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봉사자들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19
◑시각 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 [출처보기 클릭]
스물 한 명의 자원봉사자...
아나운서, 성우, 가수, 작가, 엔지니어, 교사, 직장인, 교수, 배우...
다양한 분야의 선한 사람들이 모여 봉사하는
종달새 사서함 6640..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낭독봉사이다..
한 달에 한 번..또는 두 번씩
각자 정해진 날짜에 따라 그 날의 봉사를 책임진다
책을 선정하고, 읽을 부분을 연습하고
마음을 다해 읽어 내려간다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종달새 사서함이 있어서
정보접근이 쉽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은 책을 들을 수 있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봉사자들의 정성까지도 ...
책 읽어 주는 사람들..
책을 듣는 사람들..
종달새가 맺어준 귀한 인연이다...
그저 봉사할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한데도,
성음회에서는 우리에게 상을 내렸다...
너무도 귀한 감사패를...
서로 감사할 수 있는 따뜻함...
그게 참 좋다...
◑민들레 국숫집 이야기
인천 화수동에는 허름하고 좁은 ‘민들레 국숫집’이 있다.
서영남 형님이 주인장이고 손님은 주로 노숙자들이다.
국숫집이지만 국수가 아니라 밥을 공짜로 나누는 식당이다.
지금은 꽤 소문이 나서 멀리 서울에서도 손님이 찾아온다.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지만
아직도 각종 언론에서 민들레 국숫집을 소개하고 있다.
막 언론에 소개되기 시작할 무렵 서영남 형님이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언론 취재를 허락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착한 일을 할 때 쥐도 새도 모르게 하라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난 주제넘게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도 거의 모든 무료 식당에서 사람들을 줄 세워 밥을 주잖아요.
손님이 아니라 봉사하는 자기들 편하자고요.
그러니 다른 곳도 민들레 국숫집처럼 손님을 VIP로 환대하기 전까지
소문을 내세요.
민들레 국숫집 같은 집이 전국 곳곳에 생겨날 수 있도록 소문을 내세요.”
밥을 주는 건 민들레 국숫집이 하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민들레 국숫집은 노숙자가 그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다.
모든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이 세상에서 노숙자에게 열린 하나뿐인 비상구다.
굶주려 몸도 마음도 무너졌던 사람들이 국숫집을 통해 다시 일어나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기적을 나는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이 기적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술에 절고 고약한 냄새가 나서
우리가 기겁하고 달아나는 노숙자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손님으로 환대하는
서영남 형님의 소박한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다.
◑집 없는 여성들의 사는 얘기 [출처보기 클릭]
▶봄꽃망울이 터지던 3월 중순, 75세의 할머니가 우리들의 <좋은집>을 찾았다.
나이가 많아 일자리 찾기도 힘들고,
일찌감치 사별하면서 시댁에서 쫓겨났기에 돌봐줄 자녀도 없었단다.
동사무소에 가서 혹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가 될 수 있는지 상담했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이 있어서 자녀들의 재산도 확인해야 된다는 얘길 듣고,
혹시 키우지도 못한 자녀들에게 누가 될까 싶어 신청은 포기했다.
한 달 가량을 잘 먹지를 못하다가 드디어는 월세를 못내 단칸방서도 쫓겨났고,
열흘쯤 아는 집에서 더부살이했다.
눈치가 보여 더 이상은 있을 수 없어서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좋은집 식구가 되었다.
바짝 마른 몸으로 좋은집을 찾은 김OO 할머니, 다행히도 치아가 건강해서
요즘 매 끼니 꼭꼭 씹어 맛나게 잘 드시고 있다.
▶윤OO 샘은 방이 없어서 찜질방에서 생활하다가 좋은집에 오게 된 분이다.
일찍 이혼하고, 젊은 시절 내내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윤샘은
몇 년전 그만 과로로 쓰러져 가진 것 대부분을 잃었다.
입원하고 있던 사이 받을 돈도 많이 떼였고,
그 충격으로 언어장애를 갖게 되면서 장사는 하기 힘들어졌다.
이후 2년여를 식당일을 하며 근근이 살았는데...,
여러 일자리에서 윤샘의 어눌한 말투를 문제삼아 오래 지속하질 못했다.
좋은집에 오고 나서 윤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노숙인을 위한 다시서기 고용안정센터에서 정보를 얻어,
멀리 양재동의 빌딩청소 일을 하게 되었다. 새벽4시에 일어나 나가야 하는
고단한 일이지만, 요즘 그 일 때문에 즐겁다고 말씀하신다.
▶“선생님 OO예요, 오늘만 재워주세요”,
“아이고, 샘은 여기서 생활할 수 없다니까요”.
밤 12시가 다 되어 쉼터 현관에서 가끔 이런 실갱이가 생기곤 한다.
그 주인공인 이샘은 정부로부터 최저생활을 보장받는다는 수급권자다.
한 달에 약 4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받는다.
헌데, 몇 달 전부터 월세를 못내 쫓겨났고,
친지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다가 그마저 힘든 날엔 아무 처마 밑에서나
잠 잘 때도 있다.
