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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 인자인가, 투사인가?

LNCK 2008. 7. 29. 10:24
 

◈인자인가, 투사鬪士인가?            막8:31         -인터넷설교 스크랩-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 人子’ 라고 자주 표현하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이름은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등이었습니다.


‘인자’란,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이런 호칭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과는

그 어감이 많이 동떨어진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인자  

예수님이 그 신성만 가지고 계시면 고난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 무슨 고난이 있겠습니까?


그가 인자, 즉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런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의미로 ‘인자’를 쓰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즉 자신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모든 삶이 다른 인간들과 동일한 조건 아래 있음을 스스로 발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종종 '고난의 종'으로 표현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땅 속에 있으리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버린 바 되어 죽으리라

 

▶그런데 이 표현 속에는 놀라운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당시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내포하고 있던 의미는

‘메시야,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배고픈 사람이 다 먹게 될 것이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며,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하게 될 것이고,

영광스러운 다윗 때 같은 강성한 왕국을 다시 만들게 될 것이다’ 이랬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실 메시야를 두고 이런 기대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고 하는 분이 왔다는데,

왕자로 온 것도 아니고, 유명한 영향력 있는 학자로 온 것도 아니고,

무슨 거창한 권세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경력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목수’에

가문과 출신은 어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갈릴리 나사렛’이란 산골짜기였고,

인물도 (이사야서 예언을 참고해 볼 때) 얼굴이 상하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직 30대 초반이었을 예수님께 ‘네가 나이 50도 안 되면서...’ 말한 것을 보면 요8:57

예수님의 행색이 자기 나이보다 훨씬 더 늙고 쭈글쭈글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막노동을 많이 해서, 귀티는 다 사라지고, 노동자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일찍 돌아가시고, 장남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예수님의 삶은

말 그대로 메시야보다는 ‘인자’에 더 가까운, 고생을 실컷 하시고 자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침 뱉으면 그 침을 그대로 다 받으시고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그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50:6



▶여러분, 이 분이 바로 세상을 살리신 분이셨습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큰 비밀mystery입니다.

칼이나 황금 덩어리로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굉장한 지식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인자’로서, ‘고난 받으심’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도

‘인자’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그런 유약해 보이는 목사가 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제자로 사는 삶만큼

근사하고 멋있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길이 ‘인자’가 걸어가신 길 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메시야이면서도 기꺼이 유약한 ‘인자’의 길을 걸어가셨는데,

우리는 인자이면서도 억지로 강력한 ‘메시야’의 길을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프간 상황을 다룬 [칸다하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인물 중에 ‘사히브’라는 의사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아프간에 귀화해서 아프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간이 소련의 침공을 받았을 때, 아프간 사람들과 함께 총을 들고

소련을 대항해서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미국인이었지만

‘네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을 갖다 대라’ 라는 비현실적인 가르침보다,

‘총을 들고 맞서 싸워라, 칼을 들고 맞서 싸워라’ 라는 말씀이 훨씬 현실적이고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기독교를 버리고 무슬림으로 개종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사히브 같은 사람은 정말 굉장히 멋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이렇게 자기 신념을 따라 미국 국적도 포기하고,

아프간을 선택해서 거기서 현지인들과 전선에 나가고, 또한 의사로 봉사하는 사람...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멋있게 보입니까?

그래서 영화에 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히브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존경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수준을 훌쩍 뛰어 넘습니다.

그는 ‘투사’일지는 모르지만, ‘인자’는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멋있는 ‘투사鬪士’가 아닙니다.

자기를 조용히 죽는데 까지 내어주신 ‘인자’이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멋지기는커녕 무능하고, 바보같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사람 말입니다.

 

한국의 젊은 두 청년이, 아프간에서 이런 '인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과 분노와 혈기를 묵묵히 자기 가슴에 안고,

그들을 대신해서 자기들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두 분은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두 팔을 벌리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자’의 모습은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총과 칼을 들고 대항해서 싸워서 정의를 쟁취하는 식이 아니라

자기 왼뺨을 갖다 대며, 그를 용서하고, 그를 사랑으로 품는 방식이셨습니다.


여러분, 투사가 강합니까, 인자가 강합니까?

누가 더 강한 모습입니까?

인격적 힘으로는 인자가 더 강합니다.


내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우리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참고서 사는 것만 해도 매우 잘하는 일처럼 보이는데,

주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교훈을 받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시종 ‘형제를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되새겨 줍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누가 나를 공격하고 달려들 때, 나도 반격하고 정당방위 해야 되지만,

그 순간 요한일서 말씀이 머리에 떠올라야 합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두 팔을 벌리십니다.

다른 쪽 뺨이 아니라, 자기를 죽는데 까지 기꺼이 내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살아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평강과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부패한 세상을 위해서

종종 ‘투사’의 모습으로 일어서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들보다는 나은지 모르나,

그러나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인자’의 모습으로 일어서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 부패한 세상과 죄인들을 위해서

묵묵히 내가 얻어맞고, 내가 죽는 방식입니다.

그 한 알의 밀알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이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요, 순교자들이 걸어가신 길이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초청하고 계시는 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숫자의 힘으로, 예산의 힘으로 뭘 보여주려고 한다면

참된 기독교 방식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인자'의 모습으로... 기꺼이 죽는... 죽기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향해 화해의 손을 내 미는... 그런 모습을 보여 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복음의 능력이 느껴질 것입니다.

 

<08.06.29. 인터넷 설교에서 부분 발췌, 편집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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