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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1234 박수갈채 와 돌맹이

LNCK 2008. 4. 23. 13:07
 

◈박수갈채와 돌맹이               행14:8~21



◑갈채와 돌맹이는 종종 같이 온다.


▲얼떨결에 갈채 받은 바울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주었다.

그러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나바는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 신으로 승격시켰다.


루스드라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었는데,

옛날에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루스드라를 방문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신들을 영접하지 않자, 신들이 그 도시를 저주해서

홍수로 그 도시를 거의 대부분 멸망시켜 버렸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그 도시 사람들은, 혹시나 자기들이 또 그런 화를 당할까 해서

누가 신적인 능력이 보이면, 그들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숭배했다.

(당시 헬라 문화의 신은, 절반은 신, 절반은 사람으로 인식되어졌다)


▲갈채를 받으면... 옷을 찢어라

바울과 바나바는 신으로 숭배 받고 있는 자기들의 위험성을 직감했다.

하나님께 돌려질 영광을 자기들이 가로채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하며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들이여, 어찌 이런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갈채 후에 돌맹이 온다.

여러분, 갈채를 받는 순간에 조심하셔야 한다.

왜냐면 갈채 속에는 독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신으로 승격된 후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들을 부추겨

바울에게 돌을 던지게 했다.

그들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루스드라 밖으로 끌어냈다. 행14:19


‘아마’ 똑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누가 선동하면 ‘신이여!’ 하고 바울에게 갈채를 보내다가,

누가 선동하면 ‘악마여!’ 하며 바울에게 돌을 던져 죽여 버린다.



◑갈채의 성격


▲갈채는 중독성이 있다.

여러분, 갈채는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받으면, 계속 더 받고 싶어진다.

그래서 갈채가 중단되면... 허전해지고 허탈해진다.


연예인들 중에 유독 자살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기가 올라가고 갈채를 받을 때는 살맛나지만,

인기가 떨어지면 반대로 심하게 우울해 진다.


그러므로 <갈채의 중독성>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자기를 갈채해 주지 않는다고 ‘이상 반응’을 나타내면

벌써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겸손에 상처를 입는다.

겸손은 기독교인의 미덕이다. 그런데 계속 갈채를 받다보면... 겸손이 사그라진다.

칭찬과 인정도 좋은 것이지만... 계속 받다보면,

나중에 그것이 끊어질 때... 목마르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이상하게 돌변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애시 당초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훈련이다.


▲갈채 중독환자

성도들은 모두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갈채 중독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병인 줄 모르는 병’이다.


주님과 관계가 깊지 못한 사람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목숨을 건다.

그런 ‘병적’인 현상을 보이면 안 된다. 자기가 연예인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것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남들보다 더욱 감염되기 쉽다.

내게로 향하던 박수소리가 조금 잦아지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므로 아예 박수를 모두 주님께 돌려보내드리고,

자기는 애시 당초 <박수 없이 일하겠다>는 각오로 나서야 한다.


▲갈채는 돌맹이로 바뀐다.

앞서 바울에게서 살펴보았듯이, 날아오던 갈채가 돌맹이로 바뀌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병2어의 기적 후에 환호하던 군중들, 나귀타고 입성하실 때 환호하던 군중들은,

그 환호와 갈채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니까 절대 갈채를 호락호락 받아들이거나

자기 스스로 거기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준비하고 돌맹이 맞으면... 안 다치는데,

무방비로 있다가 돌맹이 맞으면... 크게 다친다.



◑예수님이 받으셨던 갈채와 돌맹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왕이 되어달라고’ 환호했다.

수 만 명이 일제히 목청을 높여 “예수! 예수! 우리 왕! 우리 왕!”을 연호할 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중독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을 피하여 조용히 홀로 산으로 가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요2:24~25

지금은 비록 저들이 자기를 ‘우리 왕’이라고 환호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똑같은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칠 것을 다 아셨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갈채는... 조금 지나면 돌맹이로 돌변할 수 있다. 쉽게 그렇게 된다.


▲<취소> 버턴을 눌러야 한다.

