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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 제 눈을 열어 주소서

LNCK 2008. 8. 5. 11:25

◈눈을 열어 주소서              마13:16               인터넷설교녹취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6



▲눈이 감겨져 있으면, 불안하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주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하시(엘리사의 종)의 눈을 열어주셨고,

자기 눈이 열려 불말과 불병거를 본 게하시는 그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게하시는 소경(시각장애우)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셨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육신의 눈을 정상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뜨여 져야할 눈이 있는데, 바로 ‘영적인 눈’이다.

이것을 못 뜨면, 늘 삶의 염려, 생활의 불안 가운데 살게 된다. 게하시처럼!

영적인 안목이 뜨여져야,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안정된 삶을 산다. 엘리사처럼!

 

 

◑영안을 뜨려면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구한 바울


엡1:18절에, 바울은 너희 마음(heart/ understanding) 눈을 밝히사 ... 기도했다.

 

왜 성도들이 바울처럼, 주님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유산(상속)으로 주신 것들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모르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쫓아가며,

그것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로 몸부림치는가?

 

영안이 감겨져 있든지, 아니면 영적 시력이 현저히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과 사도 바울, 사도 요한이 가르치신 성경의 교훈들을

액면 그대로 잘 깨달으려면 <영안이 열려져야> 한다.

자기 이전의 육신의 눈으로, 자기가 배운 사상과 철학의 눈으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황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그래도 장차 개선의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기도를 통해 눈이 열린다.

서두에 언급한 게하시는,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 그 눈이 열렸다.

 

하갈도 쫓겨나서 광야에서 울며 기도하다가, 눈이 뜨였다.

아까까지 없었던 우물이 자기 눈에 보였다. 창21:19

 

기도하면 영안이 열리거니와,

기도할 때 영안을 열어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더 잘 열릴 것이다.

성경에,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한 사람(소경) 중에 눈이 안 열린 사람 없다.

 

 

▲주의 말씀이 내 눈을 밝게 한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19:8

 

말씀을 가까이 하면, 평소에 자기가 보지 못하던 자기 죄도 보인다.

자기가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자기 영혼이 헐벗은 것도 보인다.

주의 기이한 법도 보인다.

 

내 눈을 열어주사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시119:18



▲믿는 사람에게 눈이 뜨인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11:40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장차 저 천국에 가서도 보겠지만,

이 세상에 살 동안에도,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뜨여 져야 한다.

 

오늘날 봐도 매혹적인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물들이 바울 시대에도 많았다.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등의 도시에 그런 하얀 대리석 건물들이 그득했다.

그러나 바울은 서신서에 단 한번도 ‘그 세상 영광’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

그가 소개한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영광’이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은 세계적인 갑부에게서 그 영광을 찾고

또 어떤 사람은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장기려 장로... 이런 분들에게서

그 영광을 본다. 눈이 다르다.

 

 

▲많은 시련을 통해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린다

욥이 많은 고난을 통해 성장한 것은, 영안이 더 깊이 뜨이는 것이었다.

 

그렇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세상이 크게 보이고, 주님이 작게 보이지만,

그 후에 연단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면 할수록,

세상이 작게 보이고, 주님이 크게 보인다.

 

내가 주를 귀로 들었사오니, 이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5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도 있다

나귀는 보았지만, 발람은 못 보다가,

주님의 그의 눈을 열어주시자, 그도 천사가 칼을 빼서 좁은 길에 선 것을 보았다.

만약 눈이 열리지 않아서 그 길을 계속 갔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눈이 가려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니 눅24:16

나중에 주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실 때

제자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다. 눅24:31

 

 

◑현실적인 문제로

 

 

▲현실적으로 앞이 캄캄할 때

주인은 당장 집 빼라고 하는데, 마땅히 이사 갈 집을 아직 못 구해서 캄캄할 때,

당장 잔고가 바닥이 나는데, 아직 적당한 일자리를 못 구해서 앞이 캄캄할 때,

교회나 직장에 청년들이 수두룩한데, 아직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주여, 제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제 눈을 열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이미 많이 조석으로 간구하고 매달렸으므로, 주님이 이미 응답해 주셨다.

그런데 자기 ‘보는 눈’이 감겨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뻔히 가까운 데 두고도, 멀리 가서 헤매고, 찾고 있다. 하갈이 그랬다.

눈이 감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필요는 물론, 영적인 눈을 더욱 더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반대의 경우로, 하나님이 눈을 감겨 버리시는 경우도 있다

죄악의 길을 갈 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갈 때,

하나님이 아예 눈을 감겨 버리신다.

 

소돔 성에서, 주님은 롯의 손님을 헤치려는 소돔 사람들의 눈을 감겨 버리셨다.

도단 성 근처에서, 주님은 엘리사를 헤치려는 아람 군대의 눈을 감겨 버리셨다.

 

어떤 사람은, 서울역 지하도에서 대우 빌딩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를 못 찾아서

(대우빌딩 지하상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과거 그가 몇 번 다녔던 길이었다.)

그 지하도에서, 대우빌딩 지하로 연결하는 통로가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서울역 지하도 1~4호선 연결통로를 끝에서 끝까지 3~4번 왕복하는 사이에

약속시간을 30분인가 놓쳐서 그를 못 만났다고 한다.

그는 시간 지나고 나서야 그 통로를 찾았다. 하나님이 그의 눈을 가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눈을 가리시면, 뻔히 쳐다보고도 못 찾는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기독교를 ‘세상 복 받는 종교’ 쯤으로 이해한다.

세상의 눈,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요3:16절을 믿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차츰 성숙해서, 성령 은혜도 체험하면서, 자기 영안靈眼이 점점 뜨여져야 한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평생 자기 눈을 떠가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평생 자기 눈을 점점 더 크게 떠서, 더 신령한 것이 자기 눈에 들어오게 된다.

 

<08.07.27. 인터넷 설교에서 녹취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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