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인 단락의 성경해석 막7:24~30 스크랩
막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디모데후서 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래서 성경은 1)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거룩한 책이지만
2) 영혼구원의 과정인 ‘영적성숙’의 과정에서
삶의 여러 교훈(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주된 목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주변적인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주된 목적'을 무시한 채, '주변적 해석'으로 설교의 기승전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가는 것이지, 객차가 기관차를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래는 본문의 '주변적 해석'과 '주된 해석'을 구분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의 주변적인 해석
▲1. 수치심
위 본문을 서론에서‘수치심’의 관점으로 풀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의 자존감을 지키는 심리적 방어 기제입니다.
누구도 숨기고 싶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거나,
지켜야 할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 신제가 발가벗겨지거나, 사생활의 비밀이 남김없이 알려지는 것도
참기 힘든 수치심을 일으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당하는 일이 죽기보다 싫어서 결국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이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자존심이 철저히 무시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그것을 참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수치심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런 설교도 맞는 말이고,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결론으로 가는 여정에서, 한 곁가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이 관점이 본문의 <결론>이 된다면,
성경 저자의 원래 의도를 오해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2.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주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나중에 커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에
늘 병을 달고 살았고, 그래서 할아버지까지 모든 집안에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할머니가 용하다는 한의사는 다 찾아다니며 약을 지어왔고,
어머니도 기도원에 가셔서 늘 기도하실 만큼, 제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도 어머니의 재촉으로 같이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감동하셔서, 저희 부모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제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도 맞는 말이고,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결론으로 가는 여정에서, 한 곁가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이 관점이 본문의 <결론>이 된다면,
성경 저자의 원래 의도를 오해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3. ‘부스러기’에 초점을 맞춘 설교
‘개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막1:28
우리는 부스러기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부스러기 같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부스러기도 귀하게 보십니다.
주님은 부스러기같은 자들을 통해서
주님 나라의 역사를 다시금 써내려 가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작은 부스러기와 같은 인생이라도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설교도 맞는 말이고,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결론으로 가는 여정에서, 한 곁가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이 관점이 본문의 <결론>이 된다면,
성경 저자의 원래 의도를 오해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4. '끈질긴 기도'에 초점을 맞춘 해석
계속적으로 내치는 예수님의 언사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은혜를 구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끈질긴 기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기도’라는
설교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게 과연 본문을 쓰신 성령님의 의도일까요?
◑본문을 기록한 본래 의도
본문의 배경은 두로입니다. 구약 때부터 이방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방인 수로보니게(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7:27
중략
그런데, 예수님의 이 냉혹한 처사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매정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강아지”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강아지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기록의 원래 의도
그리하여, “먼저” 자녀들이 먹을 같은 빵을
‘동시에’ 같은 상 아래에서 먹게 됩니다.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간 것입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어거스틴은“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과도한‘선민 의식’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종적 선민의식, 인종우월/멸시의식
-민족적 선민의식, 아리안족 우월의식, 한민족 우월의식 등
-교파적 선민의식 (우리 교파, 교단이 정통이고 나머지는 비 정통)
-출신학교적 선민의식 (특정 학교, 특정 신학교 출신이 가지는 엘리트 의식)
-도덕적 선민의식 (바리새적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지역적 선민의식 (우리가 서울, 센터에 위치한 교회, 우리가 교단 대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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