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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산 소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

LNCK 2007. 12. 14. 12:29
 

◈산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             벧전1:3-7                    설교 스크랩 



▲베드로전서의 배경

A.D. 64년 7월 여름 어느 날 로마의 중심가에는 커다란 화재가 발생 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네로 황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다.

그는 불타는 로마의 도시를 바라보면서,

광적으로 춤을 추면서 시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성난 로마 군중들의 항의가 시작되자

그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크리스천들이 방화의 주범이라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줄줄이 크리스천들이 잡혀서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더러는 십자가형을 당하기도 했고, 더러는 야생동물의 밥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로마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를 찾아갔습니다. 소아시아의 그 암혈,

그 바위 굴속에 들어가 피신해서,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삶을 도모했습니다.


바로 이때 흩어진 이 크리스천 가운데 가장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편지 한 장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 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노니.., 


이 도시들 가운데 보면 갑바도기아 라는 지명이 있죠?

우리는 로마에 방문할 때, 로마의 카타콤 동굴을 보면서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터키의 갑바도기아의 이 암굴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바위 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거기서 바로 그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네로 황제의 추적을 피해서

공동생활을 시작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 때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거기에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 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의 편지는 계속됩니다,



산 소망을 가지라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한 단어는 산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Living hope.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IMF 분위기 속의 연말에, 소망을 갖자!

오늘 우리는 금년에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1997 or 98년경 설교)

참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맞이합니다.

아마도 한해의 마지막 주일 치고, 금년처럼 우울한 주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의 분위기가 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나 요즘은 대화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IMF소식입니다.


베드로는 당시의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처럼

오늘을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문에서 선포합니다.


우리가 <산 소망(생생한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 첫째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3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3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어느 날 그 미국교회 청년들의 연극을 본 일이 있습니다.

연극이 베다니 촌의 나사로를 주제로 하는 연극이었어요.

인상적인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떤 동네 사람이 부활한 나사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었다가 살아보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당신에게 달라진 것이 뭡니까?”


그런데 나사로가 이런 대답을 해요.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라는 것 이 왜 생기냐면, 사후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까?

사람에겐, 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러나 다시 산 나사로에게 두려움이 없었어요.

 

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우리 안에 오셨어요.

무엇보다도 달라져야 할 것은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극복하는 소망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산 소망의 첫째 이유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1:4~5


아마 지금 우리 귀에 젖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기업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려오는 소리가 ‘기업’ 소리에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 되었다... 계속 기업 소릴 듣습니다.

(넓게 보면, 성경의 기업이나, 우리가 쓰는 기업이 비슷한 의미입니다.)

 

사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도 아주 익숙한 단어입니다.

이 것은 심지어 1세기 크리스천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단어였어요.

그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더 낫고 영구한 기업

그러나 이 기업이 무너지는 현장 속에서

초대 크리스천들이 드렸던 놀라운 고백 하나를 여러분 읽어 보세요.

히브리서 10:34절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 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네, 그들의 산업(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하고 다른 것은 뭐예요?

산업을 빼앗길 때 어떻게 당했다고 했습니까? 기쁘게 당한 것은..,


그랬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뭐라 그랬습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

이것이 지상의 시련을 이기는

초대 크리스천들의 저력이요 생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정확하게 같은 얘기를 합니다.

베드로전서 1:4절의 말씀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벧전1:4


▲그 기업의 특징

네, 하늘나라의 기업을 얘기하고 있어요.

자, 이 기업을 가리켜서 어떤 기업이라고 설명했습니까?

세 가지 특성을 말했는데

*썩지 아니하는 기업, - 영원한 기업입니다.

*더럽힐 수 없는 기업, - 이것은 거룩한 기업입니다,

*그 다음에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 불멸의 기업.


*그 영원 한 기업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셨다. 어디에? 하늘에 간직한 것이다.

빼앗길 수 없는 기업입니다. - 하늘에 간직하셨으니까!

다 빼앗겨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기업을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자, 이 소망의 기업을 어떻게 하나님이 보장 하시는가.

그 다음 절을 읽어 보세요. 5절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


이 기업만은 아무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부도 낼 수 없는 기업. 빼앗길 수 없는 기업,

이 하늘의 영원한 기업은 무엇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요?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지키심을 받습니다.

이 기업이 영구히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이 시대야 말로 천국 소망을 회복할 때라고 생각해요.

천국소망과 천국신앙의 회복.

이것은 우리 시대 크리스천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소위 지식인들이 과거 한국교회의 신앙을 비판할 때

두 가지 비판을 많이 했어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이 타계 신앙적이고 둘째는 기복 신앙에 빠져있다.

이런 비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이 비판은 정직한 비판이에요.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비판 받아 마땅한

요소들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타계 신앙을 갖고 있다.

현실 역사를 몰라라 하고 천당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기복주의’와 ‘타계신앙’ 이 두 가지를 같이 묶어서 비판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 비판은 정확한 비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진 이유가 어디 있냐면

타계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여러분 천국 믿으세요? 가끔가다가 의심이 생겨 갖고. 정말 믿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셨다. - 정말 믿으십니까?


