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cW521nFkDDo
◈주님이 보시는 눈으로 세상 보기 눅19:41~44 2008.03.16. 출처
론 솔로몬
The Triumphal Entry: Seeing the World Like Jesus Sees It
◑시각 차이를 느끼시는가?
▲다 가져도 허전하다.
상하이 나이츠, 상하이 눈, 에너미 라인스, 웨딩 크래셔, 아나콘다 등에서 열연했던
인기 정상의 배우 오웬 윌슨이 2007년 10월, 자살을 기도했다가 결국은 살아났다.
돈, 명예, 외모, 경력, 아름다운 연인 등 가질 것은 다 가졌는데, 왜 자살할까?
그는 약물 과다복용과 손목동맥절단으로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가
극적으로 살아났고, 지금 다시 활동 중이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헨드릭슨, 크리스토퍼 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린지 로헨 등도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이 멀리서 그들을 쳐다보면, 다 가진 것 같고, 최고로 성공한 것 같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데...
또한 가끔씩 화면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 멋있고, 정상을 달리는 것 같은데,
화면에 비치지 않는 그들 내면의 실제 모습은... 다 망가져 있었다. 자살할 정도로!
수많은 억만장자들을 만나서 취재한 기자가 발견한 그들 억만장자들의 고민은
그 내면이 심한 불안과 심한 외로움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외면을 보고, 예수님은 내면을 보신다.
‘보시오 목사님, 지금 뭘 말하자는 것이요?’
세상의 메시지는 물질적 풍부, 권력, 명예를 가지면 행복해 질 것이라 선전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버젓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심한 슬픔, 외로움, 상처, 상실감 등으로 무척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가진 ‘세상을 보는 시각’은
무슨 로맨틱 영화처럼, 무슨 버드와이저 광고처럼
그런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 영화나 광고 장면을 동경하고,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발버둥 친다.
그 내면이 어떤지는 전혀 모르는 체, 겉보기에만 화려하고 멋있게 보이려고 야단이다.
그런데 성경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은,
예수님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면을 보지 않고, 내면을 보신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
이스라엘 역사에는 왕이 되는 사람은,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걸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나?
마태는 구약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마21:4
이것은 스가랴9: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백성들이 자기를 왕으로 환호하도록
여기서 “딱 한 번” 허락하셨다.
메시야의 출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그 성 바깥에서 그 성을 바라보면... 높은 언덕에 있으므로 매우 장관이다.
당시에 그 성 외벽은 흰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일 때는, 숨이 딱 멎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백성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긴 부채처럼 생김)를 들고 나와
겉옷을 길에 깔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지금 분위기는 끝내주는 상황이었다. (대통령 취임식 후 퍼레이드 쯤 비교될까?)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그 성을 바라보고 우신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원어적으로 흐느끼시며) 눅19:41
그 아름답고 화려하게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대리석 예루살렘 성,
그리고 자기들의 왕으로서, '나귀타시고' 입성을 열광하고 환호하는 백성들,
그들을 보고 들떠서 같이 흥분해야 당연한데,
거기서 흐느껴 우시다니!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레드카펫을 밟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주연배우가 거기서 멈춰서 우는 격이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예수님은 내면을 보시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보신 백성들의 ‘내면 영혼’
▲1. 그들의 무너진 내면의 상처를 보시고 우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19:42
예루살렘 사람들은, 대도시에 산다고, 또한 거룩한 성전을 모시고 산다고
자부심이 남다르고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 내면에 있는 아픔, 상처, 외로움, 분노... 이런 것들을 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셨고, 그들의 눈이 감겨져 있다는 것까지 다 보셨다.
그리고는 그들의 처절하고 헐벗은 영혼의 상태를 보시고 우셨다.
▲2. 약 33년 후에 벌어질 예루살렘의 폐허를 보시고 우셨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43~44
역사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지 33년 후에
로마 황제는 4개 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성이 포위당하자, 성내에는 기근, 질병이 있었고, 결국 함락되었다.
포위 중에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밤에 몰래 성 밖으로 나와서 식량을 구했는데,
로마 군인들은 그들을 잡아서 하루에 5백 명씩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한다.
나중엔 십자가가 모자라서, 백성들을 성벽에다 대고 못 박았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이 함락되고 도살된 사람의 수는 백십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살아남은 9만7천명은 노예가 되었고,
성과 성전은 바닥까지 완전히 허물어졌다.
▲3. 그들이 영원히 버림 받아 지옥에 갈 것을 보시고 우셨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미리 보신 것이다.
그래서 우시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 환희의 순간에 엉뚱하게도!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2nd chance를 주지 않으시느냐고?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루살렘 멸망까지 30년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이 기간에 베드로, 바울, 야고보 등이 계속 복음을 전했지만,
듣고 믿는 사람은 믿었고, 거절한 사람들은 계속 거절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2nd chance가 아니라, 500번 찬스(70번씩 7번 이상)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영원히 참으시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심판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듣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그들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계속 거부할 때는, 때가 되면 심판이 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하나님의 인내심이 끝나는 날’이 내게 닥치지 않았나... 살펴봐야 한다.
혹시 ‘하나님의 인내심이 끝나는 날’이 내게 가까이 오지 않았나... 잘 살펴봐야 한다.
◑적용 ; 주님이 보시는 시각을, 나도 가져야 한다.
▲시각을 바꾸시라!
무슨 영화제에서 줄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 등 유명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는다.
