랑으로 마무리해주마.”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렇게 틀에 박힌 차례에서 진하게 스며 나온다.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며 끝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은 영원하고 끝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는 은총을 누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은총의 본질이 속속들이

밝혀진다. 오로지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 은혜로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은 나를 보실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보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생명의 환경이고 모든 것이다.

하나님이 ‘맨-나’를 따로 보신다면 은총받을 만한 근거,

구원받을 만한 아무것도 찾아보실 수 없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은총과 불쌍히 여기심에 자신을 맡기며

기도한다. 자신의 것에서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겠다는 믿음이 부르짖음을 타고 하나님께 오른다.

은혜는 내 힘으로 얻어내거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주권에 따른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2:8)

하는 말씀은 신약의 핵심사상을 간추린다.

시편 51편은 첫머리에서 이 신약의 핵심사상을 들려준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는 죄상을 지워버리시는 일이 철저한 만큼 철저하다.

하나님이 지워버리신 내 죄 기록부를 아무도 회수할 길이 없다.

하나님이 손수 지워버리셨기 때문에 내 죄 기록부는 하나님 앞에도 없고,

내 앞에도 없으므로 어느 누구 앞에도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워버리신 다른 사람의 죄를 본래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 하지 말라.

그것을 들춰내지도 말고 거론하지도 말라.



◑2절, 빨래하시는 하나님   


남김없이 내 죄악에서 나를 씻기시고 내 죄에서 나를 깨끗이 하소서.  시51:2


이스라엘 백성은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맞기 위해

먼저 자기들 옷을 빨아 입어야 했다.

더럼이 묻어 부정한 옷을 걸치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람 자체가 더럼으로 부정해졌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나는 죄 때로 부정한 상태에 빠진 나 자신을

빨래하듯 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나 스스로 이 일을 해 낼 수 없는 데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빨랫감이 어찌 자신을 스스로 빨 수 있는가? 빨래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시편 시인은 이런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께 그렇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죄 때로 속속들이 더러워진 빨랫감 사람이 하나님을 빨래하시는 분으로 본다.



◑3절,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까지 내 앞을 떠나가지 않는 죄 


참으로 내 반역죄를 내가 아오니 내 죄가 언제나 내 앞에 있나이다. 시51:3


내 죄가 언제나 내 앞에 있다니 내 과거가 바로 내 앞에서 펼쳐진다.

지난날의 내 죄가 남김없이 모여들어 내 현실을 차지한다.

이미 지나간 때는 지나간 때고,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련만

그때가 내 오늘을 간섭하고, 그때 일이 지금의 나를 지배한다.


내가 내 죄에서 잠깐 동안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죄를 인격체처럼 취급하는 성경에 따르면

죄는 밤낮으로 나를 따라붙고 나와 맞선다.

어느 곳에 숨든지, 아무 데를 가든지,

내 죄는 언제나 내 앞에 있어 피할 길 없는 내 현실이 된다.

그리하여 내 죄가 내 삶의 공간을 접수하고 만다.



시편 시인은 자기 죄를 믿음 공동체 앞이나, 제단 앞이나,

인류 앞에 던질 수 있었다.

자신은 공동체 안에서 눈에 뜨이지 않게 섞여버릴 수 있었다.

인류를 통튼 죄악 안에서 자기 죄의 심각성을 희석할 수 있었다.


또는 부지중에 지은 죄라고 우기면서

자기 죄를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희생 제물의 연기로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기 죄를 아무 앞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다. 내가 내 죄를 진지하게 다룬다면

딴 곳이나 딴 사람에게 관심을 돌릴 겨를이 없을 것이다.



◑4절, 범죄 - 사람에게냐, 하나님에게냐?    


당신께, 오직 당신께만 내가 죄를 지었고 당신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나이다.

그러므로 유죄를 선고하실 때 당신은 의로우시고 심판하실 때 당신은 완전하십니다. 

시51:4


하나님께 향하여 “당신께, 오직 당신께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하는 고백은

“당신이 귀하게 창조하신 것을 망쳐 놓았고,

당신이 세워 놓으신 질서를 파괴하였으므로 내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고백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었지만, 내 죄가 만나는 맨 마지막

상대는 그 사람의 창조주이자 절대 주권주인 하나님이시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깨닫고 나서

“당신께, 오직 당신께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느낀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기회를 얻는다.


시인은 하나님이 바로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르며 대화상대로 삼지 않는가?

