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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눈물의 사람 한경직 목사 #3

LNCK 2008. 10. 9. 10:22

 

◈기도와 눈물의 사람 한경직 목사         애1:16           -출처보기- 

 

[한경직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학술대회, 02.10.31]에서

김명혁 목사님의 발제 논문 중 일부 발췌

 

 

사람이 유명해질수록, 자신을 부인하고 절제해야 되는 이유가

점점 개인기도의 관심과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의 말대로 <주의 사역이 주님과 교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된다.>

그래서 점점 기도를 등한시하면서, 자기 유명세로 활동하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이름뿐이지 아무 것도 없더라’는 외면을 당하게 된다.

 

한경직 목사님이 위대한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름뿐이지 아무 것도 없더라’는 외면을 당하기는커녕, 더욱 존경을 받았다.

남한산성에 혼자 계셔도, 주님과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 한경직은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애1:16).

 

약한 사람,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은 엎드려서 기도하며 울기 마련이다.

다윗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다.

한경직 목사도 한 평생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는 의식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자신과 민족의 고난과 약함과 아픔과 절망 중에서 드려진

진솔하고 처절한 눈물의 기도였다.

 

▲감옥에서 기도훈련을 받다.

한경직은 1902년 12월 29일(음력)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 자작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성경과 기도와 찬송을 배웠다.

 

특히 소년 시절 진광 소학교의 홍기두 선생과 자작(또는 반작)교회의

우용진 전도사로부터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성경과 기도와 찬송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절박한 기도는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 그는 기도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절감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그는 영성소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숭실대학에 입학하면서

"연약한 자의 구체적인 기도는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했다."

 

▲구미포에서 소명 받고, 기도에 깊어지다.

그가 깊은 기도에 빠지게 된 것은 숭실대학교 3학년 때였다.

1924년 여름 방위량 선교사를 따라서 황해도 구미포에 갈 일이 있었다.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세미하고 강권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네 길은 이것이다. 하나님께 완전히 몸 바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이 백성이 올바른 사람들이 되어야 나라도 바르게 된다" 라는 신비한 음성이었다.

그는 백사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했다.

 

한경직 목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해변 가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너무나도 갑자기 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저는 주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는 해변에서 여러 시간 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저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엎드려 더 많은 기도를 드리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유학시절, 한적한 묘지에서 기도의 시간을 갖다.

결국 한경직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고,

좀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다.

 

처음에 켄사즈 주의 엠포리 대학에서 1년간 수학한 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한경직은 설교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보였고

기도와 묵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학교 근처에 무명 병사들의 묘지가 있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한 조용한 묘지에서 한경직은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저의 경건생활을 위하여 마침 학교 구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주 조용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곳은 남북전쟁 동안에 전사한 무명 병사들의 묘지였습니다.

묘지 둘레에는 돌아가며 아주 좋은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매우 조용한 장소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저의 기도처소요 명상의 장소였습니다."

 

▲폐결핵 때문에, 결사적으로 기도하다.

한경직이 보다 처절한 기도에 빠진 것은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사를 공부하기 위해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인

1929년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인생의 위기에 서 있었다.

그 때 한경직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처절한 기도를 드렸다.

단 2~3년만이라도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그래서 겨레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저는 고독한 병실에서 참으로 캄캄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단 2,3년 동안이라도 내 겨레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철학서적의 독서를 중단하고

프랜시스와 같은 성자들의 생애를 찾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3~4개월이 지나서 건강이 호전되었고

2년 후에는 병원에서 완전히 퇴원할 수 있었다.

동료와 교수들이 예일 대학에 진학하기를 권했으나

한경직은 그것을 포기하고

나라와 겨레를 섬기기 위해 미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당시가 일제 강점기임을 생각하면, 큰 결단이었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서약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한경직 목사의 비움과 버림과 청빈의 삶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폐결핵을 통해 기도로, 일평생 비움과 청빈의 삶을 살기로 결단)

그런 비움의 삶은 그의 처절한 기도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보린원에서의 기도와 환상

귀국한 한경직은 1933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에 교역자로 부임하여

설교와 기도와 봉사사역에 전념하게 되었다.

