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심을 받은 자(크리스천)의 정체성 요20:27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7
◑너무 멀리 온 것 아니가?
영화 [친구]에서 반복되는 대사가 있었다.
“우리 (서로) 친구 아이가?”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우리 너무 멀리 왔다. 그만 돌아가자”였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이들이 튜브를 타고 바닷가에서 노는 장면이고,
이 첫 장면이 끝 장면에서도 오버 랩 되어 재차 나오는 데,
해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아이들 중 하나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너무 멀리 왔다. 그만 돌아가자”
어릴 때는 서로 친구였지만, 어른이 되면서 돈과 이권에 의해 차츰 서로 멀어지자
“우리 너무 멀리 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외친다.
우리의 신앙은, 복음으로부터 점점 떨어져, 이제 너무 멀리 오지는 않았는가?
나는,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할 형제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는가?
너무 멀리 왔다면, 오늘 나도 배우처럼, 영화의 대사를 한 번 외어보자.
“우리 너무 멀리 왔다 아이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
▲너무 멀리 온 것이 위기다.
저는 1년 4개월 전에 암 선고를 받고, 지금까지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그런데 2주 전에 다시 검진한 결과, 말기암이란 판정을 받았다.
제 온 몸에는 림프절을 통해 암이 전이가 된 상태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기’는 무엇인가?
저처럼, 말기암 판정을 받는 것이 위기인가? (아니다)
진정한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대충 들려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듣고도, 내가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 이것이 인생이, 또한 교회가 직면한 진정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벌거숭이 임금님은 아닌가?
오늘날 현대인이며 앞서가는 사람인 나는
그런 신분에 걸맞는 우아하고 세련된 옷을 입고 산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내 영혼은 영적으로 피폐하고 헐벗어있고,
각종 물질주의에 오염되어, 심령이 바짝 매 말라 있지는 않는가?
내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되어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제로는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임을 모르고 있다. 계3:17
▲기독교와 바알 종교를 구분하시라.
왜 이스라엘이 바알 우상을 그토록 집요하게 섬겼을까?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이스라엘은 시대마다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들었는가?
바알은 풍요와 다산多産을 약속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윤리가 빠진 번영prosperity만의 추구 → 이것이 바알 숭배의 특징이다.
우리의 교회가, 경건한 신앙과 윤리를 이 사회에 올바로 세우지 못하고,
물질적 번영만을 추구하는 시류에 휩쓸려 같이 떠내려간다면,
우리 사회 모두는, 구약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실제 삶에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고,
크리스천들이 오직 ‘양심 없는 풍요와 쾌락’만을 추구하게 될 때,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리워서 (건전한 교리를 듣는 것을 참지 못하고)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길을 진리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쫓으리라. 딤후4:3
사람들은 말세가 되면, 자기 귀를 즐겁게 해줄 스승들을 많이 찾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메시지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고 반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본을 쫓아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너무 멀리 온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강단에서 전파하고,
성도들이 믿고 아멘으로 따를 때,
우리 사회의 위기는 불 보듯 뻔하다. 구약의 선민들처럼 망할 것이다.
◑보내심 받은 자의 정체성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7
이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핵심이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향해 찾아가지만,
기독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일꾼들을 보내신다.
▲1. 삶의 정황 속에 들어가라는 뜻.
그래서 보냄 받은 종들은, 세상 가운데 들어간다. 백성들 가운데 함께 거한다.
그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한다.
그것이 ‘보내노라’는 목적이다.
다른 말로, 자기 혼자 고상한 부류로서, 대중을 떠나서 살지 않는다.
자기 혼자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라고 ‘보내신’ 것은 아니다.
▲보내진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그래서 그리스도는 ‘보내졌기에’
가난한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그들 가운데 사셨고,
조롱을 받기도 하셨고, 모욕을 받기도 하셨고,
침 뱉음을 받기도 하셨고, 그 험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그 분은 세련미를 전혀 추구하지 않으셨다.
땀내 나는 옷을 입고 계셨다.
그의 얼굴은 구릿빛으로 타 계셨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딱딱해져 있었다. 한 마디로 험하고 치열하게 사셨다.
그 분을 오늘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오늘 ‘보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보여준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의 지상사역처럼 우리도 그렇게 험하고 치열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것 같이”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처럼, 땀내 나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로 내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말이다!
그렇게 낮아지시고, 고난당하신 주님은, 결국에 만유의 주로 높이셨다. 빌2:9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영광 받는 종으로만 산다면,
나중에 주님은 우리를 결코 높여주지 않으실 것이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16:25
오늘날 성공주의 시대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주님이 높아지신 것만큼만, 높아지시라. 그러면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예수님보다 더 높아져서 대우받고 살려고 한다면
‘우리 너무 멀리 온 것 아니가?’
▲2. 예수님은 어떤 종교적 기득권에도 편승하지 않으시고,
신앙의 본질로만 나아가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지만, 레위지파 아론의 후손으로 오지 않으셨다.
당신이 세우신 제사장 제도를, 친히 파괴하시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으셨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12사도로서의 정통성은 없었다.
이방인의 사도를 택하실 때, 전혀 예기치 못한 데서, 엉뚱한 사람을 택하셨다.