하나님과 맺었던 관계가 내 죄 때문에 끊겼는데

다시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를 수 있게 되다니 기적이다.

하나님이 죄인인 나에게 나타나 주심은 그 자체가 은혜다.



시편 시인은 자기 죄를 축소하는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그냥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 감정에만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놀랍게도, 자기 죄를 근원까지 드러내고

그 죄를 처벌하시는 하나님을 옳다고 말한다. 스스로 심판 안으로 자신을 던진다.



◑5절, 속속들이 죄로 채워진 사람


정말로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으며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서 나를 뱄나이다. 51:5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타고난 흠을 들춘다.

사람이면 어느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갖추고 태어난다는 선천성 죄의 생득설에서

자신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태어나면서, 아니, 잉태의 순간부터 죄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

철저한 자기 본성 파악이다.


시인은 죄로 기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성향을 참고하시라고

하나님께 일깨워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기에 맞춰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생명이 시작하는 잉태의 순간부터 죄인인 사람에게

영혼 가장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죄인인 내게

수양이나 개선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 근본 문제는 근본 해결책을 부른다.

새롭게 창조 받아야 하는 필요성이 바닥에 깔린다.



죄 가운데서 애를 밴다니 태아가 세포 분열할 때부터 죄가 기승을 부리는 셈이다.

이렇게 바탕이 박힌 사람은 죄가 지배하는 울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니 절망이다. 벽 앞에서 길이 막힌 꼴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 능력이 끝나 버리는 바로 거기에서 권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신다.

다시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권능으로 적극 개입하셔야 내 살 길이 열린다.

목숨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려면 정결한 마음을 창조 받아야 한다는

성령의 일러두심이 시편 시인에게 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점을 ‘거듭나기’, ‘위로부터 나기’(요3:3)로 나타내신다.

죄에서 구원받기를 내 안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내 죄에 내 해결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해결책이 있을 뿐이다.



◑6절, 진리 처방, 지혜 처방


정말로 당신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진리를 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일에서 나에게 지혜를 가르치십니다.  51:6 히브리 성경 직역인 듯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당신은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당신을 기다리나이다.”(시25:5)라는

시편 시인의 고백에서 진리와 구원이 짝을 지어

어떠한 속성의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보여준다.


진리의 하나님이 진리로 나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진실이 나타나는 거기에 구원이 함께 나타난다.

“진리의 하나님 야훼시여, 당신은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31:5),

그리고 “내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나이다.”하고

시편 시인이 하나님께 고백하는 바대로

하나님 진리가 구원받은 새로운 내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야훼시여, 당신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렘5:3)

하고 하나님께 아뢴다.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눈은 사람 속에 진리,

진실이 있는지 보고자 하신다.


한편 시편 40편에서 시인은 “내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 뜻을 실천하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의 가르침이 내 속에 있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가르침 곧 진리를 내 안에 간직한다는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 내 속에서 진리를 원하시고,

나는 하나님 뜻을 실천에 옮기기를 원한다.

진리를 연결고리로 하여,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과 내가 소원하는 것이

꼭 맞아떨어진다.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어 있는가?



지혜의 원천은 ‘지혜로 세계를 세우신’(렘10:12)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자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지혜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다. 잠언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지혜가 따로 없음을 분명히 말해둔다.


시편 51편에서 시인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하는

말씀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죄를 짓다가

죽음의 그물에 걸린 자신을 발견한다.

지혜 없는 삶은 죽음의 그물에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지혜를 주시는 분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



뒤틀린 나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은 진리와 지혜를 내세워 나타나신다.

내 힘이나 공동체의 힘으로 내 죄를 뿌리 뽑을 길이 없다.

하나님 권능이 덮쳐야 그 일이 가능하다.

그 방편의 하나로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가르치신다.


성경은 죄를 어리석음으로 치기도 한다.

어리석음인 죄를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지혜 처방이 필요하리라.

자신의 죄와 뿌리 내린 죄의 성향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가능하다.



◑7절, 우슬초 회개


우슬초로 나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깨끗하게 되리이다.

나를 씻겨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51:7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우슬초를

첫 유월절에 문인방과 문설주에 양 피를 뿌리는 도구로 썼을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를 정결하다고 선언하는 의식에서도 사용하였다.

제사장은 새 피를 우슬초에 찍어 나병에서 나은 사람에게 뿌리고

“너는 정결하다.”고 선언했다.