이샘은 간혹 껌을 팔러 다니는데, 그러다 어떤 날은 좋은집에서 며칠 지내게
해 달라고 찾아온다.
생계보조비를 받으면서는 정부가 보조하는 사회복지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규정을 설명해도 소용없다.
정히 생활을 꾸려가기 힘들면 생계비 받지 말고 우리랑 여기서 살자고 해 보지만,
그럴까요? 하고는 다음날 그냥 나가버린다.
“도대체 생활비는 어쩌고 이렇게 다니시는 거예요?” 물었다.
알고 보니, 수급권자로 생활비를 받기 전에 껌팔이도 안 되고
돈이 없어서 빚을 200만원 졌단다.
자신은 얼른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생계비는 모두 거기에 쓴다는 거다.
이샘은 실무자들 심정도 꿰뚫고 있어서 이렇게 선수를 친다.
“이리 허리가 굽은 늙은이가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요?
제가 그냥 가면 선생님도 마음이 아프잖아요.”,
“허-, 참”...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의
수준은 이 정도이고, 그 틈새에서 해소되지 않은 욕구를 가진 분들은
계속 좋은집을 찾아온다.
▶몹시 추웠던 1월 말, 권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좋은집 개소 초기에 “여기가 내 딸이 해 준 내 집이야!, 나 일 좀 보게 방 하나
내 줘”라고 주장하며 우리를 무던히 힘들게 하던 분.
그 권 아주머니가 실무자도 모르게 방에 들어가 슬그머니 이불을 펴고 누워 있었다.
좋은집에서 퇴소된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했었고 퇴원한 지 몇 달 되었단다.
권 아주머니는 짐이 많다. 등에는 무언가 꽉 찬 가방을 매고,
양 손에도 커다란 보따리 두 개를 가지고 다닌다.
그 짐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심지어 밥을 먹으러 거실 올 때도 짐을 끌고
와 옆에 두고 먹곤 한다. 어느 날 지방에 갖다 올 일이 있다며 가방을 다시 싸면서
“야야- 내 신세가 이리 고단하다”며 신세한탄을 했다.
“그러게, 그건 사물함에 두고 다니지 무거운 걸 왜 갖고 다니는데요?” 물었다.
“여기? 보여줄까? 정말 중요한 서류 들었어. 이걸 접수를 해야 하는데,
어디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하며 가방을 열어 보인다.
가방 하나 가득 손글씨로 빼곡하니 적은 서류들뿐이다.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권 아주머니의 생각은 진짜 현실이 아닌 망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권 아주머니에겐 엄연한 현실이고, 그런 생각과 행동을 계속하는 한,
권 아주머니를 반기는 곳은 거의 없다.
그래서 적어도 지금은 좋은집이 권 아주머니의 마지막 보금자리이다.
◑'영등포 슈바이처' 선우경식 박사 별세
[중앙일보 강기헌]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린 요셉의원 선우경식 (63) 원장이
08.04.18일 오전 4시 서울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에서 별세했다.
21년 동안 극빈층과 노숙자에게 무료로 진료 활동을 펼친 선우 원장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15일 뇌출혈을 일으킨 지 3일 만이다.
1969년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한 선우 원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센터에서 내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도 잘나가는 병원에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선우 원장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한림대 병원에서 잠시 근무하던 그는 83년부터
당시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관악구 신림동에서 무료 의술 봉사를 했다.
당시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던 그곳에서 선우 원장은 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환자를 업고 다니며 자원봉사를 펼쳤다.
봉사활동을 이끌던 한 신부가 그에게 계속 남아 진료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는 87년 8월 신림 1동에 무료 자선 병원인 요셉의원을 세웠다.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이다.
당시엔 전 국민 건강보험이 시행되기 전이라
빈민들은 아파도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의 병원은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개원 초기 운영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의료기구는 성모병원에서 쓰던 것을 얻어 와야 했다.
의약품을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한 한 회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가난한 병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을 보며 버텼다.
요셉의원은 97년 5월 영등포 역사 뒤편에 있는 쪽방촌으로 옮겨 왔다.
지금까지 42만 명의 영세민 환자와 노숙자, 외국인 근로자가 이 병원을 거쳐 갔다.
현재 요셉의원은 자원봉사에 나서 교대로 무료 진료를 해 주는
80명의 의사·간호사와 일반 봉사자 600여 명이 꾸려 가고 있다.
매월 2천여 명의 후원자가 1천원에서 몇 만원까지 보내 주는 기부금이
재정의 전부다.
선우 원장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61년 선친이 지은 작은 집에서 그대로 살아왔다.
미국에 사는 여동생들이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나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거부했다고 한다.
선우 원장은 2003년 호암상(사회봉사 부문)을 받았다.
"폐인이 다된 사람이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
취직이라도 해 바나나 한 봉지 사 들고 찾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맛을 알면 이 일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죠."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중독 된 사람 같았다.
"주머니가 부르면 딴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 말해 왔던 선우 원장은
의사자격증 하나만을 남긴 채 영면의 길을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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