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 안에 있는 3가지 물건 히9:4 08.02.17.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이곳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 제단과 전부를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습니다. 히9:4
이 세 가지 물건이 얼마나 중요하면, 그것을 법궤에 담아
지성소 가장 깊은 곳(지성소 가장 안쪽 벽면 가까이)에 보관하게 하셨을까?
그리고 이것들을 위에서 그룹 천사(의 형상)들이 날개를 펴고 지키고 있다.
◑1. 십계명 돌비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그런 십계명을 법궤에 넣어, 지성소에 보관하게 하셨다.
이것은, 그 십계명의 말씀은 끊임없이 후대에 계속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 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영원히 들려져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씀을 계속 배워야 한다.
언약궤를 운반할 때, 소가 요동치자 제사장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다 즉사했다.
웃사가 법궤를 붙잡은 일이 뭐가 그리 크게 잘못되었는가?
여러분, 그 시대에 다윗과 레위인들이 성경에 대해 무지했다는 단적인 예다.
출애굽기 25장 등 구약 몇몇 곳에서는, 법궤를 운반할 때는,
반드시 제사장, 레위인들이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 어깨에 메게 되어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도 법궤를 어깨에 매고 건넜다.
엘리 제사장 때 언약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돌려받을 때,
블레셋이 소가 끄는 수레에 태워 보냈던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것을 보고, 따라해서 수레로 운반했던 것 같다.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는 것이, 아마 더 거창하고 폼이 나지 않았을까?)
사실 여러 사람이 죽어야 했었는데, 하나님은 자비로 웃사 한 사람만 치셨다.
여러 사람의 ‘말씀의 무지’에 대한 징벌을, 웃사가 대표로 받은 것이다.
여러분, 당시에 엄청난 제사장들이 있었고, 다윗도 성경을 많이 묵상했을 터인데,
그들은 말씀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치심을 받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도, 계속 배워야 한다. 말씀에 대한 무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다가는... 웃사의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다행히 다윗은 석 달 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다시 제대로 운반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말씀에 대한 무지가 없도록... 늘 겸손히 평생 배우는 자세를 가지자.
끊임없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께 묻고,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하겠다.
◑2. 만나를 넣어두신 목적
‘내가 내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먹이지 않았느냐?
이 만나를 보고, 너희들은 먹고 사는 것을 너무 걱정하지 말라!’
→ 이것이 만나를 법궤에 넣어 보관하게 하신 목적이다.
여러분,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너무 걱정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만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신에 들에 핀 ‘백합화’가 있고, 공중에 나는 ‘새’가 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의식주 위주의 삶>을 살지 말라고 하셨다.
‘너희가 저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대신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명하셨다.
제일 큰 문제는 ‘염려’이다. ‘염려’를 극복해야 한다.
실제로 의식주 문제가 10이라면, 그 중 9할은 ‘염려’이다.
염려만 극복할 수 있으면, 의식주 문제는 사실 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먹고 살게 되어 있다.(무책임한 말 같지만)
그러므로 의식주 문제의 해결은
‘염려’를 해결해 나가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이런 예가 합당한지 모르지만, 사실 어린애가 주사를 맞는 것은 따끔할 뿐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번 주간에 예방 접종이 있습니다!’ 이렇게 공고하면,
아이들은 따끔한 아픔보다 몇 십 배의 ‘염려’에서 오는 고통을 느낀다.
◑3.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십은 모세와 아론이었다.
그런데 다른 지도자들이 그 권위에 대항하자,
다른 지도자들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지 않았고,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그 백성을 이끌어내시겠다는
‘권위를 부여’해 주신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직접 우리 교회, 직장을 다스리지 않으신다.
천사를 보내시는 것도 아니다. (아주 드물게 특별한 경우라면 몰라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권세에 복종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회사의 사장님이 예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 분이 여러분 위에 세워진 권위(권세)임을 잊지 마시라.
그 권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그 권위에 어떻게 관계를 잘 맺고, 그에게 복종하며 지내는 삶을
어른이 되면서 점점 배워나가야 한다.
부부사이에도 ‘권위’(하나님이 세우신 권세)가 있다.
