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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기

LNCK 2008. 10. 16. 20:03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기                에4:16            인터넷설교 녹취


죽음이란 비극적 상황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 비결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태도이다.



▲모든 생물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데, 인간만큼은 발버둥친다.

죽음이란,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정해 놓으신 필연적 운명이다.

사람들은 노환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질병으로 죽고, 전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노환, 사고, 질병, 전쟁이 없었다면, 그들은 안 죽었을 것인가?

아니다. 결국에는 다 죽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모든 인생의 육체는 티끌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시90:3

죽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떨어지는 낙엽이나,

태어났다가 죽는 짐승이나 곤충을 볼 때,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을 볼 때,

그 생물 자신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나

모두 그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극도로 슬퍼하거나, 그 생명을 데려가는 조물주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인간은, 유독 인간 자신의 죽음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주님이 자연스럽게 정해 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아무리 살만큼 살은 사람도, 죽음에 직면하면, 고통을 받고 두려워한다.


사람은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가급적 죽지 않고, 더 살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다가 자기 저항과 발버둥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체념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다른 모든 생물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되돌아가는데,

인간만큼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고통스럽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왜 인간의 죽음의 고통은 이렇게 절망적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언젠가 찾아올 나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


죽음이란 비극적 상황을

인간이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 비결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태도이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인정하고, 정면대결해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왕비 에스더의 갈등


▲아무리 따져보아도 승산 없는 커밍아웃

에스더가 바사(페르시아) 제국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로 간택될 때,

자기가 유대인이란 사실을 커밍아웃(공개적으로 밝힘)하지 않았다.

아마도 유대민족이 예로부터 바벨론-바사 제국에 반역적인 기질을 가졌다고

알려져서,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까봐,

굳이 나서서 자기 스스로 밝힐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즈음 바사제국의 2인자 하만의 난동으로, 유대인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한 날에, 바사 제국에서 유대인을 몰살시키라는 허락을 왕에게서 받아냈다.


모르드개는, 왕비 에스더에게, 아하수에로에게 나아가 탄원할 것을 재촉한다.

에스더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자기가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한지가 벌써 30일이나 되었다.

이 말은, 당시 에스더가 왕에게 총애를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바사의 규례는, 왕에게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왕에게 나아가면,

왕이 홀을 그에게 내밀지 않는 이상, 누구나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또한 에스더가 설령 왕에게 나아가 목숨을 부지했다 하더라도,

‘왕비가 왜 유대 민족의 고난에 꼭 나서야 하는지?’라고 왕이 물을 터인데,

그러면 유대인인 자기 신분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바사 나라가 경계하는 유대 민족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온 제국에 알려지면서... 에스더는 자신이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 자명했다.

아무리 계산하고 따져봐도, 에스더가 왕께 나아가는 것은.. 승산이 없는 행동이었다.


▲왕비의 체면을 벗어던지라!

그런데 모르드개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도저히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너는 왕궁에 있다고, 모든 유대민족 중에 혼자 목숨을 건지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네가 만약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받겠지만,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은, 혹시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라는 독설에 가까운 말을 서슴지 않고 퍼부었다.


이 말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네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그 이유는, 네가 지금 왕궁에 있기 때문이 아니냐? 

왕궁 안에서 감춰진 네 신분이 드러나고,

그래서 네 위치가 위협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구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에스더에게는 '왕비의 신분', '왕궁의 안전함'이 자기 <경계>였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은 

자기가 진짜 죽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모르드개가 말했다.

“에스더, 네가 네 경계를 꼭꼭 지키면, 네가 살 줄 아느냐?

한 번 지켜보아라, 그 경계가 지켜지는지?

결국 더 강력한 힘에 의해, 네 경계는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해서, 네 신분이 언제까지 숨겨질 것인가?

하만이 혹시 네 신분을 모를까?

온 유대 백성이 들끓고 있는데, 네 신분이 숨겨져 있을까?


