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계승 민 20:22-29 2008.05.11.
진정한 효도는, 부모를 잘 섬기고, 잘 대접해 드리는 차원을 넘어서
부모의 소명, 정신자원, 사명과 업적을 자녀 세대가 잘 계승하는 것이다.
부모의 소천은, 이런 엄숙한 하나님께 받은 사명감의 임무교대식이다...
호르 산(에돔의 변두리)에서 지도자 아론의 죽음 사건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아론’의 죽음이 남긴
두 가지 레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은 누구나 공과를 남긴다.
▲흑백 논리적 인물 평가는 불합리
우리 한국인들의 인물 평가는 늘 흑백 논리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도 완벽하게 결함이 없는 삶을 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의 삶의 장에서도
한 두 가지 결함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한 두가지 소위 결함의 흔적 때문에
그의 삶의 가치 자체를 온통 부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인생의 ‘우상화’도 허용하지 않습니다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허물로 인한 그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는 일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어떤 믿음의 사람도
흠이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과오나 허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을 여전히 믿음의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해서 장미의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영어의 ‘beautiful’이란 단어에는 ‘티’(t)가 들어가 있다고
조크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과오에도 불구하고, 아론을 존경한 이스라엘
아론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의 리더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은 므리바의 거역 사건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안타깝게 기술합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민20:24
성경은 그의 거역을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시내 산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이나
‘미리암의 모세의 후처(구스 여인) 시기 사건’ 등의 책임에서도
아론은 자유로운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론의 거역을 고발하는 것만이
본문 기록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수기 20장의 마지막 29절을 읽어 보십시오.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일 동안 애곡 하였더라 민20:29
‘30일간의 애곡’은 한 지도자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의 경의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론에게 약점이나 허물이 있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그의 기여를 함께 망각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 곁에서 제2인자로, 모세의 대언자로, 말없이 백성을 리드했던
아론의 소중한 기여를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은 철저하게 평화 지향적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조부 라반 힐렐(Hillel)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론 같이 되십시오. 그는 화평을 사랑하고 화평을 추구하며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아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
(오늘 어버이 주일에)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부모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인간이기에 결코 완전할 수 없었던 우리의 부모님들도
아론처럼 공과가 함께 공존하는 삶의 유산을 남긴 분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부모의 어떤 허물 때문에,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그 지극한 헌신까지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된 우리도 결코 완전하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과연 우리가 부모를 원망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들 부모님들의 인생의 비틀거림이
많은 경우 우리 자식들 뒤치닥거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면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부모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는 부모
최근 인터넷 서핑 중에 발견한 어떤 아버지가
자기 어린 딸에게 보낸 인터넷 편지를 읽고, 잠시 유쾌한 웃음을 웃었습니다.
마지막 문단만 읽어 보겠습니다.
“가빈아, 저번에 니가 노래를 불러 주었잖냐?
<아빠, 힘내세요, 가빈이가 있잖아요!>라고.
그 노래 제목이 ‘아빠, 힘 내세요’ 이구나.
그런데 가빈아, 아빠가 진짜 힘든 게 뭔지 아니?
진짜로 힘든 건 바로 너 때문이다.
우선 한 달 놀이방비가 25만원이라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니?
6개월로 계산해 보자. 순순히 놀이방비만 해도 150만원이더구나.
거기다가 간식비, 견학비, 책값, 니가 대학생이니?
아빠는 요즈음 미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그러니 가빈아, 앞으로 아빠 앞에서는 그런 노래하지 말라.
니가 노래 부르면, '아빠 힘내서 돈 벌어오라'는 주술 소리로만 들린단다.”
거창한 부모님 효도를 들먹이지 않아도
저는 이 시대의 자녀들이 부모님 입장을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 가정의 분위기는 매우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2. 선배의 사역은 계승되어야 한다.
▲역사는 반드시 계승되는 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이다.
그러므로 부모 세대를 비판하면 안 된다. 한 배에 탄 자기를 비판하는 것임.
우리의 부모들은 큰 그림으로 본 다면 우리의 인생의 선배들이십니다.
그들은 결코 완전했던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치열한 삶의 소명은 후배들인 자녀들에게 계승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부모가 하시던 일을
그대로 자녀가 이어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목적에는
큰 그림으로 ‘역사의 계승’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모 세대에서 모든 것을 완결하지 않으신 이유는,
즉, 그 자손 세대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도 이런 의미를 잘 담고 있습니다.
▲부모의 소천은 엄숙한 바톤 터치
그래서 부모가 죽고 자손이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은
매우 엄숙한 바톤 터치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비판하던 그 부모의 자리에 서서
우리가 다음 세대의 비판을 받아가며 <역사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류는 한 사람의 죽음을 그냥 사건이 아닌 장례
곧 의식으로 치루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엄숙한 바톤 터치
아론의 죽음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론이 죽기 전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아론이 그 아들을 데리고 호르산에 함께 설 것을 명하십니다.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민20:26
그 명령이 수행되는 2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민20:28
얼마나 엄숙한 임무 교대의 순간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으로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는 ‘공동체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의 이름이 엘르아살이었던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엘르아살,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새로운 리더가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효도보다 더 중요한 것 - 계승
그래서 자녀인 후배는 부모인 선배를 계승하여
선배가 다하지 못한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을 완성하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생각하는 이 계절(5월 가정의 달)
부모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부모님의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부모 세대의 사명을 다음 세대가 고스란히 계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부모 세대를 통해, 우리에게 연속해서 명하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통해, 내게 계승되어져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 날 단순한 효도를 결심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의미 있는 물음이 아니겠습니까?
▲감동적인 부자父子
작년(2007년) 5월에 시각 장애인 송경태 씨(47세, 시각 장애인 도서관장)가
아들(21세)과 함께 해발 3~4천m의 고지에 위치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 코스를 6박 7일간 완주한 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로서 송 관장은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에 이어
세계 3대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송 관장에게, 산소가 희박한 그 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준한 그 코스를 달리며
포기의 유혹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왜 없었겠어요, 너무 여러번 있었지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 아들 때문이지요.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하게 될 까봐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이 마라톤에 참여한 아들의 고백도 유사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눈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회 4일째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달리시는데--하며 달렸지요”
250km의 결승지점을 통과하고 포옹을 한 부자는
너무 감격해서 오래 동안 서로 포옹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아들은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이렇게 크고 시원한 것을 평소엔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막에서 아버지와 함께 달린 7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위 이야기가 어떻게 이 부자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도 인생의 사막을 달리는 수많은 부모들이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달리는 이유-자식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 자식들 중에도
이젠 부모들의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될 자녀들도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르 산에서 죽는 아론의 마지막 소감이 궁금해집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입고 있던 제사장의 옷을 입은 아들 엘르아살을 보는 순간
그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고백했을 것으로,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을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꼭 약속의 땅을 밟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르아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들 엘르아살이 그 땅을 밟을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감사함으로 하늘 아버지께로 가겠습니다.
제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