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자와 달리는 자 빌3:12~4:1 -출처 보기-
◑‘이미’와 ‘아직’의 긴장 tension between already and not yet
빌3:12-13a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직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바로 앞 구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3:10~11
바울의 목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
즉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저 교회 나오다 안 나오다 그러는 사람도 아니고,
기분 좋으면 일하고 기분 나쁘면 그만두고 그러는 사람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을 내놓고,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서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직 얻지도 못했고, 목표점에 도달한 것도 아니며,
확실하게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에베소서 2:1-5에서 바울은 이렇게 확증합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둘 중 어떤 말이 참 말입니까?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구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까?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미 와 아직의 긴장 the tension between already and not yet>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역설paradox이 그에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빌3:13b-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건 지적인 수긍 (intellectual acceptance)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공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살던 생활방식을 버리고, 주님의 방식으로 전적으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는 것” living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15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흐르는 논리를 가만 살펴봅시다.
"한 사람,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이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구원'을 말하지 않고, '우리의 죽음'을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그 다음 구절이 해답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제 멋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서 살라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
그 분을 위해 사는 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사는 것 (living)입니다.
이 땅 위에서 멋있게 살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 할지라도,
내가 그 분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은 그 분을 위해서 산 사람에게 주시는 하늘의 은총이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로 만족하지 않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이 경주race를 계속해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중단 없는 과정' (on-going process)인 것입니다.
바울도 ,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서 있는 자와 달리는 자.
빌3:15-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갑시다 Let us walk.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성숙한 사람은 이미 얻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경주를 계속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미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고전10:1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미성숙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서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계속 걸어가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사람은 ‘내가 서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교회에서나 <서 있는 사람>과 <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서 있는 사람>에게는 남이 잘못하는 것이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서 있기 때문에, 남을 잘 볼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련예화 : 자기 사명에 집중하면 남의 허물이 안 보인다 (클릭)
바리새인들은 서 있었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비판했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교회에는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없고, 완전하신 예수님마저도
<서 있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들 땐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달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바울이 되게 교만하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얻지도 못했고, 도달하지도 못했고, 붙잡지도 못했다고 말한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교만에 찬 말도, 자신만만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함께 달리자 (Let's run together)!" - 이런 말입니다.
"우리처럼 달리지 않고 서 있으면, 남 죽이고, 교회 죽이고,
결국 자기 자신도 죽이게 된다!" - 이런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도대체 뭡니까?
서서 남 비판이나 하고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은 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는데, 목표 외에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구원 못 받을 사람도 있다.
빌3:18~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주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도 지옥 갈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건 빌립보 교회나 오늘날의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들은 진실되게 하나님 믿고, 의롭고, 순수하다고 하지만,
실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바울이 왜 그냥 "그리스도의 원수"라 하지 않고,
"십자가"라는 말을 하나 더 집어넣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 했을까요?
서 있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이고, 남을 비난하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를 망쳐놓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지막이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 이 뜻입니다.
▶그들은 "땅의 것만을 생각한다" 그랬습니다 (19절).
여러분, 자랑하는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의 가치관이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훌륭하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탑을 쌓아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만큼 했다"고 자랑하는 것이죠. 하늘에 탑을 쌓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빌3:20-4:1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 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
▶여러분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정확히 제목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베트남전을 그린 영화 한 편이 생각납니다.
미군이 베트남을 버리고 철수하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미 대사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진과 결혼증명서를 보여주면서, "내가 미군과 결혼했다"고,
"내가 그의 아내"라고 주장하지만, 외면당하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이 미국으로 가는 방법은, 자기 남편이 직접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미국 시민권이 있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아이를 안고 대사관 철창 사이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여인들의 모습과
사이공을 떠나는 미군 배가 오버랩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교회 다닌다고,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은 꼭 하늘나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시는 사람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서서 남 비판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좋은 일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시민권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민권 없는 사람들은 꼭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사진을 들고, 결혼증명서를 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나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 배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지금도 조용히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 누구의 잘못을 따지고 있는 사람들,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들 - 이런 사람들은 세상 안에 서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넘어져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필사의 각오로 달리는 사람들뿐인 것입니다.
내 목숨이 오직 왕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달려 있는데,
내가 누굴 쳐다보고 비난하며, 내가 누굴 붙잡고 내 자랑을 늘어놓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만 경주를 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경주도 쉬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만나지도 말고, 얘기도 들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따라 지옥 가고 싶으면 그들과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다시 달리길 원하면, 그땐 그들을 붙잡고 함께 달리십시오!
천국은 달리는 사람들에게 가까워집니다.
☆관련 설교 : 앞으로 나아가자(클릭)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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