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가족관 창17:1-8
◑한국인의 가족 문화 - 그 순기능과 역기능
우리 한국 문화는 철저한 가족 중심의 문화를 형성해 왔습니다.
한국인의 모든 가치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가치는 - 효도입니다.
한국인의 예절 가운데서 가장 중시한 예절은 - 그것은 가정의 예절입니다.
어른을 섬기는 일, 제사를 지내는 일, 형제간 우애 하는 일, 일가족 사이에
신의를 지키는 일 등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전통적 가치관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집’과 관련되어 있어요.
집안을 망칠 놈, 또 집안을 욕되게 하는 놈, 가문에 불명예 등
이렇게 ‘집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통 문화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끈끈한 가족의 유대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또 가족에서 느끼는 이런 정겨운 에너지를 갖고
한국인의 창조성과 근면성을 발달시켜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족 중심의 문화가 가진 일종의 순기능적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역기능적 요소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작년에「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가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은, 유교가 초래한 가족 문화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역기능적 요소들을
많이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 상당 부분 우리가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의 효도문화만 해도 그것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가족 가운데 치매 환자가 발생했을 때
단순한 효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더 많은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사회나 국가는,
때때로 이것을 효도의 이름으로 가족에게만 떠맡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식들의 활동영역이 제한되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이 부모 간호에 묶여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효도도 필요하지만, 전문적인 의료 혜택이나 간호사들의 도움,
또 레크리에이션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이 마련되어서
노인들이 치료 받고 쉬면서, 또 마음껏 활동하면서
동시에 자식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면
이것이 훨씬 더 실제적으로 노인과 자녀들에게 함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소화기능이 떨어져 있는 노인과 그리고 펄펄 뛰는 손자들을
한 밥상에 앉혀 놓는 것만이 효도의 본질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 갈등을 겪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한 부엌 안에서 묶어 놓고
그 갈등을 인내하라고 촉구하는 것만이 효도의 본질은 아닐 수 도 있다고
저자 김경일 씨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저자는 조상 숭배의 기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가 조상을 아름답게 섬기자는 의도에서부터 발생된 것이 아니라
고대 중국 부족국가 시절에 ‘조갑’이 왕이 된 후에
정치적 동기에서부터 조상숭배의식을 발달시켰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족, 우리 조상이
네 조상보다 훨씬 더 낫다 선전하기 위한 시위의 의도로
조상숭배의식이 시작되었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이것이 한국에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씨족이나 가족들을 향해서 배타주의, 지역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오늘처럼 세계가 하나 되어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이웃들과 열린 대화를 갖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배타적 가족주의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잘못된 극단적 가족관
우리가 비성경적 가족관으로 두 가지 극단적 견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는 ‘가족 우상주의’이고, 또 하나는 ‘가족 무시주의’ 입니다.
▶가족 우상주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떠남이 없이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체계,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떠남이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4:26
가족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왜 성경은 미워하라고, 떠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부모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족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몰두한 나머지,
선물을 주신 그 분을 망각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 선물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런 전형적 사례로, 아브라함이 백 세 때 얻은 아들,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몰두해가면서
아브라함은 서서히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차츰 망각해 갔습니다... (중략)
▶가족 무시주의
기독교는 결코 가족 우상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할 것은
가족 무시주의도 또한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네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까지 왔습니다.
조카 롯도 따라 왔던지 데려 왔던지, 하여튼 조카 롯도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사건을 가지고
노골적으로 아브라함을 비난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떠나라’는 것은, 먼저 정신적 떠남입니다.
육체적 떠남보다 본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데라와 롯을 데리고 나온 것은, 정신적으로 떠났다고 봅니다.
그때는 얼마든지 부모도 공경하고, 조카도 돌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가족을 떠나지만,
육체적으로는 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부모도 공경하고, 동생도 돌봐야 합니다.
‘고르반’하고 가족을 버리듯이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가족을 통해 믿음이 전승된다.
창17:7절에, 내가 내 언약을 세워 나와 너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언약을 세우리니... 그랬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 언약의 혜택이,
그 자식에게 계속해서 계승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7절 마지막 부분에,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그 자자손손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신앙을 전승하고, 축복도 전승하고, 좋은 전통도 전승하고, 가치도 전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하나님이 가족을 사용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창조 때부터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녀들을 축복하십니다.
시편 127:3절에, 자식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라 그랬습니다.
-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승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잘못하면 우상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가정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의 믿음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족을 귀히 여기십니다.
기독교는 결코 ‘가족 무시주의’가 아닙니다.
◑성경적 가족관
▶낮은 울타리가 좋습니다.
제가 어떤 심리학자가 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아파트에 많이 살지만, 만약 단독 주택으로 살아가는 상황이라면,
집의 주변에 울타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울타리가 높은 것이 좋을까요, 울타리가 아예 없는 것이 좋을까요?
한 심리학자가 통계를 내어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정서에 끼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조사했습니다.
*자기 집 경계에 <높은 울타리>를 쳤을 때,
식구들이 심리적으로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왜냐하면 울타리를 높이 치면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폐쇄적이 됩니다.
그래서 높은 울타리는, 자기도 모르게 폐쇄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대로 또 <울타리를 아예 없애 버려요>. 어떻게 될까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 한대요.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장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안해 해요.