부부가 서로 동등하지만,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한 가정의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리시되,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다스리신 것처럼,
오늘도 ‘권세를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
<하나님이 내 위에 세우신 권세가 누구인가?>를 늘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한다.
그 권세가 명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다면)
우리는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법궤 속에 넣어서 영원토록 보관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08.05.04.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편집
◑언약궤의 재료는 흔한 나무
하나님은 율법과 동시에 성막을 주셨다.
율법은 죄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성막은 죄를 사하는 장치이다.
하나님은 공의와 은혜를 항상 동시에 다루신다.
언약궤의 재료를 보면, 약해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
성경에 싯딤목, 조각목 이렇게 설명되어 있는데, 아카시아 나무와 동일하다.
한국에도 그렇듯이, 아카시아 나무는 이스라엘에 매우 흔한 나무이다.
(반면에 백향목은 귀한 나무이다.)
하나님의 귀한 언약궤를 백향목으로 만들지 않고,
흔해 빠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것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데...
아카시아 나무는,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데,
굽고 옹이가 많아서 사실 가구용 목재로는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존귀한 백향목을 부르지 않으시고, 흔한 아카시아 같은 자들을 부르신다.
그 험한 나무를 잘 다듬으시고, 그 위에 금을 입혀서 영광스럽게 도구로 쓰신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사49:2
비록 우리는 아카시아 나무처럼 연약한 자들이지만
입술에 말씀이 있으면, 날카로운 칼, 화살 같이 된다.
신약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했다. 히4:12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날카로운 말씀의 검을 구비한 자는,
존귀한 자로 주님께 쓰임 받는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다녔듯이
연약한 자라도 ‘주님의 임재’를 모시고 다니는 영광스런 존재가 될 수 있다.
언약궤는 ‘말씀의 임재’라고도 볼 수 있다. ‘언약’이 ‘말씀’ 아닌가!
비록 아카시아 나무라도, ‘말씀의 임재’를 담는, 존귀한 그릇들 되시기 바란다.
▲중동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다루는 법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카시아 나무를 두고 ‘개 뒷다리 같다’고 말한다.
굽고 꺾어져 있다는 뜻이다. 목공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무가 귀한 동네이니까, 굽어진 아카시아 나무도 펴서 쓰는데,
먼저 불에 나무를 데운 후에, 양쪽에서 잡아당긴다고 한다.
그러면 굽고 휘어진 부분도 약간 펴진다.
그리고 옹이 같은 돌출부위는 사포로 매끈하게 닦아서 ... 그렇게 쓴다고 한다.
그런 다듬는 작업을 하는 데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아카시아 나무는 그냥은 못 쓴다.
앞서 우리가 흔한 아카시아 나무와 같다고 했는데, (귀한 백향목 같지 않고)
흔한 아카시아 나무라고 무조건 쓰임 받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연단의 과정을 거친 후에, 언약궤(말씀을 담는 그릇)로 쓰임 받는 것이다.
▲신학적 지식이 낮은 사람이 설교를 잘 하는 이유
신학 지식이나 실력이 낮은 사람은,
자기가 워낙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 하려고 발버둥 친다.
그런 가운데서, 좀 촌스러워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잘 증거 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그런 ‘무식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반면에 똑똑하고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은,
워낙 공부도 많이 해서 아는 것도 많아서인지,
<하나님 말씀>은 일부분이 증거 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학설, 히브리어, 헬라어... 이런 것들이 주로 증거 된다.
그 결과는 뻔하다.
백향목, 아카시아 나무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담고 있어야 영광스러워진다.
▲금 아래 숨겨진 아카시아
언약궤를 금으로 입혔는데, 그 아래는 아카시아 이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들은, 금처럼 빛나고 영광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모두 연약한 아카시아 이다.
아카시아의 옹이(돌출부)와 굽어진 것들이
칼로 깎여지고, 불로 펴지고, 사포로 잘 다듬어지면,
하나님은 그 위에 금을 입히신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권위로 인한 영광스러움을 뜻함)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사49:2
하나님은 ‘마광한 살’ 즉 잘 갈아진 날카로운 화살촉 같은 당신의 사역자들을
그 화살통(전통)에 잘 숨기신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를 위하여, 고이 준비하신다. <08.02.17.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