구약의 성전은 주님이 일러주신 거룩한 식양을 따라 지었지만,
그것이 허물어지도록 주님이 묵인하셨다.
이렇게 ‘형식’이 깨뜨려진 예를 몇 가지 들었다.
‘형식’과 ‘전통’과 ‘정통’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기득권’으로 고착 되면 안 된다.
요지는, ‘거룩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거룩한 형태’보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때에 따라 ‘거룩한 형식’을 거침없이 파괴하셨다.
주님이 친히 그렇게 하셨다.
교회가 스스로 로열 클래스를 만들고, 내용 없는 쓸데없는 전통에 집착해서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자유롭지 못하게 족쇄를 채우면 안 된다.
우리는 주의 길을 ‘곧게’ 해야지, 도리어 ‘굽게’ 하면 안 된다.
세례요한, 예수님, 베드로, 사도 바울 등
보내심을 받은 자는 그 누구도
종교적 기득권에 편승하지 않으셨다.
▲3. 보냄 받은 예수님은
일어나 다른 마을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하신 것처럼,
잃은 영혼 찾는 일에만 주력하셨고, 땅끝까지 복음전파를 명하셨다.
▲복음의 양극화
오늘날 세상은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부富의 양극화
또한 각국 안에서도 부유층과 극빈층간의 부의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양극화>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귀찮아질 정도로... 복음에 대해 많이 듣는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약 18억 정도가,
복음을 거의, 혹은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단순한 메시지 한 번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가!
이것이 너무나 명백한 현실인데,
우리는 얼마나 태연하게 잘 지내는지...
막 안타까워해야 정상 아닌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오늘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고도 내가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면
‘우리 너무 멀리 온 것 아이가, 이제 고마 되돌아가자!’
▲밝은 대낮에는 촛불이 필요 없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밝은 예배당에는, 촛불 한 자루는 켜나마나 할 것이다.
촛불은 어두운 곳에나 필요하지, 이런 밝은 곳에는 전혀 필요 없다.
당신은 빛이신가? 그렇다. 나는 양초 한 자루 같은, 작은 빛들이다.
‘나의 빛’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저 어두운 세상에 절실히 필요로 한다.
지금 한국에는 교회도 있고, 주의 종들도 있으므로,
‘나의 빛’이 더 밝게 빛나려면, 더 어두운 곳으로 찾아가야만 한다.
1백여 년 전에, 구미의 선교사들이 ‘어두운’ 한국에 찾아온 것처럼!
자기들의 모든 기득권과 특권을 등지고, 이 머나먼 땅에 찾아온 것처럼!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의 대도시의 번영과 안전을 등지고 떠났다.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포기하고, 부르심을 향해 나아갔다.
주 예수께서 모든 천국의 영광을 다 등지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찾아오신 것처럼!
이처럼 기독교의 본질은 ‘보내심을 받는 것’이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본향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떠나며 사는데...
▲4. 보내심을 받은 사람의 인생철학 - 본향을 향하여
제가 20여 년 전에 결혼할 때, 입던 양복, 입던 구두 신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본향을 향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 삶(호사스런 결혼식)에 그렇게 연련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축가로 특별히 이 찬양을 주문했다.
연주자들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내 주문이 농담인줄 알고, 알아서 딴 곡을 불렀다.
나는 우겨서 꼭 이 찬양을 불러달라고 요구해서, 결국 소원대로 되었다.
내 결혼식에 이 찬송이 하나의 메시지로 울려 퍼졌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란의 궂은 비바람.. 환란의 비바람
모질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기쁜 찬송 늘 항상 못 부르나., 은혜로 이끄시네.
생명 샘 밝은 물가에 백합화피고
흰 옷 입은 천사들이 찬송가로 높이 부를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내가 20여 년 전 결혼하기 전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목적은 ‘본향을 향하여’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성을 사모하며 바라본 것처럼! 히11:10
For he was looking forward to the city with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그래서 나 역시 이 세상을 행인이요, 나그네로 살기 원했다. 벧전2:11
이 세상에 올인 하지 않기로 했다.
말기암인 저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가 확실히 아는 것은,
제 생명이 암세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역에 투신한 이후, 인간적으로 잃은 것도 있기는 하다.
과거에는 한 때 연봉 많이 받는 직장생활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선교에 투신하고 나서, 지금은 어떤 통장도, 심지어는 국민연금조차 없다.
그래서 아내와 어린 두 자녀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마음이 평안하다.
또한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다 선포하리라는 말씀을 의지하며 담대히 살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29~30
이와 같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못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33
다른 말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할 자가 없다. 다 된다>는 뜻도 된다.
저는 제 모든 소유를 버리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원했다.
그렇게 지난 과거를 살아왔고, 그런 것에 후회가 없다.
거기에는 그만한 영광, 가치, 넘치는 부요가 있었다.
바야흐로 봄이 되었다. 추수를 위해 씨앗을 파종해야 하는 시기다.
경건의 모양으로 포장된
거짓, 위선, 권태, 종교적인 고착, 독선, 교만을 버리고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 한다.
<08.03.02. 신현확 선교사님 설교 중에서 발췌, 비즈너리(직업인) 선교회 대표.
[주제별 분류] 해외 선교 http://blog.daum.net/bible3/1432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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