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가난한 자를 두신 목적 신15:1~11
단순히 그들을 도와주라는 구제의 목적 이상으로
‘네 옛 처지와 네 옛 상태를 똑똑히 기억하라’는 목적이라는군요.
그리고 남의 빚을 탕감해주는 면제년의 규례도,
내 죄의 탕감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는 깊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 정신이 헤이했던 말라기 시대
도적질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도적질하는 것으로,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심한 말씀으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까? 말3:8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같이 스스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점차 희미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할 때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고
함께 먹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매 3년마다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내어서 저축을 해야 했는데,
그 용도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 고아 과부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14:28~29
따라서 십일조는 나 혼자 즐겁게 먹고 마시고 배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없는 자들과 함께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나누는 십일조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라기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고아 과부 등 가난한 자를 위해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 애굽에서 나올 때의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구제 차원 이상입니다.
너희가 노예 되었던 비참한 때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에 배려에 대해서 소홀해져 갔으며,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없는 자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위인, 고아, 과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하나님 성전의 창고가 비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3:9~10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세우신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만약 가난한 자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굳이 인간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직접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구제 역시 단순히 없는 자들을 돕는 차원 이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신 것이나,
그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다만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이스라엘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을에 사는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리고 여러분도 이집트에서 종살이 했음을 기억하라 신16:11~12
즉,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는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고 객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너나 할 것 없이 약자였습니다. 모두가 고아이고 과부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 때는 부자,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려서, 그것으로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나누는 것은
자기가 고아와 과부와 노예 신세로 잠시 돌아간다는 것이요,
이집트에서 비참한 종살이 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애당초부터 자기 것이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약속의 땅에서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해서, 추수를 한다고 해도
그 수확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단지 십분의 일을 낸다고
해서 십일조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득에서 처음 난 것, 맏물이 곧 십일조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고,
다시 그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우린 여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두신 목적도 마찬가지
-네 옛 모습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자는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우린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민족이다'는 이 정신에 대해서
결코 희미해지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약자의 정신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신이 온 국가에 퍼지는 것이 이웃 사랑이고,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결국 가난한 자는,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 사회에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했을 때
과거의 자신의 위치와 처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노력과 힘으로 얻은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도
나를 복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이기주의적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로 인해서 소외된 계층은 자연히 약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자가 소외되고 무시되고 그들이 굶주린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면제년의 목적도 마찬가지 - 출애굽 당시로 노예정신으로 되돌아가라!
본문 신15:1~11절 면제년의 규례도
역시 이러한 정신 아래서 바라볼 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면제년의 규례는 오늘 우리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행하기도 무척 곤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채권자들은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상당한 곤란과 번민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일부 채무자들은 희색이 만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욕심도 생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7년을 '면제년'이라고 정하고 7년이 되면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돈을 면제하라고 합니다.
신15:8~9절을 보면 가난한 형제가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고,
혹 면제년이 가까웠다고 해서 주지 않으면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빌려준 것을 7년째에는 모두 면제해 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면제년은 ‘가난한 자 구제’ 이상의 목적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면제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십니까?
우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규례는
단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면제하라는 말씀도 7년이 지나도록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가난한 자의 사정이 딱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세우신 규례
이상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도웁시다'라는 교훈으로만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면제법을 통해, 내 죄를 면제받은 은혜를 되새긴다.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고 합니다. 매 칠 년이란 안식년을 말합니다. 신15:1
즉 면제는 아무 때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 끝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안식이 하나님의 희생 덕분으로 회복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면제받음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 자로서
그 인식을 배우고 가르치라는 의미로서 빚을 면제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돈을 빌려준 사람은, 면제해 줌으로서
'나도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죄가 면제됨으로서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가난해서 돈을 갚지 못한 자는, 면제받음을 통해서 역시
'나는 하나님의 면제해 주심 덕분에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면제의 규례의 참된 목적을 모를 때,
그 사람에게는 '면제하라'는 규례가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면제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나도 이웃을 면제한다.
마 18:21-35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옥에 가둔 것은
결국 주인으로부터 받은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면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빚이 탕감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피를 쏟아 부음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내 죄의 빚을 못 갚아 쩔쩔매는 내 모습을 본다.
이스라엘은 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빚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의 실체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죄의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해서 쩔쩔매는 가난한 이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의 거울인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발견하고
그렇게 저주 아래 놓인 죄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안식을 누릴 수 있었음을 안다면
그 감사함과 은혜 안에서 이웃이 자기에게 진 빚을 면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면제하라'는 규례를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물질적 빚을 탕감해주는 아름다운 사회를 더 뛰어넘어
하나님의 면제를 마음에 담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의 자세로 되돌아가야, 비로소 가난한 자를 돕는다
눅10:30-37절에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평소에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자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 출애굽 때 노예 상태를 기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강도 만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자로,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소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라는
교만으로 살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움이 필요한 강도 만난 자를
절박한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동떨어진 마음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나타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 공동체에 주어지는 복
이렇게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가난한 자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신15:4~5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말씀을 듣고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결국 개인적인 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자란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국가에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가난한 자가 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부유한 친척은 반갑게 맞이하고 가까이 하면서도
가난한 친척은 멀리 하려고 하고 만나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만나면 도와줘야 할 대상이지 나에게 도움을 줄 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사회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면제년에
빚진 것을 면제해주는 정신이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7년째만 은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의 빚을 면제받은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은 워크아웃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약시대, 그 정신만 본 받아 살면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십일조의 규례나 면제의 규례 등을 통해서 확인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지만
오늘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그런 규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완성자로서 규례의 정신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규례를 통해서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98.8.18. 신윤식 목사님 설교문 축약, 편집했음.
*출처 : http://blog.daum.net/csch10000/5270451 > 면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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