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신학 눅23:32-38
원수가 내게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를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지식을 거부하는 죄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사람에게 언제나 3가지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①첫째는 <공부하지 않는 죄>입니다. 사람은 공부해야 됩니다.
계속 배워야 되는데, 배우는 자세를 잃어버렸을 때
인간됨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둘째 죄는 <알고도 행치 않는 것>입니다.
공부는 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또한 죄라는 것입니다.
③셋째는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내가 알았으면 가르쳐야죠. 또 소중한 진리라면 남과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는 죄, 그것 또한 큰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식도 죄입니다.
결국, 죄 중에 가장 완고한 죄는 <무식이라는 죄>입니다.
지식을 거부하는 죄입니다.
호세아 4: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네가 지식을 버렸음으로 내가 너를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호4:6
지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잘못된 지식에 매여서 새로운 지식을 거부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감옥에 갇혀서, 새로운 지식에 대해 전혀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것도 무서운 죄입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지식을 없애 버렸던 레닌
레닌은 구소련 연방을 창건한 광신적인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와 함께 혁명을 일으켰던 동료가 레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레닌은 혁명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자나 먹으나 깨나, 꿈도 혁명 꿈을 꾸었다.
혁명이란 부르주아를 없애는 것이다. 부자를 없애는 것이다.
지주와 권력자를 없애고, 지성인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 혁명, 혁명! 이것을 한평생 외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역사를 전진시킨 것이 아니라 후퇴시켰습니다.
복지사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
수백만 명을 숙청하면서까지 혁명을 이루어보겠다고 몸부림을 쳐서,
그 넓은 광활한 러시아 땅을 거지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러시아를 한번 여행해 보세요. 아, 그렇게 땅이 넓을 수 없어요.
그렇게 비옥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좋은 여건인데 왜 못 사나? 왜 거지가 됐나?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 때문에,
<잘못된 지식> 때문에 거기에 붙들려 있는 동안
그만 자기도 죽고, 많은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역사를 후퇴 시켜 놓은 사람이 되고 말았더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바른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무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다.
요11:49절에, 가야바라는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이 큰 소리를 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자기는 안다는 얘기죠.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죽여!"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그가 의인인지, 죄인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바 아니다. 죽여 버려!’
이것이 가야바의 이론, 가야바의 철학이에요.
이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고
저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지는 하나님의 심판
가장 불쌍한 것은 진리를 떠나는 것이요. 진리를 모르는 무지함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무지란 하나님의 엄연한 현재적 심판입니다. 현재적 심판.
집행은 잠깐 유예되어 있지만 벌써 정신세계에서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고집과 집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무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용서’가 없었다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무지한 사람들을 십자가상에서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용서하소서.
이 기도는 너무나 소중한 기도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한마디가 없었다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좀 외람된 얘기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 보자. 심판 날에 전부 지옥불로 쳐넣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맞습니까?)
'아니 세상에 이럴 수 있나. 내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병고치고, 가르치고 얼마나 많이 했는데 마지막에 이 꼴이 뭐람?'
세상을 그렇게 한탄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맞습니까?)
'아니 내가 3년이나 가르쳐 놨는데, 이 제자들이란 자들은 도대체 뭐람?
어느 하나, 나와 같이 십자가에 죽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이게 제자들인가!'
만약 이렇게 원망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절박하게, 바로 그 모순된 부조리의 십자가를 지면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들을 사하소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침묵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가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려오라. 남의 병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던 사람이 아니냐?
그렇게 능력이 많은 사람인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내가 믿겠노라.'
이렇게 조소를 합니다. 비웃습니다.
이 비웃음을 당하면서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여러분, 이 순간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시던 분입니다.
큰 권세와 능력의 메시야가 이 많은 조소를 들으면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믿겠노라'
하는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침묵했습니다.
(만약 침묵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응대하셨더라면,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침묵하세요! 침묵해야 의인인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대응사격 한다면.., 의인이 아닌 것입니다. 똑같은 부류죠.
◑영화 <밀양>이 던지는 질문
▲핵심 주제는 <용서>의 문제
여러분 <밀양>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그 작품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깊은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데요...
그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신애(전도연 역)입니다.
그의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아들 하나를 남겼어요.
그래서 그 아들 하나만은 제대로 잘 키워보고 싶어요.
그래서 생전 가보지도 못한 곳이지만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라서
애를 데리고 낯선 밀양으로 이사를 갑니다.
거기 가서 애 하나에다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이 아이가 유괴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어요.
서울서 온 사람이라서 돈이나 있는 줄 알고, 누가 유괴해서 죽여 버렸어요.
유일한 소망인 아들이 죽었어요. 아, 얼마나 비통하겠어요?
그래서 몸부림을 칩니다. 막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이 잡혔어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던 중에, 교회에 나갔어요.
그런대로 믿음을 얻었어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몸부림을 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지막에는 여기까지 생각을 했어요.