시편 시인은 제사장이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에서 우슬초를 사용하듯

나병환자와 같은 죄인인 자신을 정결케 하는 일에

우슬초를 사용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대담하고 솔직한 이 고백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과 맞먹는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을 뵙되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정결한 상태에서 뵙고자 한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그러한 정결 상태로 만드실 것으로 믿는다.

나를 씻기시고, 눈보다 더 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이 청원은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8절, 뼛속의 아픔이 뼛속의 기쁨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내게 들려주소서. 당신이 꺾으신 뼈들이 기뻐하며 외치게 하소서.

51:8


죄를 용서받는 일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한 관계에 들어간다.

이 화목관계에 즐거움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사도 바울은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하고 선언한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천사들과 믿음의 공동체의 기쁨, 즐거움이 화답한다.

회개는 눈물 흘리는 단계에서 그치기 쉽다.

그러나 회개는 기쁨, 즐거움의 단계로 이어져야 한다.



뼈가 꺾인 사람은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길로 걸어가지 못해 헤매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죄 가운데 버려두심과 뼈를 꺾으심이라는 표현은

죄인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방황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삶이다.

심판 날이 닥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욜2:12

고 회개를 다그치신다. 하나님은 내 회개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이 죄를 지우시고 더럼을 씻기실 때는 죄값, 죄과도 함께 지우신다.

‘꺾인 뼈’는 죄값, 죄과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실 때

죄 때문에 꺾으신 뼈들을 맞추고 고치는 은총도 함께 내리신다.


죄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되는 것은 죄때를 씻음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죄의 처벌에서도 풀려나는 것을 뜻한다.

시편 시인은 자기 뼈를 꺾으신 분을 기뻐하며 외치고,

그 뼈들을 다시 맞춰 고쳐주시는 분을 기뻐하며 외친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게 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꺾이고 부서진 내 뼈들을 온전하게 고치신다.

“사망아, 네가 쏘는 곳이 어디 있느냐?”하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는 바울처럼

시인과 나는 죽음의 독침에서 벗어나는 은총을 체험한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인데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 대하여

죽음은 그 쏘는 것을 잃는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는 외침은

‘꺾인 뼈’들이 기뻐하며 외치는 소리다.



◑9절, 죄와 죄값을 아울러 지우시는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내 죄에서 숨기시고 내 모든 죄과를 지워 주소서. 51:9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 깨어지고 낮아진 심령과 함께하나니.

이는 낮아진 심령을 소생시키며 부서진 사람의 마음을 되살리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쓰신 시다. 높고 거룩한 곳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

내 삶의 현장, 낮고 거룩하지 못한 곳에 나타나셔서 함께해 주시다니

엄청난 은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과 맺으시는 친밀한 관계나 관계 회복은

“하나님이 아무개에게서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신다.”하는 글월로 나타낸다.

시69:17, 102:2, 22:24등


이 문맥에서 그 사람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과 밀착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나 가리지 않고 죄 있는 사람에게

자기 얼굴을 나타내지 아니하신다.

“너희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숨기게 했다.”는 말씀처럼

오히려 자기 얼굴을 숨기신다.  신31:18. 사64:7 등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회개하는 사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을 베푸신다.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사람에게서 얼굴을 숨기신다는 글귀는

구약성경에 자주 보이는 언어 구사다.

“하나님이 아무개에게서 얼굴을 숨기신다.”는 표현은

죄로 말미암은 관계 단절을 뜻하지만

“하나님이 아무개의 죄로부터 얼굴을 숨기신다.”는 표현은

오히려 정반대로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것을 뜻한다.


시편 시인은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보시라고 다 펼쳐 놓고는 하나님한테

그 죄로부터 얼굴을 돌려 달라고 부르짖는다.

1절에서 “내 반역죄를 지워 주소서.”,

9절에서 “내 모든 죄과를 지워 주소서.”하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시인은

죄는 물론이고 치러야 할 죄값까지 모조리 지워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내 죄악은 하나님 앞에 놓이고, 내 은밀한 죄까지

하나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므로

내가 내 힘으로 하나님 모르시게 내 죄를 숨길 도리가 없다.

이제는 하나님이 얼굴을 내 죄로부터 돌리시고 내 죄과를 지워주셔야 한다.



◑10절, 새 창조를 살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나에게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안을 굳건한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

51:10


내가 하나님한테서 죄를 용서받고 죄값 문제를 해결 받지만

쉽게 다시 순종하지 아니하며 죄 길을 걷는 위험이 따른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죄에 다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을 길은 없을까?

