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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 바울의 관심

LNCK 2008. 8. 2. 21:20
 

◈바울의 관심                      고전4:10                              인터넷 설교녹취


듣기 싫은 설교, 전하기도 꺼림직한 설교, 한 번 들어봅시다!

 

 

◑바울의 관심과 고린도 성도들의 관심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0

 


▲1. 우리는 미련하되 너희는 지혜롭고...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바는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잘 되자>는 모토이다.  

영적 승리 대신에 돈벌이 전선에서 승리하고

동료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다고 했는데

신자들도 ‘이 세상 지혜’로 무장하기 원한다.


물론 ‘이 세상 지혜’도 일반은총적 영역에서 유익한 점이 꽤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양과목의 자리를 벗어나 전공과목이 되면 안 된다.

우리의 전공과목은 ‘십자가와 그 복음’이다.

그것은 세상 지혜로 보면 ‘미련한 것’이다.


카네기, 록펠러, 벤자민 플랭클린(오늘날 미국 성공주의가 있게한 초기 선구자),

피터 드러커, 스티브 잡스, 워렌 버핏, 잭 웰치

이런 분들의 정신자원이나 삶의 철학을 교양과목으로 가르칠 수 있으나

전공과목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 복음과 성공학을 구분 못 하면 안 된다.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 무엇인가?

예수를 믿지만, 세상에서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도 추구했다는 것이다.

문맥상 볼 때,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할 만큼,

그들의 관심이 <세상 지혜>에 있었고, 그것을 자랑하기 좋아했다는 것이다.



▲2.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며...

‘우리는 약하나’ - 바울은, 세상적 기준으로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부류였다.

내세울만한 재력, 인맥, 세상 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너희는 강하며’ - 무슨 뜻인가?

고린도교인들이 ‘세상에서도 강한’ 크리스천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강하다, 영적 능력이 강하다’라는 뜻이 아니다.

‘세속적인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즉, 조직의 힘, 재정의 힘, 숫자의 힘을 뜻한다.


오늘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우리는 약하나...’란 고백은

어쩌면 수치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잘 못 믿어서 약하고, 자기 잘못이 많아서 약하고..,

그래서 교인들은 절대로 교회 안에서 ‘약하다’는 고백을 하면 할수록 자기 손해다.

불쌍히 여김 받기는커녕 더 무시당한다.


대신에 현대 크리스천들은 고린도 성도들처럼 ‘우리는 강하다’고 말하기 좋아한다.

자기 학력, 재력, 인맥, 가문, 외모 등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강한 것을 자랑한다.

예수님과 바울은 ‘약함’으로 일하셨는데, 고후12:9

현대 크리스천은 ‘강함’으로 뭔가 해보려 한다.


성도가 이런 세속적 힘을 세상에 자랑할 때... 그것은 성경적인 진정한 힘이 아니다.

과거 암흑기에 그랬다. 강함을 자랑했다.

오늘날 기독교가 주류 문화가 되어서, 그런 힘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의지>해서도 안 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약함>으로, 주님을 의지해서 일하는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12:9


강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문제라면, 약한 것에 주눅 드는 것도 똑같은 문제이다.

숫자, 조직, 예산 등이 약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할 절호의 기회인데도

도리어 그런 것들을 부끄러워하며, 그것 때문에 주저앉고 낙심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10

   

약한 것은 허물과 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바울의 약함 같은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강하게 들어 쓰실 사람은... 반대로 약하게 만드실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내가 <강해져서> 경쟁자를 따돌리고, 경쟁에서 승리하며

주의 일을 멋지게 해 보겠다는 사람은... 미혹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세상 성공철학이지, 십자가 복음이 결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강함’이란, 성령의 능력으로 강한 것이며

죄를 이기는 힘이 강한 것이며,

상대방을 용서하고, 섬기고, 세워주고, 자기를 낮추는 <인격적 강함>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남보다 먼저 승진하고, 남보다 더 부자 되고,

경쟁사회에서 승리하는 이미지를 생각하는데... 그것은 완벽한 오해이다.

또한 그런 이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작정헌금 한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책망했던 그 똑같은 책망을 들어야 한다.


오늘날 ‘크리스천 성공시대’ 복음이 유행하고 있다.

소위 ‘내가 떠야 하나님도 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 생활해서

남보다 좀 더 승진하고, 좀 더 부자 되고, 좀 더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 길을 열어달라고 울부짖고 기도한다.

이런 것이 오늘날 대부분 신자들이 추구하는 신앙생활의 모토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과 참된 기독교의 <역주행>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런 세상에서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을 향해

<어린아이>로 부르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1~2


라오디게아 교회도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적으로 강한 교회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을 들어보시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7



▲3.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멸시를 받으니

당시 고린도는 동서양이 만나는 무역요충지였다.

그래서 거상들도 많았고, 부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존귀, 명예를 원했다.

그래서 바울이 비꼬고 있다. ‘너희는 존귀하나...’


이상하게 경제적, 지식적 수준이 높아갈수록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 많이 좌지우지 된다.

그들이 사람들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더라. 요12:43


주님은 나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지 아니하노라 요5:41 하셨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귀와 칭찬을 받아야 훌륭한 믿음인줄 착각한다.

너무 사람들의 칭찬과 존영을 의식하다보니.., 외식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사람들의 <칭찬, 영광, 존귀> 이런 것에 별 관심 없었다.

오히려 <멸시>받는 길로 자원해서 갔다.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길이 종종 <세상에서 멸시받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해외에 단기 선교하러 갔다가 순교까지 하고도, 얼마나 세상에서 멸시받았는가?


고린도교인들은 예수 믿고 존경받는 일에 신경썼는데,

사도바울은 예수 믿고 복음전파하다가, 돌에 맞고, 채찍 맞고, 쫓겨나고, 갇히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고린도 교인들과 사도바울은, 같이 예수를 믿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서로 하늘과 땅차이로 다른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일평생 멸시 한 번 받지 않고 산다면,

그것이 과연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 존경 받을 만한 일인가?


▸요즘 미국에 신학교 지원자 수가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인 한 가정이 사는데 최소 매월 7천5백$ 정도가 소요되는데,

그들이 목회하게 될 개척교회가 그 정도 재원을 조달 못해서 지원 못 하니까

목회자들이 너무 가난하게 사니까... 그것을 보고 다들 도망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신학교 다닐 때부터,

교회가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지원하는 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원자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살기 싫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일정한 거처가 없고 고전4:11

오늘날 이런 바울 사도 같은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역사를 볼 때, 이 세상에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과연 누구에 의해 오늘까지 진행되어 내려져 왔는지 눈 여겨봐야 한다.

일례로 종교개혁자들이 거의 다 주리고 헐벗고 일정한 거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가서야

누가 더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했는지, 주님이 판가름해 주실 것이다.


<08.07.16. 인터넷 설교에서 부분 발췌, 편집 


 

◑관련글 : 바울의 관심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9:23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항상

<내가 이렇게 하면 이것이 영혼 구원에 유익이 되겠나, 안 되겠나?>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복음”으로만 채워져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일하면서

‘내가 오늘 하루 산 것이 복음에 기여한 것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항상 복음에 보탬이 되는 매일을 살고자 힘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항상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승리를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9:24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불로 연단해서 없어질 금보다 더 보배라고 했습니다. 벧전1:7

그는 어떤 극한 시련이 와도 자기 믿음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최후 심판대에서 웃고, 최후 승리자가 되기 원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살고/못 살고 하는데 거의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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