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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마음을 넓히라

LNCK 2008. 7. 21. 22:04

◈마음을 넓히라                 고후6장11-13              



11 고린도인 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제가 설교를 거의 처음 듣는 본문이라서, 스크랩 해 보았습니다<편집자.

 

(스크랩 출처를 밝히지 않을 때는, 출처 글의 내용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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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 자신은,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었다고 합니다.

‘입이 열렸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가르침)을 다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먼저,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하듯이 마음을 넓게 열었으니,

너희 자녀들도 (영적) 부모에게 보답하듯이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부모-자식처럼 탁 터놓고, 마음을 넓게 열고 대화하자고 합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 ‘마음이 좁아진’ 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촉구한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라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까?

예를 들면, 저희 아이들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중에 외할머니를 더 좋아합니다. 

외할머니는 한 번도 나무라는 적이 없습니다. 그저 좋게만 대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할머니는 잘못하면 나무랍니다.

우리 손녀들이 바르게 자라야한다는 사랑으로 하는데도

받는 아이들의 마음은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에 더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도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다른 곳으로 간 후에

다른 선생이라고 하는 자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와서 전하는 내용과 바울이 전하는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4

   

바울이 전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인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어야 한다는

외모를 중심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자랑하고 육체대로 말하는 자들의 설교를 듣다가,

바울이 자꾸 환란, 궁핍, 고난, 십자가...하니까, 고린도교인의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시간마다 인간의 죄를 이야기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 증거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이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발전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제가 전에 부목사로 있을 때에, 부목사가 둘이었는데 이런 문제로 서로 싸웠습니다.

수요 설교를 교대로 하게 되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게, “예수 믿고서 쪼그라들어야 정상인 것이냐?”며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믿고서 나의 삶이 만사형통하게 잘 풀리면

그것이 예수 믿는 증거가 분명한 것입니까?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어려움은 다 당하고

때로 믿지 아니할 때보다 더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증거가 아닌 것입니까?


“바쳐봐. 복 주나, 안 주나! 말라기서를 봐!”

이렇게 반말 투로 말하는 자들의 말을 떨쳐버리기가 왜 힘이 드는 것입니까?

우리 속에 그런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자랑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요 셋째 하늘까지 갔다 온 바울사도는

자기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이라고 합니다.  고후6:4~5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바울)을, 우리가 환영할 만하고 영접할 만한 사람입니까?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부담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멀리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저런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냐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능력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의 유혹은 예수님에게서만이 아니라

바울사도에게도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고 마귀가 유혹한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종교적인 기적, 세상의 영광에 대한 유혹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 좋은데, 성경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고 하니

그런 설교를 하는 사람과도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를 가까이 하고 싶은 것입니까?

외모를 자랑하고,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가까이하고 기꺼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자랑

그런 거짓 교사들을 어느 정도로 잘 영접하는지 고후11:19-20절을 봅시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 교인들이 영접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외모를 자랑하고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자고하다고 뺨을 치는데도 용납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용납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의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까봐서 두려운 것입니다.

또 그들의 말을 잘 들어서 축복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사도가 그런 자랑이라면 나는 너희들보다 하나도 못하지 아니하다면서

내가 어리석게 나의 육체를 자랑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자신의 사역을 말합니다.


그 어떤 누구도 바울사도 만큼 엄청나게 희생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사도를 멀리하고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사도가 그런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의 약함만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꾸만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지는 것입니다.


▲꼭 성공하고 나서야 주님을 잘 섬기는가?

어떤 집사님이, ‘예수를 믿고 부자가 되면 안 되는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란 무언가 소유가 많은 것을 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소유가 많은 것을 부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을 주려고 하면 내가 무엇이 있어야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부자가 되어서 많이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유란 것이 이상해서 어느 정도 소유하게 되면

구제는커녕, 점점 더 소유하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을 때부터 쪼개서 남을 돕는 사람이, 나중에 있어도 남을 돕습니다.


성도가 처음에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복음만으로는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의 종이라는 자들이 와서, 바울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세상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힘과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사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고후7:2절에 보시면,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고 속여 빼앗는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후7:2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해야 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에 대하여

좁아질 대로 좁아진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적 가르침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도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바울에 대해 우리 마음이 넓어지며,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고후6:10

바울사도의 근심이 무슨 근심이었습니까? 교회를 위한 근심과 염려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근심이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이유는, 근심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고후6:10

바울사도가 가난 하였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습니다.

자기 마음이 부요하기 때문에, 자꾸 사람들만 보면 뭐든지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거듭나지 못한 성도는, '누가 나를 도와 줄 것인가?'만 눈비비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가?'만 눈비비며 찾습니다. 

전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후자는 마음이 부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은 가진 자입니다.> 고후6:10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삶에 불만족이 많습니다.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으면,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삶에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06.05.07.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물질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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