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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인정 중독'에서 벗어나기

LNCK 2008. 10. 31. 23:16
 

◈'인정 중독'에서 벗어나기             갈1:10            -펀 글, 출처 보기-



사람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 쓰고, 상처받는다.

타인의 반응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고, 쉽게 슬럼프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인정 중독’에 빠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께 속했나, 사람에 속했나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내가 몰두하는 것을 보면 안다.

약간의 비판에 분노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약간의 거절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약간의 칭찬에 내 기분이 고양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약간의 성공이 나를 흥분케 한다... 세상에 속한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대양에 떠있는 조각배와 같이

철저히 물결치는 대로 요동치는 인생이다.”



인정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의 인정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다.(고전4:3)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라고 한다.


비판이라는 물결이 있지만, 바울이라는 배를 흔들 수 없다는 말이다.

주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O개는 짖어도 경부선은 간다” 개가 아무리 짖어도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개의 짖는 소리에 영향 받는 기관사라면, 그는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명자는 쓸데없는 비판 때문에 사명을 멈추지 않는다.


오직 사명자는 주님의 평가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작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

젊은 여자들 중에 고개를 못 들고 인사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머리를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혼자 자격지심에 눌려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운 여름에도 반팔 티셔츠를 못 입는 사람이 있다.

팔뚝이 두꺼워서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다른 사람이 자기 팔뚝을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괜히 보지도 않는 남의 눈을 의식하다가, 팔뚝에 땀띠만 생긴다.



칭찬 받으면 힘을 얻는다. 반대로 정죄 받으면 위축된다.

그래서 칭찬과 격려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죄 받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온갖 정죄와 저주를 다 받으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나셨다.

남의 비판과 정죄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안 죽는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오히려 강하게 일어선다.

마귀의 비판과 정죄의 공격에 초연함을 배우면, 마귀가 괴로워한다.

더 이상 사용할 무기를 찾지 못해 마귀는 우울증에 걸린다.

주님만 의식하는 행동은 마귀의 유혹을 무력화시킨다.



▶'인정 중독'을 이기는 확실한 행동은 은밀히 행동하는 것이다.

마6장을 보면, 경건의 3대 주제인 구제, 기도, 금식을 다룬다.

좋은 것(구제, 기도, 금식)도 타락할 수 있다.


경건이 타락하지 않는 길이 무엇인가? ... 은밀히 행하는 것이다.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금식할 때에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

은밀하게 행동하는 훈련을 하면, 인정중독에서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다.


은밀히 행할 때의 보너스 특권은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갚으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4

밥을 할 때, 뚜껑을 자주 열지 마시라. 은밀한 중에 밥은 익는다.

은밀함이 열매를 거두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회한과 교만의 사이


사람이 악을 행하면 회한(후회, 탄식)에 빠지고,

선을 행하면 교만에 빠진다. 

그래서 사람은 선과 악 사이, 회한과 교만 사이에 언제나 살고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좌우로 늘 왔다 갔다 한다.

어떤 때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 머리를 아래로 감추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작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자기의 미를 과시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성전에서 애통하며 참회하는 세리의 모습을 가지고,

어떤 때는 세리 곁에서 자기의 의를 과시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이 둘 사이에 대부분 크리스천이 위치해 있다.


나는 엑스폴로 '74, '80 같은 대성회를 준비하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였다.

이런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비방자와 방해자들도 잇달았다.


그 때 처음에 나는 모세의 홍해 사건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나를 비방하던 자들이 모조리 홍해에 몰살되는 것 같은 마음을 가졌었다.

또한 하만과 모르드게 사건을 연상했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했던 장대에 하만이 매달리는 것을 상상하면서

모든 반대자들을 뚫고 나갔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그들 반대자들과 별다름 없었고,

어쩌면 더 교만했음을 깨닫는다.

 

나의 무의식중에 보복심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참회한다.

 

(내가 회개하고 아파하지 않는 날, 십자가를 잊어버린 날, 

나의 시계추는 -나도 모르게- 영적 교만 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나도 모르게- 후회, 낙심 쪽으로 기울어져 산다는 뜻이군요.)     

                                            

<「예수칼럼」김준곤 목사님 칼럼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