그러므로 혹시 내게 갈채가 쏟아질지라도

가만히 있지 말고, 즉시 <취소>라는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기 옷을 찢었듯이 말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피하여 조용히 홀로 산으로 가셨듯이 말이다.


 

◑돌맹이를 맞는 바울의 태도


▲갈채는 피해도, 돌맹이는 피하지 않았다.

바울은 갈채 세례를 받을 때, 자기 옷을 찢으면서 피했다.

그러나 돌맹이 세례를 받을 때는, 피해서 도망가지 않고 다 받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내게 오는 돌맹이를 피하지 않는 것이다.

기꺼이 욕을 먹고, 비난을 감수하고, 공격을 받아들이는 ‘전도자의 삶의 자세’이다.


오늘 바울처럼 ‘전도자’로 살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갈채가 오면 자기 옷을 찢고

돌맹이 오면 자기 몸을 대준다. 거기에 주눅 들지 않는다.


▲다시 루스드라에 들어간 바울

바울은 놀랍다. 자기가 거기서 돌맹이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림을 당했는데,

기절에서 깨어나자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서

다시 루스드라로 들어간다.

이튿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루스드라에 돌아와서 또 복음을 전한다. 행14:20f


이쯤 되면 불사조라고 할까?

‘돌맹이’ 정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던질 테면 던져보라!’고 나아가는 것이다.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믿음의 담대함’이 필요하다.


▲바울의 능력의 비결

돌맹이 맞고 쓰러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간절히 기도해도 성령충만 하지만,

돌맹이 맞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도... 성령충만 해 진다.

하나님의 위로를 넘치게 체험한다. 고후1:4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고후1:9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되고 싶으신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돌에 맞으면... 금방 그렇게 된다.

큰 은혜와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피해서 도망가면... 아무것도 안 된다.


바울도, 그런 돌맹이 세례가 없고, 고난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와 별 다름 없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위대한 바울사도가 된 것은

남다른 고난과 핍박을 견뎌내었기 때문이다. 피해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아도 벌떡 일어난 홍수환

과거에 홍수환 선수가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 선수와 권투 시합을 할 때,

그의 모친은 한국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흑백TV를 보고 있었다.

안타깝게 홍수환 선수가 상대의 펀치를 맞고 자꾸 쓰러졌다.

어머니의 심정은 너무 안쓰러웠다.

누워버리고 안 일어나면 되는데, 자꾸 일어나니까 자꾸 맞고 자꾸 쓰러지는 것이다.

“저 아 새끼래 와 자꾸만 일어나네?” (우리 아이 왜 자꾸 일어나는가?)


그러나 홍수환 선수는 포기하지 않고 5번이나 일어났다.

그리고 5번째 일어난 자리에서 그는 카라스키야를 누르고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그 뒤로도 이혼, 사업실패, 인생실패로 계속 쓰러졌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또 일어나, 이제 전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여러분, 홍수환 선수처럼 다시 벌떡 일어나게 되시기 바란다.



▲마치는 말

갈채와 돌맹이는 거기서 거기다. 둘 다 비슷하다.

갈채를 받고 우쭐거릴 필요 없고,

돌맹이 맞고 절망할 필요 없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 돌맹이가 내게로 날아온다.

질병이라는 돌맹이, 궁핍이라는 돌맹이,

실패라는 돌맹이, 비난이라는 돌맹이,


피하지 않고 맞아야, 그래서 쓰러지겠지만

거기서 다시 일어나야,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된다.

나를 ‘갈채 중독’에서 ‘겸손한 종’으로 변화시킨다.


바울이 돌맹이를 맞았던 루스드라에 다시 들어간 것은,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친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믿음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다시 벌떡 일어선다.

낙심, 실망,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돌을 던지라’며 나아간다.

다시 성 안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사도바울의 능력’이 그 때 무장되었다.


<08.03.30.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고집이 세고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너를 그들처럼 억세고 굳세게 하며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부싯돌보다 더 단단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겔3:7~9

 

[주제별 분류] 삶의 통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