하나님은 이 고질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나님은 새로 창조하는 정결한 마음과 거기에서 떠나지 아니하는 하나님 영으로

이 문제를 본바탕에서 해결하고자 하신다.

시편 시인과 나는 이리하여 정결한 마음으로 그리고

‘기꺼이 따르는 영’으로 새 삶을 살기 시작한다.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 전혀 새로운 사람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순서이고 계시다.

죄 용서는 그 사람 그대로 둔 채 죄 씻음만을 거론하지 않는다.

죄 용서는 새 마음을 창조 받는 새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죄가 용서받았음을 보여주는 최상의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 창조 받은 정결한 마음일 것이다.

정결한 마음을 창조 받은 사람이 말씀에 따라 정결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영이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내 죄를 없애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적극 개입하셔서 나를 새로 빚으셔야 한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는 일은 태초의 창조만큼 뜻이 깊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출애굽 사건에 맞먹는 큰 사건이다.


내 삶이 새롭게 시작한다. 이제부터 나는 새로운 존재다.

나는 정결한 마음을 창조 받아 그것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하고

굳건한 영, 기꺼이 따르는 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긴밀하게 사귀어야 한다.



죄를 없애버리고 죄값을 지워버리는 것은

회개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그때그때 베푸시는 은총이다.

하나님은 나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은총과 죄과를 지워버리시는 은총을

필요할 때마다 내려주신다.


그러나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는 것과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줄기차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것도 끊임없이 베푸시는

지속성 은총이다.


하나님은 나를 다시 빚고 새롭게 하는 일과 나를 지키는 일에서

손을 놓으려 하지 아니하신다. 나를 새롭게 빚는 일을 줄기차게 해 나가신다.

그때그때 베푸시는 은총과 끊임없이 베푸시는 은총이 짝을 이룬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주시는 은총과 잇대어 주시는 은총으로 내 영혼을 살리고,

새로 빚고, 지키신다.



◑11절, 진노와 은총의 대결


당신 앞에서 나를 내던지지 마시고 나에게서 당신의 거룩하신 영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

51:11



새로 창조 받은 정결한 마음, 새로 빚어진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성령)이

지켜 주시고 주관하셔야 한다. 시편 시인은 한때 정결한 상태에서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성결한 상태에 머물기를 다짐받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내 삶, 내 영을 거룩하게 지키셔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떠나시거나 거룩하신 영을 거두시면

내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끊기고 만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기면 내가 구원의 반대 상태에 떨어진다.

구원의 반대 상태는 죽음과 고통과 멸망이다.



하나님은 “나는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약속하신다. 호11:9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을 내세우고 함께 하실 때, 진노하지 아니하신다.


거룩하신 임재에는 진노를 거두심이 따른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 은총, 불쌍히 여기심, 거룩하심’이

‘공의, 진노, 심판’보다 앞서게 하신다.

그래서 아무나 빌 길을 얻고 용기를 얻는 것이 아닌가?



◑12절, 하나님, 당신께 달라붙게 하소서


당신의 구원의 기쁨을 나로 하여금 되찾게 하시고

‘기꺼이 따르는 영’으로 나를 붙들어 주소서. 51:12



구원의 기쁨은 죄와 더러움 문제를 해결 받은 기쁨이요, 정결하게 된 기쁨이요,

새롭게 창조 받은 기쁨이다. 새 사람이 되어 새 창조를 사는 기쁨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 손상을 입고 자유를 잃었지만

나는 이제 다시 빚어지고 하나님이 나눠주신 하나님의 자유를 간직한다.


나는 이 자유로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삶을 이뤄 나갈 수 있다.

나는 하나님 뜻과 법도를 따르기로 결정을 내린다. 자유로운 의지를 행사한다.

옛사람이 죄를 안 지을 자유를 얻지 못했으나

이제는 기꺼이 따르는 영으로, 하나님 뜻과 법도를 실천할 자유를 얻었다.


이러한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음도 기꺼이 따르는 영으로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은혜다.



‘기꺼이 따르는 영’(성령, 보혜사)으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일은

죄의 용서, 더럼의 제거, 새 마음 창조가 있은 다음 비로소 가능하다.

이 자유의지로 나는 하나님이 나를 빚으실 때

지니신 목적에 적극 따르기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뜻을 따르는 동안에 에덴동산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으나

하나님 뜻을 어겼을 때는 에덴동산에서 누린 자유를 잃고 말았다.

