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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 하나님을 아는 지식

LNCK 2008. 8. 9. 18:17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요14:18                     도서요약



앨리스터 맥그래스「내 평생에 가는 길 Journey」pp.66~114. 읽고서 편집

<1418 신앙의 히치하이크> 후속 글


 

◑맥클래런 : 포로에 사로잡힌 병사 예화


지금부터 약 1세기 전에, 영국 설교자 맥클래런(Alexander Maclaren 1826~1910)

은 설교 중에 이런 예화를 들기를 좋아했습니다.


『옛날에 포로를 잡았다고 저 숲 속에서 큰소리치는 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장교가 “포로를 데려오라”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왜 안 오느냐?”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 병사가 하는 말

“포로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안 가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장교는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너 혼자 만이라도 와!”

그래도 병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숲속에서 그 병사가 이렇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 포로가 저를 안 보내줍니다!”』

 

설교자 맥클래런은 이어서 계속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많은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승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성공했다고 mission completed 큰 소리 치는데,

나중에 보면, 거기에 족쇄처럼 꽁꽁 묶여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도리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성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만,

억지로 거머쥐려는 축복, 억지로 이뤄보려는 성공은... 도리어 족쇄가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추구하지,

성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J. I. 패커 :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한국에도 잘 알려진 J. I.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7~)는

1944년 옥스퍼드 대학시절 회심 후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 신학자들의 도서들을 집중 탐독했습니다.

그들의 저서들이, 기독학생회 모임 때 온 많은 강사들보다,

<크리스천 삶에 관한 지침에 있어서 더 현실적이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입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앨리스터 맥그래스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해 이것, 저것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깊이 알아야 한다>이며,


패커는 <하나님을 알아 갈 때, 지적, 의지적으로 아는 것과 더불어,

정서적으로 깊이 알아야 한다>며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강조했습니다.

쉽게 말해, 교제를 통해 주님의 임재로 들어가라, 그래서 주님을 알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패커를 통해

영국에서 발생한 고귀한 청교도 신앙이 → 스펄전 → 패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 : 주님을 갈망함


중세시대는 기독교 영성 저작에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었는데,

이 때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백 Monologion, 1078」이란, ‘하나님께 대한 긴 묵상’을 썼습니다.


아래 그가 쓴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너무 빨리 읽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라고 조언합니다.


『주님께 목마릅니다. 주님께 배고픕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님을 애타게 그립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저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존재를 잃어 버린 고아와 같습니다.

울고 통곡하며 전심으로 그리운 얼굴에 매달리고 또 매달리는

고아와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붙듭니다.

유배의 고생을 인해 웁니다.

주님의 임재에만 제 위안과 소망을 둡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얼굴을 묵상하며 간절히 사모합니다.』

 

위 글에서, 오늘날 우리가 잘 쓰지 않는 2가지 개념이 나오는데,

‘고아’(요14:18)와 ‘유배’입니다.


저자는, 신약성도의 상태를, 본향에 계신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로 보며,

또한 이 세상을 본향에서 동떨어진 ‘유배지’로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뒤로 하고,


위 글이 보여주는 바는,

‘고아’가 부모를 애타게 찾듯,

‘유배지’의 사람이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듯

하나님과 천국을 애절하게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마릅니다. 배고픕니다. 갈망합니다...’


현세적 지상의 삶에 너무 만족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내 평생에 가는 길 Journey」에서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교회사에 알려진 신앙의 선배 지도자들을 통해서

과거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목표, 방향이 무엇인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갈망함, 하나님을 알아감,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함>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목표와 방향과 한 번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관련 예화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가 멀리 갔다 오면 언제나 조그만 선물을 꼭 사왔습니다.

그래서 버릇이 되니까, 아이들에게 ‘이런 것 꼭 사 달라’고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영국에 집회를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 둘째아들이 떠나기 이틀 전부터

“아빠, 이번에 영국가시면 영국 병정 사다줘!” 하며 조르더라고요.

까만 모자에다가 빨간 제복 입고 서있는 영국병정 인형 말입니다.


제가 쉽게 대답을 했어요. 그리고 이제 비행기 타고 런던에 내렸습니다.

공항에 딱 내리는 순간 ‘영국병정’이 생각나는 거예요.

‘영국 병정 어디서 사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체면에 제가 집회 인도하러 와서

“영국 병정 파는데 어디예요?” 하고 묻기도 좀 창피하고,

그러니까 혼자서 살짝 살짝 기회 있을 때 마다 보는 거에요.


호텔 안에 가게에 가서도, 여기 있나 보니까 없어요.

지나가는 가게에도 잠깐이라도 들어가서 눈여겨봐도 없어요.

시간은 자꾸 흘러가요. 한 나흘, 집회가 다 끝나고

그런데도 계속 찾지를 못하고 있었어요.


심지어는 설교하러 가서도 영국병정 생각만 나더라고요.

아이쿠, 집에 갈 시간이, 우리아들 만날 시간이 초조하게 가까워지는데

얼마나 속상해요? 드디어 마지막 기회, 제가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가게에 들어가 점원에게 막 물어보면서 찼았는데, 거기에 없데요.

얼마나 절망했는지요. 그런데 공항 안에 다른 가게에 한 번 가 보래요!


그래서 저를 마중 나온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서,

로비 다른 끝에 있는 스토아에서 드디어 ‘영국병정’을 찾아내었습니다. 하하하~


드디어 영국병정을 샀습니다. 몇 개 되는 것을 딱 사가지고 집에 왔어요.

그래서 초인종을 아주 힘 있게 누리니까 둘째가 먼저 뛰어나오더라고요.

잠깐 아빠 하고 제게 안기더니, 제 가방을 쳐다보더라고요.


“아빠! 영국병정”

“그래, 여기 있다. 영국병정!” 그리고 안겨다 주었어요.

‘땡스!’ 그러더니(당시 미국에 살았음) 제방으로 탁 들어가더니

문 탁 닫고 두 번도 다시 저를 쳐다보지 않더라고요.

여러분 그때 제가 느낀 그 고독들 이해하십니까?


이 때 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는 별로 관심 없고,

그 분이 주시는 선물 -물질, 명예, 성공- 들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섭섭해 하실까요!

철없는 아들을 통해, ‘나도 철없는 아들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예화 펀 글)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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