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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긍정 or 자기부정?

LNCK 2008. 3. 15. 18:29

https://www.youtube.com/watch?v=qnfjSO7naEI 

◈자기긍정 or 자기부정?           사6:1~13            <08.02.10. 인터넷 설교 정리.

 

자기긍정, 즉 자기가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자기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것은, 언뜻 보면 성경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적 자기긍정은, 반드시 자기부정을 통과한 후에 얻게 되는 자기긍정이다.

그것 없이 막바로 자기긍정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세상 철학이다. 비슷하지만 아니다!

 

 

◑1. 이사야의 자기부정

 

그런데 이런 놀라운 소명을 받고도, 불행한 일이 한 가지 있다.

이사야는 자기 부족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요, 또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가운데 사는데... 사6:5

 

 

▲세상은 자기긍정을 강조한다.

희망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자기긍정’에 대해 자주 강조해서 가르쳤다.

 

예를 들면, ‘나는 90세 이상까지 건강하게 살 것이다!’

‘나에게는 반드시 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삶을 살고 있으며,

내가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희망적 사역이다!’

‘나는 비록 소시민이지만, 위대한 사람이며, 창조적인 인간이며,

많은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도 나의 즐거운 협조자가 된다.’

라는 식으로 자기긍정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사야를 보니,

세상은 ‘자기 긍정’을 해야 무슨 일을 성취한다고 말하는데,

정 반대로 ‘자기부정’을 선언하고 있다.↙

 

화로다 나여, 나는 이제부터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요, 또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가운데 사는데... 사6:5

 

 

 이사야는 자기 부정을 하고 있는가?

이사야는 지금까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꽤 괜찮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볼 때, 항상 자신이나 자기 자녀를 좋게 평가한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자아증진’self―enhancement 이라고 한다. 註2)

 

그는 20대 나이로, 왕족으로서, 웃시아 왕의 국정에 참여했던 엘리트였다.

그 나라에서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했던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도 괜찮았다.

그는 왕족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지도자였다.

 

웃시아 왕이 죽고 나라가 혼란할 때,

자기 혼자 이렇게 성전에 와서 심각한 기도를 드리는 것만 봐도

훌륭한 청년임에 손색이 없다.

스스로도 모든 사람 앞에 자신 만만하던 청년이었다.

 

 

▲하나님과 대면하면... 자기부정이 일어난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마주섰을 때,

그때 자기 모습의 진면목을 불현듯 보게 되었다.

 

(이렇듯 하나님과 대면하면, 누구나 자기 본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자기를 깊이 아는 길이다’고 말했다.)

 

거기서 깨달은 자기 모습은,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인정해 온 ‘잘난 이사야’가 아니었다.

 

화로다 나여, 나는 이제부터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요, 또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가운데 사는 추악한 내 모습... 사6:5

 

그 이전에, 이사야는, 고상한 자신과 천박한 백성들을 차별화했을 것이다.

‘이 백성을 보십시오. 이렇게 형편없고 입술이 더러운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기도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울처럼 환하게 반사된 자기의 모습은,

‘아, 나도 그들과 똑같이 더러운 입술이구나!’를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똑같이 입술이 더러운 백성중의 한 사람임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2. 베드로의 자기부정

 

베드로도 처음에는 자신만만한 수首제자였다.

그는 가끔 다른 제자들을 무시하면서, 자신을 차별화 하면서 말했다.

“주여, 이 아이들이(무시 말투)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안 버리겠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과 일대일로 마주치게 되었다.

“내 양을 먹이라!”

 

과거에 철저하게 자기긍정을 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반대로 자기부정을 하고 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만...(묵묵부답)”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통해 자기부정을 터득했다면,

베드로는 가야바의 법정 앞에서, 자기 정체를 비로소 깨달았다.

어떤 계집아이 앞에서, 비겁하기 짝이 없게,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말았다.

“당신 말투가 북쪽 갈릴리 사투리잖아요?”

