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의 삶, 산 아래의 삶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9:5
◑산 위의 삶
▲은혜로운 체험도 필요하다.
변화산 위에서, 제자들은, 정말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그들은 산에서 내려오기 싫어하며, 거기 눌러앉자고 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천국을 향한 순례 길에서 낙오하거나 힘에 겨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까닭을, ‘사냥개의 비유’로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냥개들이 사냥꾼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을 때,
한 사냥개가 사냥감을 발견하여 짖으면,
동료 사냥개들도 일제히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친 사냥개들이 서서히 낙오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들은
동료 사냥개들의 짖는 소리가 아닌,
자신의 눈과 코로 직접 사냥감을 목격한 사냥개들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향한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신앙에 입문할 때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개인적으로 은혜의 체험을 한 사람만이,
끝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주해 나갑니다.
▲‘산 위의 삶’은 아름답다
그래서 ‘산 위의 삶’도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례로 아침에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다시금 흥분과 기쁨으로 그 날을 새 출발합니다.
그런데 현실, ‘산 아래의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교제할 때처럼, 그리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산 위의 삶’과 ‘산 아래의 삶’이 교차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좋은 시간만 있겠습니까!
늘 안 좋은 시간만 있겠습니까!
둘 다 있습니다! (고생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
▲산 위에서, 십자가를 생각하시다.
그런데 철없는 제자들만 산 위에서 흥분했지,
예수님이 무조건 산 위에서 좋아만 하시고 계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십자가-을 상의하십니다.
가장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당신은 정작 당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로 아침에 가지는) 기도와 묵상 시간에
우리가 주님께 아뢰고 상의하는 ‘주제’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로 ‘십자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산 위에서 변화된다.
엘리자베스 바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화산의 변모 사건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심 만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거룩하게 변화될 가능성을 나타내 보여주는 목적도 있다.
즉 우리도, 변화산의 모세와 엘리야처럼,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Reflect on Elizabeth Vanek:
"The Transfiguration is not just an indication of Christ's divinity;
it also reveals our potential to become divine."
We can achieve "deification."
꼭 누구 성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깊이 기도하고 나온 사람은, 그 얼굴이 모세처럼 환하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눈에서 거룩한 빛을 반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산 위의 체험’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내게는 가장 귀하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기도를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는 찬송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산 아래의 삶
▲신비에 오래 머물면 안 돼!
가장 화려한 모습 속의 예수님, 그 곳에서, 그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각오하시고
산에서 제자들을 끌고 다시 내려가십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제자들은 영문을 모르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이제 예수님의 진심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분을 사랑이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십자가 지려 내려오실 필요 꼭 없는데...)
어떤 신학자는, 산 위에서 변화되신 것보다,
그 후에 즉시로, ‘산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둡니다.
일면 일리가 있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산 위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 삶에서 열매가 없는 신비체험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지상으로 돌아가라!
마더 테레사가 꿈속에서 천국의 문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에 하나님이 ‘너무 일찍 왔으니까, 다시 내려가라!’고 하실 때,
여러분은 천국이 너무 좋다고 거기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지상 행을 택하실 것입니다.
천국이 너무 좋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지상에 내가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고, 아직 양육할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지상 행을 택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산 위에서만’ 계속 머무르지 않습니다.
기도와 예배를 통해 뜨거움과 감격을 체험했지만,
긴장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기꺼이 내려옵니다.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님은 이 일을 시종일관 사람들에게는 감추시려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화려한 성자의 모습보다, 그 모습을 감추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
예수님께는 철저히 ‘인자’로 사역하셨습니다.
우리는 변화산 체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체험’을 하고도
그것을 자꾸 간증, 발설하려고 합니다.
은근히 ‘나는 너희들과 달라, 조금 특별해!’ 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하기 원한다면, 무능력한 사람으로서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특별해야 합니다.
종종 우리 신비체험자들이 실제 삶에 열매가 없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랑’으로, ‘I am someone special’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어제 안수에 능력이 있었다고, 오늘도 꼭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 위에서 신비한 체험이 있었더라도, 산 아래로 내려갈 때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비로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의 ‘산 위의 삶’과 ‘산 아래의 삶’
바울도 ‘삼층 하늘’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 가든지 그 간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바울에게 희한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교회에 가든지, 그 간증을 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나와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다만 그는, 자기가 어디서든지 고난 당한 이야기(십자가)는 간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3)
믿음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을 말할 수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주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고, 복음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가 사역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신도 쓰임을 받을 뿐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와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이상 펀 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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