결국 네가 꼭꼭 쳐놓은 경계는, 더 강력한 힘에 의해 무너지게 될 것인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왕 앞에 나아가 한 번 죽어보아라!

혹시 살게 될지도...” (상상력을 동원하면 이런 얘기다)

 

그렇다면, 살 길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내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길이다.

그리고 내 죽음을 택하는 길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살 길이 생긴다.


▲마침내 에스더는 힘겹게 그 진리를 받아들인다.

유대인 공동체에 자기를 위한 금식을 부탁한 후에

자기도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다’며 왕에게 나아갔다.

그랬더니 ‘죽으면 살리라’로 결판났다.


사실 이것은 상식적인 결단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는 ‘죽으면 괜히 자기만 손해다. 못 살아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 뒤에 숨겨진 진리를 믿어야 한다.

그 진리는 ‘네가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이다.


오늘 무엇이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가?

당신이 스스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쳐놓은 경계가 무엇인가?

그것을 허물고 스스로 죽어야 한다.

그래야 자유하게 된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예수님이 그 길을 선택하셨고, 제자들이 그 길을 따라갔고,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으로 다가오는 진리다. 

‘살고자 하면 죽어라!’

‘내가 죽지 않고 진정으로 사는 길은 없다!’


 

◑ <경계>로 인한 사람사이의 갈등


▲모든 사람은 <경계>를 가지고 있다.

에스더가 ‘왕비, 왕궁’이란 경계를 가졌다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기 안전을 지켜주는 경계를 절대 허물어뜨리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자기 안전을 지켜주는 경계를, 절대로 제 스스로 발가벗기지 못한다.

자기 인격과 존재의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큰 모험, 두려움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이나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경계를

자기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경계를 그어놓고 살아간다.


그런데 자주 그러한 경계가 침입을 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때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내 경계선을 허무는 그를 공격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네가 자유스럽지 않게 된다.


우리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더 굳건한 경계를 또 만들어 세운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상대로부터 더 큰 공격이 가해 온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전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을까?


답은 쉽고 간단하다. 다만 실천하는 데는 큰 모험을 필요로 한다.

자기 나름대로 세워놓은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에스더는 처음부터 왕궁에 살지 않았다.

그러나 왕궁이라는 완전한 그 경계가,

그를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말았다.(자유롭지 못하고 자기 몸을 사림)


이때는, 오히려 궁 밖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모르드개가

어쩌면 더 위엄 있고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여러분,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과거에 제가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 저는 자유로웠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담대했다.


그러나 내가 점점 무엇(목사, 교수)이 되어가면서,

점점 제 주위에 경계가 쳐져 가면서,

혹시 그 경계가 허물어질까봐 자주 두려워하게 되었고,

또한 그 경계를 허물고자 침입하는 사람에 대해

자주 분노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목사, 장로간 갈등은 ‘경계’의 충돌

우리 주변에서 서로 간에 갈등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교회에는 목사와 장로들 간에 갈등이 있다.

이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회의안건 자체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목사, 장로라는

자기들 스스로 설정해 놓은 경계 때문에 서로 부딪힌다.

그 경계와 경계가 부딪히는 것이지,

내용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가 자기 경계를 스스로 허물지 않는 한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본다.

아니, 자기가 설정해 놓은 경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아직 모르고 있다.

(쉽게 표현하면 ‘자존심’ 대결이랄까?)


▲미국 한인교회의 갈등

지난 7월 달에 미국에 가서 어느 교포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목사님은 장로님과 갈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제가 자세히 그 문제를 들어봤는데, 어떤 타협점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양측 주장이 다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틀린 주장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중재하셔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대안책/해결책이 하나 있었다.

어느 한 쪽이 죽는 것이었다.

실제로 죽어서 무덤에 묻히든지, 아니면 자기 인격을 확 죽이든지 하면

끝나는 문제였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께 이렇게 조언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목사님이 항복을 선언하고, 백기투항하세요!