“지금 무슨 정신 나간 황당한 말을 하는 게야, 너 미쳤지?” 눅22:57

 

자기 정체의 진실이 자기 앞에 추악하게 나타났을 때,

비로소 객관성 있게 자기 모습을 발견한 베드로는

너무 처참한 모습을 본 나머지 울었다고 했다. ‘아, 이게 나였구나!’

 

겉으로 남들 눈에 드러난 입술은, 죽는데 까지 따라 가겠다고 매끄럽게 놀렸는데,

이제껏 남들 눈에 감춰진 입술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를 고백하게 되었다.

 

 

▲자기부정 후에, 비로소 쓰임 받는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입술로 말하는 것보다 의롭지 못하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진실한 자기 발견의 고백이 있을 때, (예를 들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등)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를 쓰시기 시작하신다.

 

그 때 스랍 천사 중 하나가 제단 숯불 중에 숯 하나를 부집게로 집어서

날아와 그 숯불을 내 입에 대며 말하여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사6:6~7

천사는, 부정한 이사야의 입술을 숯불로 태워버렸다.

 

이 모든 정화 과정,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친 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해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8

 

 

▲나도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다.

우리 중에 입술이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매우 깨끗하게 살았고,

선하고, 누구에게나 존경 받을만하며,

누구보다도 의로우며, 사역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있다.

나는 저 외식자들, 세속화된 저 인간들보다는 적어도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이런 차별화 의식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누구나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중에 거하면서...’

 

 

◑3. 바울의 자기부정

 

세상에서 성공의 비결이라고 부르는 ‘자기긍정’이 철저히 숯불에 불 태워져 버리고

‘자기부정’을 통한 새로운 자아관이 자기 속에 정립되었을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 사명과 부르심을 받는 시작이다.

 

이런 ‘자기부정을 통한 부르심’은 바울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바울도 처음에 강한 ‘자기긍정’이 있었다.

 

나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의 선생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빌3:5

 

이런 자만심self-confidence이 충만했던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나보다 더 죄 많은 사람은 없구나!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치 아니하고, 내가 원치 않는 악은 내가 행하는 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렇게 자기긍정이 산산이 다 부서져 내린 그 때부터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자기부정’은, 하나님의 종에게는, 사명자로서 출발하게 만드는

<영적인 자기긍정>이 된다.

 

 

◑업적 위주로 일하면 안 된다.

 

▲열매가 없을 수도 있다.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일을 했다면,

그 부르심이 순수하고 진짜니까,

괄목할만한 성과가 나타나야 정상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미리 주의를 주신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여 주어라. 그러나 그 백성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사6:9

 

그 백성들은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저서,

회개하고 고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러면, 뭐 하러 저를 보내십니까?

어느 때까지 그렇게 됩니까?’  사6:11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옥들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멀리 옮겨져서, 이 땅에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 그렇게 하라!’ 사6:11~12


철저하게 저들이 망할 때까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업적, 성취... 이런 것을 버리시라!

자기부정 - 이 말은 업적, 성취를 근본적으로 목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좀 한다고,

그 자리에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즉, 업적 위주의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마치 메아리 없는 외침과 같이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황폐한 결과만 생기는, 끝없는 헛수고 같은 일이더라도

그것이 내 사명이면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목회는 과연 성과가 컸는가?

5병2어의 표적도 보여주시고, 셀 수 없는 많은 환자들도 고쳐주셨다.

거친 풍랑도 잔잔케 하시고, 주옥같은 말씀으로 계속 가르치셨다.

 

그런데 큰 성전건물 지으신 것도 없고,

전도유망한 똑똑한 제자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셨다.

스승이 십자가 질 때, 뿔뿔이 흩어져서 다 도망갔다.

 

그렇게 아끼셨던 민중은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고함쳤고, 메시아를 욕하며 저주했다.

그러면, 진짜 예수님의 목회가 실패하셨나?

 

하나님 나라의 소명은 업적 위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열매는 하나님이 거둘 것이니, 우리는 자기 사명만 감당하면 된다.