'용서해야지.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까짓것 용서해야지.
내가 이런다고 죽은 애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용서해야지!'
그 마음으로, 많은 사람이 말리지만, 끝내 용서하기 위해서 감옥을 찾아갑니다.
용서하려고 찾아 갔는데, 면회하는 시간에 그 유괴범이 딱 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이미 죄 사함 받았습니다." 이러고 나와요.
신애는 그만 화가 났어요.
'내가 용서 안 하는데 누가 용서했냐?' 이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 말이 되거든요.
내가 원문을 읽을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라기보다,
이미 내가 그러고 싶었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저를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나 먼저 저를 용서한단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 먼저 용서받을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를 빼앗아 가버린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마는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저를 용서한단 말이에요. - 이게 핵심입니다.
신애가 바라는 것은, 이 유괴범이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지어 잘못했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러고 나서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가 용서하기 전에 벌써 용서받았다고 그럽니다. 여기서 화가 난 거예요.
그 몸부림을 치는 건 이루 말도 못해요.
▲도덕적 용서 와 신앙적 용서
여러분,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해요? 나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또 용서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큰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오늘 예수님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도덕적 용서가 아니에요. 이건 신앙적 용서예요. 이거 꼭 잊지 마세요.
저가 나에게 용서를 빌었기에 내가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도덕적 용서 차원)
아니 용서라고 하는 높은 덕성으로 내가 저를 용서하는 것도 아니에요.
주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도 용서할 뿐이에요. (신앙적 용서 차원)
▲도덕적 용서에서 신앙적 용서로 차원을 바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내게 찾아와서 ‘용서를 비는 사람’은... 용서하기가 비교적 쉬워요.
아니 제 잘못을 깨닫고 ‘침묵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와서 용서를 빌지도 않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조용히 침묵하지도 않고,
도리어 떠들고 난리치고 나를 조롱하는 사람을... 과연 용서해야 하나요?
그러나 우리의 용서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는 걸(신앙적 용서 차원에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노라'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내가 용서하노라'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의 기도부터 시작됩니다.)
▲최고의 사랑은 용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최고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구제가 아니에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용서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미움, 증오, 원망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거예요.
최고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긍휼입니다.
이것은 높은 차원입니다.
높은 차원에서 낮은 자를 향한 긍휼,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용서 안 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마18:21절에 보면 넌센스가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다 보니까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하시거든요.
베드로가 기가 막혀서 물었어요. '몇 번 용서할까요? 한 일곱 번쯤 용서할까요?'
그랬더니 예수님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이제 여러분, 할 말 있습니까?
여러분, 이거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용서 없이는 자유가 없어요.
용서 없이는 내 영혼이 깨끗할 수 없어요. 아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요.
이건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마18:35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천국 문을 들어설 수가 없어요.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벤허의 용서 비결
여러분, <벤허> 영화를 보셨지요?
벤허에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벤허가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노예로 팔려가서 매 맞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끝까지 대항하지 않습니다.
박애주의자로서 끝까지 참고 견디고 인내합니다. 전혀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내와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영화속에서 누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찌 당신은 이렇게 끝까지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참고 견디느냐?’고.
그는 딱 한마디 대답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옆에 있었노라!'고.
예수님 그 모진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실 때
'그 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오는 순간 내 손에서 검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노라.
그 후로 나는 일생 손에 검을 쥐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서 그분의 용서에 깊이 감동, 체험한 사람은
벤허처럼, 일생 손에 검을 쥐지 않게 됩니다.)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이미 용서하신 주님
▲용서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 받은 나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하는 그 순간
그 속에 내가, ‘저들’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내가 회개 못하고 있어요. 회개할 마음도 없어요.
그러나 주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그때 십자가에서 용서받은 사람들 중에, 바로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을 알아야 돼요.
(즉, 내가 주님께 용서를 빌기도 전에, 이미 나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정죄할 권리 없다.
여러분, 여기에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요.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정죄할 자격도 없습니다.
누구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소라도 어두운 그림자(용서 못 하는)가 있습니까?
그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십니까? 깊이 반성해 보세요.
누구나 용서 못하는 사건이 있어요.
‘아니 이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지금 내가 죽어가고, 내가 병들어 가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회개치 못한 자들을 위한 주님의 용서
예수님은 더 신비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의역해서 풀이를 한다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고, 도리에 제게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주여, 저들 대신 내가 지금 죽고 있습니다.
속죄 제물로 내가 대신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대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사하소서.'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하는 예수님의 외침이 오늘 내 귀에 들려옵니까?
들려오는 순간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용서받은 사람으로,
아니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엄청난 용서를 받았고 또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건만
아직도 우리는 당연히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도 못하고
아니 이러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아직도 마음에 맺힌 바를 풀지 못하고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시던 그 귀한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게 하사
용서받은 사람으로, 아니 용서하는 사람으로서,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08.04.27.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원제목 :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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