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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에서 주님을 찾다

LNCK 2008. 8. 22. 23:02

www.youtube.com/watch?v=xxbQtXy3Als

◈폭풍 속에서 주님을 찾다         욥40:6           도서요약

필립 얀시,「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Church, Why Bother?

이 책의 서문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욥40:6

 

 

◑폭풍우 속에서 나무 위로 올라간 사람

 

비바람 치는 폭풍우 속에서, 일부러 미송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

존 뮤이어 John Muir 이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나의 세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번갈아가면서 내게 조른다.

나는 몇 번씩이나 들려준 이야기를, 아이들이 조르니까, 또 반복해서 들려준다.

나도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존 뮤이어는 19세기 후반부에, 미국 대륙의 탐험가였다.

그는 수 십 년간 도보로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경이를 보았다.

캘리포니아 시에라 사막에서 알래스카 빙하지대까지, 광대한 거리를 주파하며,

관찰하고, 글을 쓰고, 찬양하고, 경험했으며,

아이 같은 천진한 기쁨과 진지한 경외심으로 그 일에 몰두했다.

 

1874년에 그는, 시에라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친구의 오두막을 방문했다.

한동안 그는 그 오두막을 근거지로, 거친 대자연을 탐험했고,

돌아오면 오두막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어느 날, 태평양으로부터 폭풍이 밀어닥쳤다.

깊은 산속의 향나무, 전나무, 소나무, 미송나무 등 튼튼한 나무들도

마치 풀잎처럼 눕혀버릴 듯한 기세가 대단한 폭풍이었다.

 

그 오두막은 바로 그런 폭풍에 대비해 지은 것이었다.

밖에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도, 마치 폭풍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두막 내부는 끄떡없이 평온함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독자들은,

뮤이어와 그의 친구가 벽난로 옆에서 따뜻한 커피를 즐기는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뮤이어는 벽난로 불 속으로 장작을 하나 툭 던져 넣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마루에 올라, 광풍의 변화무쌍한 소리와 바람을 즐기더니,

그것도 모자라, 더 높은 곳을 찾아서 주변 나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찾아낸 거대한 미송나무에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그는, 필사적으로 나무를 붙들어 안은 채

온 몸으로 폭풍우를 맞이했다.

 

그는 무엇을 바라고 폭풍 속에 위태롭게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칼날 같은 바람에 온 몸을 내맡겼는가? (당시는 12월이었다.)

→날씨를,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위대한 날씨를 맛보고자 했다.

 

조물주가 내뿜으시는, 그 원시적 생명력과 강력한 에너지를 체험하고,

거기에 압도당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같은 초보자는, 밖에 나가 비 맞는다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동산과 꽃밭에 나가 있어도.., 창조주의 솜씨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잘 느끼려면, 오랜 수련을 통한 깊은 내면화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가족 영성의 모델, 존 뮤이어

 

내가 이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말 하고, 우리 아이들은 반복해서 들으면서,

우리 가족은 존 뮤이어의 경험을

<기독교 영성의 하나의 표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분히 신학적으로 사실이다.

 

▲바람 같은 성령

‘영spirit’이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바람’, ‘숨’과 동의어다.

그 실체는 안 보이지만, 그 작용과 영향력은 분명히 보인다.

 

모든 생명이 창조된 것도, ‘바람’에 의해서였다. (삼위일체로 역사하셨다) 창1:2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 성령의 역사는 ‘바람의 役事’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교회를 탄생시킨 것도, ‘급하고 강한 바람’의 역사였다. 행2:2

 

 

▲존 뮤이어의 자연주의적 영성

보통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면 모두 피하여 숨는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비바람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을 더 잘 느껴보기 위해서,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바람’같이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세상의 모든 바람이 ‘성령의 바람’은 아니지만,

‘바람’은 분명 하나님이 불게 하시며,

간절히 하나님의 현존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바람으로 그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주의 영(호흡, 바람)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하나님 앞으로 찾아 나오는 영성

사실 인간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는 본성이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창조주와의 근본적인 대면을 대부분 기피한다.

가급적 하나님과 멀리 동떨어진 곳으로 찾아서 숨어들어가는 것이

범죄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저 용감한 존 뮤이어를 보시라.

