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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인가, 두려움인가?

LNCK 2007. 12. 26. 18:08

 

◈하나님인가, 두려움인가?          신20:1~9

 

 

자기 마음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온전히 100% 채우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공포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제의 설교문

 

 

◑두려움은 그 원인이 불신앙

 

▲인위적 용맹이 아니다.

신20:3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군사들이 두려움이 없이 용맹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무기들로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군사들이 담대하지 못하고 용맹하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용맹하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상대방보다 군비가 약하다고 해도 용맹스럽게 싸우면 이깁니다.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애국심이 얼마든지 인간을 용맹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용맹은, 그런 인위적 용맹성 고취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인해 용감 하라!

본문에서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한 것은

너희들은 용맹스런 군사가 되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않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 거부하고 있느냐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 - 두려움이 생긴다

신20:4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

이 말씀 중에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도와서 승리하게 할 것이니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의미로 하신 말씀이기보다는

'너희는 본래부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자들이 아니냐?'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겁을 내고 있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지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두려움을 물리쳐 이기기보다, 두려워하는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라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4절과 같은 본문을 보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까?

모두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하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을 믿지 못해서이다'라고 (잘못) 생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있어서 두려움이 생길 때는

하나님께 두려움을 물리쳐 달라고 하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자신이 변화될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두려움을 가져다 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 마음에 하나님을 둔 자, 즉 담대한 자만 전쟁에 나가라!

 

신20:5절에,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 즉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6절에는,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7절에는, 여자와 약혼 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8절에는, 두려워서 마음에 겁을 내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군사로서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용맹스러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둔 자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초월한 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뜻이 됩니다.

살든 죽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내가 주관하는 문제가 아님을 아는 자만이

두려움이 없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집을 지은 자는 집에 돌아가라

그런데 새 집을 건축한 사람은 전쟁에 참여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대신 새 집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새 집을 지어서 아직 낙성식을 안했다는 것은

새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새 집을 지어 놓고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전쟁에 나왔다면

 

 

그는 '전쟁에서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은 아니냐?'는 번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 집 때문에 전쟁에서 어떻게 하든 생존하고 싶어 할 것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이상 죽기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생존에 연련한다면... 군사가 비겁해진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자도 집에 돌아가라.

자신의 수고와 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기다리는 마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돌아가려고

전쟁에 나가서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 빨리 돌아갈 마음만 먹고 있는 사람은, 일찍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여자와 약혼한 자도 집에 돌아가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앞둔 사람은 앞으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인생 계획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어버리면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마음에 하나님만 두고 전쟁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경우는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전혀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이

무슨 하나님의 군사로서 전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죽으면 내 이익을 다른 사람이 가로챌 것이 아니냐는

생각으로 골몰한 사람이 군사로서 전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냐, 다른 관심거리냐?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너희는 어떤 인간이냐?'입니다.

즉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관심거리가 그 마음을 차지한 채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다른 관심거리로 우리 마음을 채운 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서는 두려움, 공포심이라는 것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지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유를 채우는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두려워 살게 되고

하나님을 채우는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담대하게 된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없는 인간을 원하신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을 원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새 집을 지었어도 없는 듯 살고,

포도원도 심었어도 없는 듯 살고,

약혼한 여자도 있어도 없는 듯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자신이 집착하는 소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없는데서 잃어버릴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공포나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두려움 없이 용맹한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고 넘어지고 실패하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공포심을 가지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과연 나를 마음에 두고 사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기 앞서 기억할 일 - 두려워 말라!

신20:1절에 보면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말씀합니다. 세상은 많은 것이 적은 것을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많고 적은 비교의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신20:2~3절에 보면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거든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즉 전쟁을 앞두고, 제사장은 백성을 향해서 "두려워말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은 모든 것을 어린양이 피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있고 없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이미 홍해사건을 통해서 체험한 이스라엘입니다.

똑같이 갈라진 바다에 들어갔지만 어린양의 피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살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들을 쫓던 애굽은 죽었습니다.

 

제사장은 이런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면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공포심을 이기고 담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재무장시킵니다.

 

▲이렇게 평소에 훈련된 사람이 죽음의 공포도 이긴다.

부자로 살든, 거지로 살든

권력자로 살든, 약자로 살든

누구나 똑같이 죽음이라는 문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돈보다도 쓸모없는 것같이 생각이 될 때가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이 세상에서 생존하는데 아무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에게 당장 많은 돈을 안겨주지도 못할 것이고

자식을 당장 잘되게 하지도 못할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여러분에게 담대함을 줄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맞이하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움 없이 사는 삶'을 충분히 연습하고 산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98.11.14. 신윤식 목사님의 설교문 축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