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례와 법도를 주신 목적 신4:1-8 신윤식 목사 설교 스크랩
이 설교문은, 구약의 규례와 법도를 주신 목적, 성도가 그것을 지키는 목적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구원을 받았지만 축복을 받기 위해서> 라는 통념과 반대로,
*아담의 죽음에서 → 살고,
**창조의 원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기 위해서 라고 주장합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살아있는 영혼으로 하나님의 형상 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신학적 관점을,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로 잘 분변하고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주제는, 언젠가는 교회가 해결해야될 숙제입니다.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아담에게 선악과의 규례를 주신 목적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말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담이나 하와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도 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어린 아기처럼, 두려움이 없었을 것임
지금 우리들이 뭔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직접 경험한 것이나 목격한 것들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태어나서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의 감시는 철저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들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접근하게 됩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지게 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게 됩니다.
▲계명을 주시고, 아담이 지키는 목적이 - 형벌(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유지입니다.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계약이요, 자발적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 순종이었습니다.
이리 저리 따져보고 자신에게 해롭다고 생각될 때 금지하고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금지하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목적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본래의 인간 모습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래 인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단지 불순종에 대한 결과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인간으로 남게 하기 위한 (겁주기)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註. 설교자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율례와 규례를 주신 목적이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억지로 지키려고 함이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 자발적 순종이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 그 자체이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라고 하셨을 때, 인간이 겁이 나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인간의 수동적 선택이지,
결코 능동적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능동적으로 자원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서
믿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부가적인 조건(축복 or 형벌)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註.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것-축복, 형벌-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인과응보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순위’에 의거해서 저는 이해합니다.
즉,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첫째 목적, 우선순위는, 자발적 순종과 믿음에 있고,
축복이나 형벌은 마지막 순위로 존재합니다... 예외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축복과 저주로 - 성도들을 몰고 가서는 안 됩니다.
축복과 저주로 몰고 가는 것은 샤머니즘적인 요소입니다...
▲현대 교회는 축복과 저주를 믿음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축복은 얻고 싶고, 저주는 피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때문에 믿으면 축복이 오고, 믿지 않으면 저주가 온다 라고 할 때
사람들은 축복을 선택하고,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례로 헌금에 대한 규례도,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
어떤 축복의 기대심리나,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헌금을 드리거나, 드리지 않는 것은 - 헌금 규례를 주신 일차적 목적이 아닙니다.
▲註.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과 더욱 인격적인 관계, 사랑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축복을 인센티브로 사용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고취시키는 얄팍한 상인 같은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형벌로 겁을 줘서, 성도들이 믿도록 몰아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축복과 형벌은 현실적인 결과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주된 인센티브, 또는 협박으로 삼아
기독교 신앙을 증진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 설교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과 성도사이에 인격적 관계라는 신앙의 주된 목적이 희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아담 이야기를 해본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단지 선악과를 먹는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본래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본래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계산이나 이유 없이(축복/형벌의 기대심리 없이)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죽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치 않는 인간의 결과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지
죽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함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어떤 수단이나 조건도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조건적 관계’가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하시는 여러 가지 징벌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징벌을 수단으로 삼아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죽은 아담이 사는 길이 제시되어있다.
▲1. 죽은 인간이 사는 길 →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산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신4:1절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앞서 말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본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는 것이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면
결국 본래 인간 모습(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규례와 법도를 너무 무시하는 성도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이나 그 외 다른 말씀들을 잘 지키면
축복 받고 형통한다는 정도로 이해해 버립니다.(우선순위의 혼동)
사실 지금의 교인들이 뭔가 말씀대로 산다고 할 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믿음은, 믿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규례와 법도를 - 인간에게는 거치적거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뭔가에 구속당하고 매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법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것이지
좋아서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준행한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거나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짐스러워하고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지키지 못했을 때 닥쳐올 징계가 두려워 억지로 지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히려 규례와 법도를 부담스러워하는 타락한 인성
그러나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할 때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나라 말고, 다른 나라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며 사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이 있습니다.
그 상식과 방식을 넘어설 때 그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눈총을 받고 밀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란, 세상의 상식을 넘어서고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를 좋게 보고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의 소망에 걸림돌이 되는 규례와 법도라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규례와 법도를 지킴으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다. 본래 아담의 회복.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좋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정말 좋다면 자연히 세상 나라는 싫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맞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것은 규례와 법도에 나온 세부적인 것을
하나하나 지키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하나하나 지켰다고 해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않는 행동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만 순종하는 본래의 인간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세부적인 지침과 그 준행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로서 지켜야 할 세부 지침을 정해서 가르치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각종 헌금 드리고, 주일의 세부 규레를 엄격히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註. 초대교회는 가장 요긴한 것 외에는 가급적 아무 것도 짐 지우지 않았습니다. 행15:28)
한국교인들은 전통적 규칙들을 완벽하게 지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 신자가 되려고 합니다.
혹시 완벽하게 지켜서
복을 받아내려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좋지 못한 의도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믿음은 은혜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충족됨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수많은 교회들이, 믿음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후략)
<신윤식 목사님의 설교문 축약, 98.03.29.
*출처 : http://blog.daum.net/csch10000/5270451 > 규례와 법도
▲바울의 표현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연상하며)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율례와 규례를 지키는 길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인간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은,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3. 축복을 받기 위하여,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여기쯤 위치하겠습니다. 대표적으로 신명기 28장 입니다.
축복과 징벌은 그 목적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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