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 집착 마5:45 -출처 보기-
▲자기 의존 : 자신과 동일시하니까 화가 난다.
어떤 회사에서 한 직원이 "여기 음식은 냄새가 고약해" 했고,
그러면 영양사는 화를 벌컥 내곤 했습니다.
그녀는 음식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겁니다.
‘누구든지 음식을 공격하는 사람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나는 위험을 느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나"는 결코 위협받지 않습니다. 위협받는 건 다만 "내 것"이죠.
“내”가 "내 것"과 동일화할 때
사물을 초연하게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물을 초연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 것”(나에 대한 집착, 자기 의존)은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 영양사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음식 냄새가 고약하다'는 말을 들을 때,
먼저 공정하게 사실을 파악해 봅니다. 버럭 화부터 내지 않습니다.
▲친구가 죽었을 때 우는 진짜 이유
한 친구가 죽었다고 합시다.
슬픔을 느낀다는 건 당연하고, 매우 인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슨 반응일까요?
무엇에 대해 비탄을 느끼는 걸까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내 말이 소름끼치게 들리겠지만
여러분의 반응은 ‘개인적인 상실’인 겁니다. 그렇잖아요?
그 친구가 기쁨을 가져다주었을 ‘나를 위해’ 애석함을 느끼는 거죠.
(이제 그 친구가 죽어서, 자신의 기쁨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비탄한거죠)
소유하려 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던 것을 상실할 때는
비탄을 느끼지 않습니다.
비탄이란 내가 나의 행복을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에게
적어도 어느 정도로 의존했다는 표지인 겁니다.
▲의존
우리는 모두가 온갖 일들로 서로 의존해 있지 않습니까?
도축업자, 빵굽는 이, 농부들이 서로 의존해 살죠. 상호 의존, 좋지요!
그렇게 해서 사회적 기능을 더 잘 발휘하고 더 효율적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한다는 것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것- 그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그것은 <내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깨닫고 있든 그렇지 않든,
내가 그에게 ‘의존’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행복에 기여하기를 '요구하는' 것일 테니까요.
▲두려움
의존의 필연적인 그 다음 단계는 두려움입니다.
상실의 두려움, 소외의 두려움, 거부의 두려움, 상호 견제.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요일4:18, 이 구절, 이런 식으로도 해석하는군요.
이런 해석이 가장 1차적인 성경의 뜻일까요?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요구가 없고, 기대가 없으며, 의존이 없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 행복이 너에게 있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떠나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는 겁니다.
너와 함께 있기를 한없이 즐기지만, 너에게 달라붙지는 않는 겁니다.
내가 집착이 없는 바탕 위에서 그것을 즐기는 겁니다.
내가 진실로 즐기는 것은 네가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내가 발견한 어떤 것, 일종의 교향곡, 네가 있는 데서 한 선율을 연주하지만
네가 떠난다 해도 연주를 멈추지는 않는 그런 일종의 교향곡이죠.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곡을 연주하고, 그 또한 매우 흥겨운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혼자일 때도 연주를 계속하는 겁니다.
나에게는 훌륭한 레퍼토리(주님)가 있고, 나는 연주를 결코 멈추지 않는 겁니다.
(인간은 주님을 의존해서 살지, 부부라도, 사람을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의존하면, 사람을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가족도 의존하지 마세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않고는,
가진 것을 버리지 않고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14:26, 14:33
모든 것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물리적인 포기가 아니라
의존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환상을 버릴 때 마침내 현실과 접촉하게 되고,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다시는.
집착을 떨쳐 버릴 때, 의존을 떨쳐 버릴 때
처음에는 고독하게 됩니다. 그런 고독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차츰 환상(집착하고 의존하면 행복하다는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행복이라 부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혹한 말이지만, 주님의 놀라운 종들 가운데,
주님에 의해 ‘강제적으로’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분들이 많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삶의 신비를... 강권적으로 체험하고 도달하게 된 것이지요.
‘의존을 상실함’을 통해서요!)
▲성공과 실패를 의존 안 함
성공이나 실패에 마음 졸이지 않아요. 그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죠.
명예나 불명예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바보짓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어도
역시 아무것도 아니죠.
흔히들 욕망이 없다면 죽은 나무토막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성공에 대한 긴장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될 것입니다.
긴장을 푸십시오. 브레이크를 건 채 운전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삽시다.
위대한 중국인 현자 트랑크수의 절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궁수가 상을 바라지 않고 활을 쏠 때는 자기 궁술 실력을 충분히 다 발휘한다.
동상을 받기 위해 쏠 때는 이미 흥분한다.
금상으로 받기 위해 쏠 때는 눈이 흐려져 목표가 둘로 보이고 제 정신이 아니다.
그의 궁술은 변하지 않았으나, 상이 그를 갈라놓은 것이다. 염려하는 것이다!
쏘기보다 이기기를 더 생각하고, 이기겠다는 긴장이 힘을 빼어 놓는 것이다."
그게 사람들 대부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살고 있을 때,
모든 실력, 온 힘을 얻는 것이고
긴장이 풀리고 염려하지 않으며, 이기든 지든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신비가들과 예언자들은 그런 것에 조금도 마음 쓰지 않았죠.
명예나 치욕이나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죠.
그들은 딴 세상에, 깨달은 사람들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성공이나 실패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중독, 의존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별로 없을 겁니다. 매우 드물겠죠.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자를 은근히 멸시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여러분도 바로 그들만큼 다른 어떤 것에 중독되어 있을 겁니다.
누군가를 자유롭게 떠나보내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
아무도 편애하지 않고 누구나 공평하게 사심 없이 사랑하는 것
(원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의존에, 사심에, 편애에, 이기심에 중독 되지 않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의존을 버린 참 사랑
그런 의미에서
선인과 악인에게까지,
성인이나 죄인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리게 하시는 주님은,
정말 모든 것에서 자유하시고, 집착과 중독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장미가
"착한 사람들에게는 향기를 풍기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
말할 수 있어요?
전등이 "사람들에게는 빛을 비추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
고 말할 수 있어요?
나무가
"착한 사람들에게는 그늘을 주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
고 말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이 ‘집착, 중독, 내 것’을 버린 참 사랑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사랑’은,
사실은 욕망이고 통제이며 집착이요, 소유죠.
두려움이며 불안이지, 참 사랑이 아니죠.
*제가 이해한 만큼 요약했는데, 원문을 보시려면 출처보기(여기)를 클릭하세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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