그것이 주의 일의 성격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면 역사(그루터기)를 볼 줄 알아야!

그런데 우리는, 자꾸 열매를 내가, 내 시대에 거두려고 하다보니

오버하게 되고, 여러 부작용들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이사야가 걸어갔던 50년 예언 사역의 길은, 재미없었고 고달팠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예언자로 역사 속에 길이 영원히 남아 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6:13

 

거룩한 역사는 눈에 확 띄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있다.

그루터기처럼,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땅 속에,

‘남은 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 역사는 대대로 계속 이어진다.

나는 내 시대적 사명만 감당하고 가면 된다.

 

‘나는 주님을 위해 제 재산을 다 쓰고, 이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일평생 50년 목회하고, 이제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결과가 안 보여도 괜찮다고 하신다.

우리가 매달 선교비를 온갖 고생하며 수 십~수 백 군데 꼬박꼬박 보내도

효과가 너무 미미해도 괜찮다.

그런 생각 가지고는 선교 못 한다.

 

우리가 하루 종일 나가서 전도해도, 결신자 한 사람도 못 얻을 수 있다.

그러면 헛수고인가? 아니다.

우리는 씨만 뿌리면 된다.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신다.

 

기독교 사역은 업적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뿌리라면 뿌리고, 그만 두라면 그만 두면 되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소명 받은 자들의 특징이다.

 

 

▲마치는 말

위 진리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적으로도 그렇다.

 

세상은 오늘도 자기긍정, 자아계발self-development를 가르친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긍정의 힘’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철저히 자기깨어짐  자기부정을 가르친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가장 반복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사명자들은,

열매의 유무, 업적의 성취 유무에 관심두지 않는다.

주님이 명하시므로, 갈 뿐이다.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

 

 

............................................................

 

 

註1) 이사야의 하나님 임재 체험

 

2천7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 받을 당시 유대나라의 운명은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망해 식민지가 되어있었다.

 

그가 속한 남유다는, 강력한 통치자였던 웃시야 왕의 죽음과 함께

국력이 급속히 쇠퇴해 가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개중에 발 빠른 남유다의 몇몇 사람들은,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앗수르의 국교인 바알종교에 머리 숙이고, 거기에 줄서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혼란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20대의 젊은 청년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드렸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사1:4

 

그는 조용히 남유다의 혼란스런 현실을 고하며, 하나님께 갈 길을 여쭈었다.

그때 그는 놀랍게도, 성전 안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주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6:1

 

갑자기 엄위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이사야는 놓이게 되었다.

동시에 천사들이 날개를 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6:3

 

그 천사들의 찬송 소리를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흔들거리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6:3

 

지금까지 이사야는 그 성전을 수 백 번도 더 드나들었지만,

그런 놀라운 체험은 처음이었다.

 

문지방과 그 근처 땅바닥이 마치 지진이 나듯이 흔들거리는 것을 볼 때,

이사야는, 남유다의 현실과 연계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유다의 국운이 저렇게 불안하게 마구 흔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구약의 성막 때부터, 하나님은 연기 가운데 임하셨다. 출19:18, 20:18 등

 

이 장면을 보여주신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사야의 <사명 임직식>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부르실 때,

종종 이렇게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신다.

이런 특별한 체험이 있어야, 후에 어려움이 닥칠 때, 자기 소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사야는, 약 50년간,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의 주요 사적은, 이사야서의 계시 받음과 기록 한 것 외에도,

히스기야 때, 앗수르의 패망을 예언해서 남유다를 구한 것, 왕하19:6

또한 약 150년 후에 있을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 등을 예언했다. 왕하20:16

 

 

註2) 자아증진 현상이란?

사람한테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자아증진(self―enhancement)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곧 대부분의 사람한테는 자아 존중감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증진시키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이고,

나쁜 것은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으로 생각한다(self serving attribution).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보다 자신을 평가할 때 더 관대하고,

자신과 연관된 장소·물건 사람을 다른 사람이 연관된 것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이 선입관이나 편견에서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필재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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