태초의 창조에서 사람이 자 의지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시는 일에서도 다시 한 번 자유의지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은 자유를 위함이라.”하는 말씀에 따라 갈5:1

그리스도 사람은 하나님 뜻에 순종해 하나님의 부림꾼으로 자유를 누린다.

이 자유를 온전히 누리려면 ‘기꺼이 따르는 영’이 나를 지켜야 한다.



◑13절, 회개하는 사람이 회개의 길잡이로


반역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로 돌아오리이다. 51:13



시편 시인은 이제껏 자신에게만 모으던 관심의 초점을

잠깐 다른 사람들에게 돌린다. 나 자신이 바로 서는 것이 귀중한 만큼

믿음 공동체가 바로 서는 것도 귀중하다는 마음가짐이다.


구원받은 사람, 새로 빚어지는 사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 돌아오기, 회개는 하나님의 길을 살아가기다.

하나님께 나아가 긴밀한 관계를 맺기다.


이 ‘돌아온다’나 ‘돌아간다’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 ‘�’은

우리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에게도 쓰인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시되, 중간에서 만나주신다는 말씀이 아닌가?

‘시작이 반’이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순간

이미 반쯤 간 나는 이미 반쯤 와 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중간에서 만나자.”고 내게 이르신다.


회개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을 고행하고, 수양하고, 인격을 갖추고 나서

간신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 회개의 마당에 하나님은 이미 와 계신다.



◑14절, 제구실을 다하는 혀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림의 죄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내 혀가 당신의 의로우심을 기쁨으로 외치리이다. 51:14



시편 시인은 자신에게만 모으던 관심의 초점을 잠깐 다른 사람들에게 돌렸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모은다. ‘전파하는 사람’,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늘 깨어진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언제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지’ 확인해야 한다.


죄와 죄값을 지움 받고, 죄의 더럼을 씻김 받고, 새 마음을 창조 받은 시인이

다시 피흘림의 죄를 들추다니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하는 비장한 각오로

시편 시인과 같은 마음가짐을 드러내 보인다.



왜 시편 시인이 자기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구약성경에 따르면 죽어 마땅한 죄가 살인죄 말고도 우상을 섬긴 죄, 간음죄,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한 죄, 강탈죄, 인륜 파괴죄가 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갈래에 둔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은 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하는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다. 겔18:13



그런데 구약성경은 피로 갚아야 할 죄에 특별한 것 한 가지가 더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하고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임명하시어 죄를 경고하게 하신다.


만약 선지자가 악인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선지자는 그 악인의 죽음을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러나 선지자가 깨우쳐 주었는데도 그 악인이 그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지 아니하면 악인은 죽지만 선지자는 자기 생명을 보존한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시편 시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길을 가르치겠다고

선지자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시인이 반역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면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생명을 얻는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느 사람이고 선지자의 사명을 받는다.

세상 사람에게 멸망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길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 피로 갚아야 할 죄에서 건져냄을 받는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서 혀가 제구실을 톡톡히 해 낸다.



◑15절, 찬양을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당신 찬양을 선포하리이다. 시51:15



죄를 용서받고 새로 빚어지는 시편 시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

찬양을 선포하겠다고 하나님께 아뢴다.

가르침과 찬양 선포는 새 창조를 사는 사람의 몫이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되 흥이 나는 대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찬양하되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입으로 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이 내 입을 열어 주셔야 하고,

부를 찬송의 가사와 멜로디를 내 입에 담아 주셔야 한다.

시편 시인은 이렇게 자기가 읊는 시와 부르는 찬양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임을 분명히 해 둔다.



◑16절, 퇴짜 맞은 특선 제사


당신은 제사를 반기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당신은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51:16



하나님이 제사와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그 번제를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번제를 드리러 온 그 사람에게 진노하신다.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 불과하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아무든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봐야 한다.

번제가 본디 의미를 잃어버리고 한낱 시늉으로 남는다면,

그러한 번제는 차라리 드리지 아니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들다니.

그러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17절)



◑17절, 하나님, 내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기꺼워하시는 제사는 깨어진 영이라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을 하나님이여,

당신은 업신여기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영이 깨어지고 마음이 부서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기꺼워하시는 참 제사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내 본질이 어떠해야 하는지 ‘깬다’(샤바르)와 ‘부순다’(다카)는

두 동사가 보여준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내 굳어진 영을 깰 수 있는가? 없다.

내 교만한 영은 무엇보다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바라는 바다.

이 세상살이에서 내게 자신감을 준다.


내 교만한 영은 바로 내가 아끼는 것이다.