 

한경직 목사가 1942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추방당한 후

1945년까지 보린원 원장으로 지내면서,

한 편으로는 고아와 노인들을 돌보고

한 편으로는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 때 그에게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과 밭 농사를 거드는 일 외에,

시간을 정하고 언덕 위에 올라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그는 북쪽을 바라보며, 신의주제2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역시 그 언덕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환상이 보였다.

언덕 밑으로 삼천리강산이 한눈에 보이는데

흰 돌로 지은 교회당이 그 강산을 꽉 메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영락교회 건물 외벽을 흰 돌로 지었다.)

 

그는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순간적으로 '일본은 틀림없이 망하고 조국은 분명히 독립한다

독립된 조국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교회 건축 중 당한 환란으로, 전 교회가 합심기도하게 되다.

이 기도와 환상은 후에 흰 돌로 지어진 영락교회 교회당 건축으로 실현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10월 월남 후, 베다니교회 즉 영락교회를 설립하고

급속도로 증가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1947년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던 중

그 해 여름 어느 주일 장마와 폭풍우에 강타되어 크게 파손되고 말았다.

 

"한경직 목사는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고,

전 교인들도 뒤따라 목 놓아 울면서 기도했다.

어렵게 마련한 예배 처소의 파손은 그들이 겪은 시련들의 서러움을

하나님께 모두 쏟아내어 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락교회 50년」사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빗물에 온몸이 젖은 교인들은 너 나 가릴 것 없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향해

온몸으로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전교인의 통성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2천여 교인들의 울부짖는 통성기도는 '주여! 우리에게 예배당을 주시옵소서'였다.

 

누가 말해준 기도 제목도 아닌데 이렇듯 공통의 기도소리가

2천여 성도들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이 기도소리가 하늘에 상달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날의 폭우와 그 날의 눈물의 기도는

영락교회의 새로운 역사의 전기를 마련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고

결국 그 기도는 응답되어 1950년 6월 영락교회당을 건축하고

준공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부산의 목회자 연합 구국기도회

그러나 준공감사예배를 드리자마자 6.25전쟁으로 인해

한경직 목사는 안양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에까지 밀려 내려가는 비극을 경험하며

다시 하나님께 무릎 꿇는 기도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의 요청을 받은 노진현 목사는 곧 예배당을 개방하기로 하고

구국기도회 포스터를 제작하여 길거리에 붙이게 했다.

구국기도회가 열리던 날, 부산에 있는 400여 명의 목회자들이

거의 대부분 한 자리에 모였다.

 

노진현 목사의 소개로 강단에 오른 한경직 목사는

그들을 향해 열정에 찬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했다.

설교가 끝나자, 누가 먼저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제의할 필요 없이

모두들 처절한 마음으로 부르짖기 시작했다.

억울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애통하는 모든 심정을 하나님께 토해냈다.

 

그들이 눈물흘리면서 기도하는 소리가 부산 하늘을 메우고 전 국토에 퍼져 나갔다.

밤은 깊어 갔지만 대부분 자리를 뜨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하다가

찬송하고, 찬송하다가 기도하기를 되풀이했다."

 

▲서울 수복 후, 민족의 비극을 아파하는 기도

한경직 목사의 눈물의 기도는 민족의 비극과 함께 계속해서 이어졌다.

1950년 9월 28일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을 때였다.

한경직 목사는 맥아더 사령관의 통역관으로 국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했다.

 

"마침내 서울 저동의 영락교회에 이르렀다.

흰색의 교회당을 보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차오르면서 저절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눈물이 범벅인 채로 감사의 기도를 수없이 되풀이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곁으로 어느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이 맞군요!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저는 목사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사하신 모습을 뵈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김응락 장로님은 순교하셨습니다.'

그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영락교회 본당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이 교회를 사수했어야 하는데

김응락 장로가 대신 교회당을 지키다가 순교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웠다.