대부분 사람들은 비바람을 피해서 모두들 기어들어가지만,

그는 비바람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기회로 여기고,

도리어 하나님 앞으로 당당히 나아왔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 가족이 존 뮤이어의 경험을

<기독교 영성의 하나의 표상>으로 이해하게 된 이유이다.

하나님을 피해 숨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앞으로 제 발로 찾아 나오는 그 영성!

 

 

◑종교인가, 신앙인가?

 

▲주말이 되면...

주말이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 원하는가?

대부분 일상을 떠나 어딘가로 싸돌아다니기를 원한다.

기분전환을 원하는 것이다.

또 멀리 돌아다니진 않아도, 문화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실 가장 큰 안식, 가장 큰 평안이 어디에 있는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대면할 때 오는 평안과 기쁨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주님을 피해서.. 더 멀리 가고자 한다.

마치 주님을 멀리 떠나야, 거기에 참 행복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대면해야할 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나를 도와주시는 맘씨 좋은 분 정도로 이해한다.

나는 이런 것을 ‘신앙’이라 말하지 않고, ‘종교’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들이 많다.

 

▲종교는 피하여 숨고, 신앙(영성)은 대면한다.

종교 religion 라는 말은 라틴어 religere에서 왔다.

‘다시 묶다, 다시 붙들어 매다’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이 어원에 대한 나(피터슨)의 해석은 이렇다.

사람이 세상에 살다보면 다들 상처입고, 흐트러지고, 망가지고, 부서진다.

그렇게 어지럽게 널려진 자기 삶을 한 군데로 차분히

<다시 묶고, 제 모습으로 불러 모으는>것이 ‘종교’라는 어원의 뜻이다.

 

그런데 나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이 <종교>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신앙>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에 나온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종교>는 폭풍우가 닥칠 때, 튼튼한 오두막 속에 하나님을 피해서 숨는다.

방종과 나태로 흩어진 자기 삶의 조각들을.. 다시 꿰어 맞추는 정도로 만족한다.

하나님과의 직접 대면이 없이도, 무슨 종교든지,

종교나 수양으로써, 찢어진 자기 삶을 꿰맞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성>은 폭풍우가 닥칠 때, 도리어 하나님 앞으로 대면하러 나아간다.

방종과 나태로 인해 자기 삶이 찢어지고, 자기 인생에 비바람이 칠 때도... 말이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러 나아가기를, 어떤 경우에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와 대면하는가?                                                 (이하 펀 글)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람은.., 사람과 대면하지 않는다.

악착같이 사람과 대면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대면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벤허]의 마지막에는 유명한 마차경주 장면에서 나온다.

벤허는,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을 감옥에 보내고 자기를 노예로 만든

메살라와 마차 경주를 하게 된다.

경기 중 메살라는 채찍으로 벤허를 향해 내려친다. 악랄한 반칙이다. 

벤허가 팔을 내미니 채찍이 팔에 감기어 서로 당기다 메살라가 마차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메살라 다리 위를 뒤따르던 마차가 지나간다.

그리하여 메살라는 들것에 실려 나가고, 벤허가 우승한다.

 

말에서 떨어져 마차에 깔린 메살라는 실려 나온다.

의사는 빨리 다리를 절단해야 살지, 늦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의사와 부하들은 빨리 다리를 절단하자고 하지만, 메살라는 이렇게 절규했다.

 

"벤허가 우승하고 이리로 올 터인데, 그에게 다리 잘린 내 모습을 보이란 말인가? 

절대 안 된다!"

 

그때 벤허가 들어오고, 메살라는 벤허에게 악에 받쳐 소리친다.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네 어머니와 여동생은 문둥병에 걸려 계곡에 있다."

 

벤허는 계곡으로 가버리고, 다리 수술 시기를 놓친 메살라는 죽고 만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메살라, 절대 승복을 모르는 패자의 지독함,

그런데 메살라가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한 말에 묘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의 싸움이란... 그렇게도 지독한 면이 있다.

자신이 그 싸움으로 인해 죽어가는 순간까지라도... 그 싸움을 결코 멈출 줄 모른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람은.., 사람과 일일이 대면하지 않는다.

악착같이 사람과 대면하는 메살라 같은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과 대면이 없기 때문이다.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