죄는 교만으로 굳어진 내 영을 보호하고 더 굳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주인을 바꾸기 전에는 굳어진 영을 깰 길이 없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고, 엡4:18

마음이 굳어짐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음으로 여긴다.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긴 상태다.

굳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 굳어지면, 그것은 깨야 할 대상이다.

이것이 성경의 논리다.


굳어진 영을 깨려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가 내 새 주인이 되셔야,

굳어진 내 영이 깨질 길이 열린다. 죄의 주인을 섬기다가도,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맞이할 선택권이 내게 주어진다.

이러한 자유 의지가 내게 주어진 것도 하나님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선택하도록 결단하게끔 힘을 주는 분은 성령이시며,

성령의 검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깨어지고 마음이 부서지면

이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이 하는 일을 업신여기실 리가 있겠는가?


내가 주님께 내 영을 맡기는 순간부터 굳어진 영을 깨는 작업이 시작되며

하나님은 깨고 부수시며 나를 더욱 끌어안으신다.

겸허하게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 맡기는 일은 회개의 연장선 위에 놓인다.



◑18절, 나의 하나님, 공동체의 하나님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시온에 은총을 베푸소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워 주소서.

51:18



나를 죄악에서 씻기시고, 정결한 마음을 내 안에 창조해 주시는 하나님은

시온, 예루살렘에도 은총을 베푸신다.

내 하나님, 단독자의 하나님이 동시에 하나님 백성, 믿음 공동체의 하나님이신 것을

시편 시인은 마음에 새긴다.


내가 받은 은혜가 증폭하여 믿음 공동체를 덮는다. 은총의 파급 효과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총이 저절로 믿음 공동체의 은총으로 옮아가지는 않는다.

내가 받은 은총과 믿음 공동체가 받는 은총 사이에 무슨 일이 펼쳐지는가?


사람들에게 하나님 길을 가르치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기,

하나님 찬양을 선포하기가 펼쳐진다. 은총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이다.

시편 시인은 자기가 이런 일들을 할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고, 또 그렇게 한다.

단독자는 자기가 받은 은총이 믿음 공동체로 옮아가는 것을 본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이 깨어진 사람들을 싸매어 주고… 야훼의 기쁘신 뜻의 해를

선포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려 야훼께서 나를 보내셨다.”(사61:1~2)

고, 메시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다룬다.


이사야가 기록한 ‘마음이 깨어짐’은

시편 시인이 기록한 ‘마음이 깨어짐’과 같은 언어 구사다.

애통은 죽은 사람을 애곡하는 데에 쓰는 낱말이다.

누가 죽었는가? 애통하는 사람은 죄로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주검을 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가장 슬피 운다고 한다.

피가 묻어나는 자기 연민이리라.

죄로 죽어 있는 자신을 두고 처절하게 울어 본 사람은

죄로 말미암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도 그렇게 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양쪽을 ‘마음이 깨어짐’과 애통이 한 쪽씩 차지하니

결국 기쁘신 뜻 양쪽에 회개가 매달려 있는 셈이 아닌가?



◑19절, 하나님의 어린 양


그때에 당신은 의로움의 제사와 번제와 고스란히 바치는 제물을 반기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수소들을 당신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51:19



시편 시인은 전통의 제사에 맞서는 깨어짐, 부서짐, 통회 제사를 제시하더니(16절)

다시 전통에 따른 피의 제사로 돌아간다.

하나님한테서 퇴짜 맞은 제사를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폭이 되었다.


이렇게 좀 이상하다 싶게 펼쳐지는 사건에서 성령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희생 제물의 피흘림으로 죄값을 대신 치러야 한다는 하나님의 기본 구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신다. 나 대신 희생 제물이 피를 흘려야 한다.


이 기본 구도가 지켜짐으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하는 선언이 가능하게 되었다. 롬3:25


피의 제사는 시편 51편 전체 문맥에 매끄럽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내 죄값을 대신 치러 주려고

예수가 피를 흘리고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복음에 징검다리를 놓아준다.


수소는 화목제나 속죄제를 비롯한 번제에서

제물로 두루 쓰이는 으뜸가는 희생동물이다.

예수는 내가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서 의로운 제물이므로

나는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된다.



죄의 용서나 새 창조를 청원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자 계시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처럼 제사드릴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다.

시온의 성전과 예루살렘의 성벽을 하나님이 다시 세워 주셔야 제사드릴 수 있다.


이제부터는 내가 마련하여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사를 내가 드리게 된 것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활짝 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의로운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셨다 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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