'하나님! 제 대신 김응락 장로님이 죽었습니다.

제가 이 곳에 있었으면 그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주님,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소서"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자기의 허물과 함께, 민족의 비극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었다.

 

▲사회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기도

그는 1960년 1월 10일에 행한 "애통하는 자와 그 복"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울었다.

 

"여러분,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우리 사회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울음소리,

남편을 잃은 여러 아내들의 울음소리, 실업자의 울음소리,

고학생들의 울음소리, 순진한 여성들이 악당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그르친 가련한 여성들의 울음소리,

이 울음 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이 애통하는 울음소리가 문자 그대로 삼천리강산에 사무치건만

이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참된 정치가, 참된 실업가,

참된 공무원, 참된 사회사업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사회는 눈물 없는 사회가 아닌가,

이렇게도 탄식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애통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 남의 설움을 내 설움으로 알아서

같이 십자가를 질줄 아는 민족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더욱 복이 있습니다."

 

▲목회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집에 와서 울며 기도

한경직 목사는 이런 일 저런 일로 인해 자기는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슴에 지니고

눈물로 기도하며 한 평생을 살게 된다.

때로는 교회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집에 와서 울기도 했다.

 

"사실은 그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디요.

참는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참는다고 하는 거이

내가 저편 사람에게 줄 고통을 내가 받는 거라구요.

내가 말을 안 하고 참으면, 내가 그 고통을 받는 거외다.

그래서 세상에 그저 쉬운 일이 없고..."

 

한 번은 박조준 목사가 한경직 목사를 찾아가서

자기가 당하는 어려운 일을 의논했을 때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런 말은 평생 처음 박 목사한테만 얘기하는데

나도 누구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박 목사도 이 정도는 당할 것을 각오해라

그렇게 지나다 보면 다 견뎌 나갈 수 있느니라."

 

한경직 목사는 모든 괴로움을 밖으로 드러내는 대신

가슴에 파묻고 아파하며 울었다.

 

▲은퇴 후 기도의 시간이 더 많아짐

인간 한경직의 기도와 눈물의 삶은

그가 17세 되던 19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신의주에서의 13년 동안과 영락교회에서의 27년 동안 지속되었고

목회 은퇴 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1973년 1월 한경직 목사는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다음과 같은 소감의 말을 했다.

"목사의 기도는.. 축복의 기도요, 감사의 기도요, 간구의 기도인 동시에

목회자의 기도는.. 땀의 기도요, 고뇌의 기도이다.

때로는 눈물의 기도요, 맥박의 단절을 느끼는 숨 가쁜 기도이다.

 

목사는 현직에 있어도 목사요, 은퇴했어도 목사인 까닭으로

기도의 내용과 그 특성이 달라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왠지 더 자유로운 심정을 가지게 된다. 기도의 폭이 넓어짐을 느낀다.

기도의 시간이 더욱 많아짐을 감사한다."

 

▲남한산성에서 기도

한경직 목사의 남한산성에서의 마지막 26년 동안의 삶도

기도와 눈물과 묵상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백운경 장로의 말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30여분 동안 산책과 체조를 한 다음

5시 30분부터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가졌고

 

때때로 언덕길을 올라가 조그만 바위 돌 위에 앉아서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본의 복음화와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아마 남 신의주 보린원 언덕에 올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신의주 제2교회와 교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던 때를 회상하며

남한산성 언덕에 올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영락교회와 신의주의 성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으리라!

 

▲눈물의 사람, 한경직 목사

김준곤 목사는 이렇게 기술했다.

"작년 초에 남한산성을 찾았을 때

한 목사님을 보살피는 장로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북한의 아사자들과 남한 실직자들을 생각하면서

한 목사님은 자주 우신다고 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남한산성에서 필자(김명혁 목사님)의 손을 꼭 쥐고

순교하신 필자의 아버지(김관주 목사)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는

언제나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눈물의 사람을 본다.

인간 한경직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눈물의 사람이었다.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