학교 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울타리를 없앴더니, 아이들이 대부분 운동장 중앙에서 놀더라는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으니, 보호 받고 싶은 심리가 도리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이상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높은 울타리도 아니고, 울타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낮은 울타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가 지향하는 가족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폐쇄적인 가족관, 이것은 성경적 가족관이 아닙니다.
반대로 울타리가 없어서 가족이 자유분방한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적 가족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저는 특별히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어요.
▶1.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귀하게 여기십시오.
여기서 ‘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책임을 다 하라는 말입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구성원은 저마다 자기의 위치에서
가정을 향한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했습니다.
이삭을 향한 책임을 다한 것은 물론이고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에게도
그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카인 롯을 향하여서도 책임을 다하죠.
롯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롯을 구출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문화에는 이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룻기에 보면 나오는데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서
‘신을 벗기운 자의 집이라’ 부르며 비하했습니다. ---
바울도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신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믿음을 배신했고,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혹평했습니다. 딤전5:8
▶2. 내 가족을 넘어서서 더 큰 가족을 바라보고 살아 갈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17:4~5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혹은 언약을 갱신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름을 바꾸셨어요. 새 이름을 주십니다.
무슨 차이가 있어요?
우선 옛이름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란 뜻입니다.
존경 받을 만한 아버지!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이 한 가족 안에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
거기서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예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새 이름 ‘아브라함’은
<열국들의 아비, 많은 나라들의 아버지, 많은 무리들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영향권은 한 가족 안에서만 존경 받는 아버지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열국들의 아버지.
그래서 생각해 보세요. 저와 여러분은 다 배달겨레인데,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있잖아요!
성경의 예언 그대로 된 거예요.
이 메시지를 받는 순간 저는,
아브라함의 인생의 지평선이 넓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나는 가족을 향한 책임뿐만 아니라,
가족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해!’
이건 굉장한 사건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소명을 주실 때의 기대였습니다.
처음 부르셨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천하 만민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창12:1~3
저는 이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기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을 향한
하나님의 똑같은 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평선이 넓어야 돼요.
우리의 가족관이 넓어져야 돼요.
내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 반드시 해야 돼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돼요.
한평생 자기 가족, 자기 자식 잘 먹여 살리는 것,
그것만 하다 죽는 사람이 많아요. 그것을 넘어서야 돼요.
다른 사람들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여기에 가족의 더 커다란 그림, 더 커다란 환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급속도로 지구촌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의 가족관은 아직도 너무나 좁아요.
한국 사람들은 ‘내 집, 우리 집’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우리 집 바깥의 일에는, 무관심한 존재들이 되어 왔어요.
지나치게 내 핏줄에 사로잡히다가 보니까
내가 낳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해 졌어요.
▶예수님의 가족관, 어떤 가족관 이었을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
자, 여기 큰 가족의 그림이 필요하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것을 벗어나지 못해요.
거의 맹목적인 편애만 가지고 자기 자식에게만 집착하고 있는 한국의 부모들,
언제 이것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일본인 이께하라 마모루 씨가 쓴「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인 비판」
그 책에 보면, 한국인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이 너무나 맹목적이라고 합니다.
주로 동네 아이들끼리 싸우게 되면, 한국에서는 보통 그것이 부모싸움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자식들이 일단 싸우면, 그 자식을 데리고 가서
상대방 부모에게 반드시 사과시킨다.” 그것이 일본의 관습이라고 그래요.
한국은 자식 싸움 한참 하다 보면 누구 싸움이 돼요? 부모 싸움이 돼요.
‘내 자식을 누가 건드려?’ 그러다가 싸움이 커진다 말이죠.
누가 잘 했는가, 잘못 했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맹목적인 편애란 말이죠.
또 이께하라 씨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자기가 한국에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입시 철이 되면 전국이 난리를 치고 부모들이 나서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커야 할 자식들이라면, 자기들이 가서 손수 시험도 치르고 오지,
부모들이 나서서 아우성을 친다 말이죠.
온 국가에 무슨 난리가 생긴 것처럼 입시철이 되면...
거의 맹목적인 자식에 대한 편애, 그 편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
좀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크게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 태어나 거기서 33년을 살다간 젊은 예수,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유태인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자라면, 나도 이제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내 형제처럼 자매처럼 자식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큰 가족관’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넓은 그림, 하나님의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환상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KBS드라마 가운데 <아름다운 비밀>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저는 슬쩍 지나가는 드라마를 보다가 여기서 한 단편의 문구가
제 가슴에 깊이 새겨지더라고요.
핏줄만 가족이 아니지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다 가족일 수가 있지요!
그렇습니다. 핏줄만 가족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족일 수가 있지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
나와 같은 삶의 공간에서, 역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을
내 형제로 내 자매로 내 가족으로 생각하라고 성경은 요구합니다.
하나님, 이 땅에 방황하는 청소년들,
소외된 그늘 속에서 고통 받고 아파하는 수많은 이웃들을
내 가족으로 생각하고 다가서는 우리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변에 단 한 사람, 짤막한 한 시간이라도
그들과 사랑을 베푸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사회,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하나님, 그들을 내 형 제로 내 자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슴을,
그 사랑을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인터넷 설교 스크랩, 2000년 이전 설교 *원제목 : 아브라함을 통해 본 기독교 가족관
[주제별 분류] 행복한 가정 http://blog.daum.net/bible3/13221206
'분류 없음 > 2000~2001 그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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