그들은 고가의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보석으로 단장하고, 한껏 자태를 뽐낸다.
그래서 방송국의 카메라는 그들의 외모와 명성을 비추지만,
예수님은 그날 밤, 그들의 내면을 보실 것이다.
그 때, 2천 년 전에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의 환호 속에서 우셨던 주님께서,
오늘날에도, 화려한 오스카 영화제의 환호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시며 우실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버려졌으며, 마음이 공허하며,
영적인 눈이 감겼음을 바라보시고, 영원히 멸망할 운명을 보시고... 우실 것이다.
오늘 설교의 요점은, 우리가 <주님의 시각을 갖자>이다.
세속적 시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레드카펫을 예로 들었다.
당신은 그것을 보고 동경, 흠모하는가? - 세속적 시각이다.
주님의 시각을 가지면... 내면이 보이고, 영혼이 보이면서, 도리어 흐느끼게 된다.
▲오늘 만약 예수님이 워싱턴 시에 입성하신다면 어떠실까?
물론 우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쳐다보시고 우실까?
미국의 국가채무, 국가 안보상태를 바라보시고 우실까? (아마 아니다)
다우존스 지수가 팍팍 떨어지는 것을 보시고 우실까? (아마 아니다.)
국회의사당이 잘못 나가는 것을 보시고 우실까? - 이것은 조금 그럴 수 있다.
예수님은 워싱턴 시를 걸어가시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올바른 신앙적 지도를 받지 못하고,
마약과 음란에 빠져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그 곁에 멈추어 서서 우실 것이다.
공립학교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은 이제 구닥다리로 간주되고
온갖 ‘세속주의, 인본주의, 개인의 자유’ 가치관이 가르쳐 지는 것을 보실 때...
주님은 우실 것이다. 그것들은 사탕 발린 사탄의 유혹들이다.
오늘도 양로원, 요양원, 병원 등에서 이제 곧 죽어가면서도
전도자들의 복음 듣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자기 완악함 가운데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보호자 접견실에서, 주님은 우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위치한) 워싱턴과 2천 년 전 예루살렘을 비교할 때,
어느 도시가 더 타락하고 더 세속화되었겠는가?
2천년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흐느껴 우신 주님은,
오늘날 우리 도시를 보시고 어떠하실까?
가슴이 터질듯 하시며, 더 심하게 흐느껴 우시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는 길을 걸어가면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 눈에 무엇이 들어오는가?
백화점 진열장에 진열된 화려하고 멋있는 옷인가?
아니면 권력을 상징하는 의사당, 정부종합청사 등의 건물인가?
아니면 재력을 상징하는 대기업 본관 건물인가?
예수님이 그런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시며 흠모하셨겠는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이 도시의, 수십 수백만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실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영혼들이 먼저 눈에 보일 것이다.
내가, 주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기 시작할 때,
그것은 내 삶의 방식을 결정적으로 바꿀 것이다. ★★
When we really begin to see people
with the way Jesus see people,
It will radically change the way we live!
▲월리엄 캐리가 근대선교운동의 선구자가 된 비결
1761년 영국에서 태어나 구두수선공을 하고 있었다.
20대에 그는 [캡틴 쿡의 항해]라는 책을 빌려서 흥미롭게 읽으면서
타이히, 하와이, 뉴질랜드 등 남태평양 섬들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졌다.
책에서 쿡 선장은, 이 섬들 중 하나의 언덕에, 큰 십자가를 세웠다고 했다.
그날 밤, 그는 악몽을 꾸었는데,
수없이 많은 섬 원주민들이 길게 줄을 지어서 ‘큰 십자가’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 끝에는 벼랑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영원한 불 못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불 못으로 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지나갔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 뜻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땀에 흠뻑 젖어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누군가 그들에게 가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윌리엄 캐리는, 세상을 볼 때,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영원히 버려진 사람들이 보이고,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자기 눈에 보이게 되었다.
누군가, 사도바울 이후로 가장 위대한 복음전파자는 윌리엄 캐리라고 말했다. 註1)
왜 그가 이렇게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갔는가?
<주님이 보시는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그 시각은, 그의 삶을 radically 바꾸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또한 나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더 큰 예산, 주차장, 건물? - 아니다.
더 많은 수입, 더 큰 명성, 더 안락한 생활? - 다 아니다.
<주님이 보시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늘 주님이 이 도시를 바라보시며, 우시고, 마음이 터지는 듯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도시를 바라보면서, 울면서, 마음이 터지는 듯해야 한다.
우리는 윌리엄 캐리가 가졌던 시각(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남태평양 영혼들에 대한.. 그런 안타까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울게 되시기를 바란다.
크고 화려한 성읍의 외모만 보면서 감탄만 하지 말고!
註1) 1792년 캐리는 침례교선교회 Baptist Missionary Society in England 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근대선교운동의 기원(시작)이 되었다.
오늘날 모든 해외선교단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윌리엄 캐리에 도달한다.
허드슨 테일러, 아도니람 저드슨 등도 윌리엄 캐리에게서 도전을 받았다.
캐리 이전에는, 개신교회가 조직적이며 계속적인 해외선교를 수행하지 못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인 진센돌프와 할레 대학이 간헐적인 선교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캐리의 영향을 받은 이후, 개신교회는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해외선교를
수행했다. 그래서 그를 ‘근대선교의 아버지’로 부른다.
그는 남태평양에 비전을 가졌지만, 정작 사역은 인도 캘커타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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