지금까지 맞서 온 목사님의 주장을 다 거두겠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나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겠다고 하세요!”


목사님은 “그렇게 한 번 해 보죠”라고 말했다.

1주일쯤 지나서 궁금하기도 하고, 계속 중보기도 해 왔던 터라,

나는 그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한번 물어보았다.


“목사님, 백기를 드셨습니까?” (자기 경계를 허무셨습니까?)

“못했습니다.”


“왜요?”

“제가 백기를 드는데, 명분이 없습니다.

저 장로님들은 아무 태도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나만 백기를 든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목사님, 당신은 목사이기 이전에 크리스천입니다.

자꾸 ‘목사 체면, 목사 신분’에 연련하지 마시고,

크리스천으로서 다 내려놓으실 수 있습니다.

만약 명분이 필요하다면, 그게 바로 명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어라, 그러면 다시 산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우리는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기 경계를 못 허문다.

죽으면 다시 못 살 것 같아 보인다.

명분, 명분 하지만... 사실은 자기 경계를 허물고, 자기가 콱 죽는 것이...

심히 두려운 것이다.


▲부부간의 갈등도 마찬가지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경계’가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스스로 허물지 않으면,

경계끼리 서로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서로의 주장으로 맞서게 된다.

‘이것 건드리면, 이 선 넘으면.. 너는 죽는 줄 알아!’


부부간에 이 경계의 충돌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는

한 쪽이 완전히 죽으면 된다. 즉, 자기 경계를 다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부부지간이 다시 회복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한 알의 밀알의 법칙’이다.


내가 죽으면 나만 손해일 것 같은데,

내가 죽으니까 우리가 살고, 전체가 사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의 법칙’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만약 내가 지금 안 죽어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다.

인생은 아침 이슬처럼, 마르는 꽃잎처럼 곧 시들다가 죽게 되어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안 죽으려하고,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안달하는데...

그럴 바에야 신앙으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겠다.


그렇게 자기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은

주위에서 누가 자기를 무시하고/비난하고/차별한다고

분노/맞상대/맞고소 하지 않는다.


자기 죽음을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죽지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좀 빨리 죽어주마...’

하고 자연스레 넘어간다.


그렇게 인격이 죽고, 자기 경계가 다 무너지고,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기가 다시 살아난다. 대적에 대해 자유하게 된다.

 

과거의 순교자들, 과거의 신앙의 위대한 선진들은

모두 이 진리를 터득한  분들이었다.


그래서 보통 신자보다 한 차원 높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죽으면 살리라’는 진리를 믿고, 진짜 자기 몸을 죽음에 내던졌던 분들이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

우리도 신앙생활 하는 중에

자기 경계를 허물고 나와서 죽으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이 그 경계를 허물기는커녕, 더 견고하고 높게 쌓아간다.

그러면 그 경계에 꼭꼭 갇혀서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만약 에스더가 자기 경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일생 궁 안에서 서서히 신음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여러분, 믿음이 있으신가?

‘죽으면 살리라’는 그 믿음!


▲경계가 없으면 침입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 동그라미를 그어 놓는다. 그리고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한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직선을 그어놓고, 위쪽과 아래쪽을 구분한다.

이렇게 자기가 그어놓은 선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유발된다.


생각해 보시라, 경계가 없으면 침임도 없게 된다.

괜히 담임목사의 경계, 장로의 경계, 부장의 경계...

보수/진보의 경계, 남/녀의 경계(성차별)...

자기 스스로 그어놓고, 자기 스스로 성질내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진리를 가르치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그대로 있으면 아무 열매도 없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하도록 보존하리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적극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삶

적극적으로 죽어주는 삶

이것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자기를 살리는 길임을... 가르쳐 주셨다.

 

<08.08.17. 인터넷설교 녹취    *원제목 : 죽으면 살리라        [주제별 분류] 내적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