정말 믿는 다면 이 땅에서 조금 못 살아도 괜찮아요.

그 발버둥 치 면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요.


왜 기복신앙에 빠지나요? - 천국신앙이 없어서 그래요.

진정한 의미에서 천국신앙.

하늘의 하나님이 의롭게 산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보상의 세계.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셨다는 믿음.


이런 사실들을 참으로 믿는다면,

세속적인 어떤 작은 이윤이나 이익에 매달려서 몸부림을 치는

그런 life style을 가져 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이 천국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타계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던져짐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크리스천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에요.


천국을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 라는 것은 그것이

타계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요.

천국을 믿는 다면 오늘의 삶이 달라져요.

자, 내가 이 땅 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추석 때 혹은 이 구정 설날 때 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사람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 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 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그 고생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어려움, 견딜 만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포기할 수 없는 소망(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소망(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합니다.



◑3. 그것은 오늘의 시련이 가져올 믿음의 유익 때문입니다.   1:6~7


▲시련은 믿음을 강화시킨다.

이 땅에서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유익 가운데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을 강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시련이 없이, 믿음은 강화되지 않습니다.


자, 우리가 고난이 오면

믿음 있는 참된 성도라 면 그의 신앙은 더 순수해 질 것 입니다.

더 영광스러워 질 것입니다.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더 깨끗해 질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

자, 본문의 6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1:6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단어는 본래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을 우리는 이 땅에서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형형색색의 시험을 만나요.


자, 이 시험 앞에서 우리는 근심합니다. 성도들도 근심해요.

자, 근심 절대 안 하는 성도 봤어요?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절대로 근심하지 않고 산다. 그러면 저는 그가 사람인 것을 의심 하겠습니다.


▲믿음의 시련

여기도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 이라면 그 근심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은 얼마 동안이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잠간”이라 했어요.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침 내 뭐 한다 구요?

오히려 기뻐한다!


근심을 넘어서서 마침내 기뻐할 수 있는 이 커다란 기쁨의 이유,

그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 7절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시험이 결국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하신 시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내가 이 시험을 제대로 크리스천답게 통과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믿음의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유익입니까?


이것은 주님 앞에 서는 날, 내가 칭찬 받을 자,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마침내 내 인격이 빚어져, 새로워져,

영광스러워져, 성숙한 자로 세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유익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마침내 궁극적으로 가져올 빛나는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잠시의 고난 앞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움츠려 들고 위축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요?


저는 요즘 사람들 만나는 게 꺼려져요. 우리 성도들도 그렇고.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얘기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가보면 꼭 다 그냥 IMF얘기 에요. 다 축 늘어져 갖고...


한참 얘기 하다가 보면 스트레스 받아서 다 넘어져 있어요.

저는 그런 자릴 나올 때마다 종종 제 안에 늘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자세로 살까?’ 라는 질문이에요.


제가 어제 어 우리 전도폭발 만찬 자리에 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라

베드로전서 3:14~15절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여기 14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오죠?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소동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럼 크리스천들이 좀 달라야 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는 다가오는 고난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다음 장에 보면 베드로가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모릅니다.


한번 4:12절을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무슨 시험이라고 했어요? 불 시험을.


베드로는 눈을 뜨라고 말합니다. 불 시험이 온다.

그러나 이 불 시험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동하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 3:15절에 보시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 을 예비하라.


▲당당하게 삽시다.

여러분 다 두려워 하구요, 요즘. 다 걱정하고, 다 염려하고,

그리고 다 주저 앉아있는데 여러분만은 당당하게 한번 산다고 가정해 보세요.


당당하게.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

이젠 좀 IMF에 우리가 F국가가 되고 F신앙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I am F라고 하지 말고 I'M Fine입니다. 한번 연습해보세요.

Im fine! 나는 괜찮다 말이에요.


우리가 만약 이런 자세로 산다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야, 넌 괜찮니?’

‘나, 사업이야 어렵지.’


‘근데 너는 어려운 것 같지 않아, 벽장에 달러라도 숨겨 뒀니?’

‘야, 벽장에 쌓아둔 것은 없지만,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있다.

소망이 있단 말이야. 움직일 수 없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고,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가 내 마음 속에 노래를 만들고,

시를 만들고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야.’


사도 베드로는 정확하게 그 얘길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캄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빼 앗기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흔들 릴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 합니다,

내 믿음은 더욱 순결해 지고 있습니다.

나는 주 앞에도 거룩한 자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침 내 어느 날 주님 앞에 시련을 통과하고

그 앞에 칭찬 받을 자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그리고 존귀한 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련의 폭풍의 한 복판 속에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런 당당한 자세로 살아보세요. 세상이 얼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소망(희망)을 붙들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과 함께, 그리고 이 소망의 믿음, 소망의 주님을 붙들고

새해를 믿음으로 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997년 말 경 이동원 목사님 설교, *원제목 : 지금은 희망을 가져야 할 때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